기왕 작심을 한 것 단번에 6천만 원을 대출 받아 중도금 날에 잔금까지 지불하고 장영희씨의 인감증명을 받아 넘기자 단 일주일 만에 등기필증이 날아왔다. 평수는 312평이었지만 필지 수는 자투리땅을 포함해 다섯 필지나 되었다.
이제 날씨도 추울 뿐 아니라 밭에 크게 거둘 작물도 없고 더더욱 힘들여 땅을 개간할 처지도 아니니 괜스레 춥고 외진데서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따신 밥 얻어먹고 작품을 하라는 영순씨의 권에 따라 주중에 하루쯤만 오리 밭으로 가기로 했다.
24. 또 다시 지주의 횡포(8)
다음일요일 아내와 같이 임랑해수욕장을 지나며
“이 깨끗한 바닷가도 이젠 거의 끝이네. 저 둥그런 원전건물도 그렇고.”
“당신 그 동안 고생했어요. 나는 그까짓 거 암만 해봐도 남의 땅에 당신이 그렇게 지독하게 돌을 파내는 것이 참 안타까웠는데.”
“그래. 인자 땅을 파도 우리 땅이고 거름 한 포대를 줘도 내 땅 걸우는 것이고.”
“내 땅이라고? 입은 찢어져도 말은 바로 한다고 거기가 어데 당신 땅인교? 내 땅이지.”
“어쭈, 그럼 부산 아파트는 내 집이지 당신 집은 아니네.”
하고 현장에 도착해 커피부터 한잔씩 맛있게 끓여먹고
“벌써 마늘이 싹이 트네.”
하면서 부지런히 양파를 심었다.
“이제 무 배추 뽑아서 김장만 하면 올해 일은 끝이네. 슬슬 명촌으로 이사할 준비나 할까?”
하고 둘러보다
“당신 저 태산같이 쌓아놓은 나무하고 거름은 다 우짤 거요?”
“나무는 명촌에도 많을 테니 그냥 두고 닭똥거름은 마다리에 넣어가지.”
“그럼 이따 슬슬 넣어볼까?”
“아니, 아직 땅을 사서 옮겨가는 표는 내지마. 아직 몇 번 더 와야 되는데 굳이 미나쁜 소리를 할 일이 없지.”
“알았어.”
하고 라면을 끓여서 점심을 먹을까, 아니면 감자탕집으로 갈까 연구 중인데
“아이구, 이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이선생이 휘적휘적 걸어와 둘이 악수를 하는데
“두 분이 일을 하는 걸 보면 참 인정도 있고 그림이 좋아. 그런데 우리부부는 왜 그런 그림이 잘 안 나오는지 참...”
자동차 키를 손에 든 윤여사가 따라오면서
“날씨도 쌀쌀한데 사모님, 커피 한 잔 주실랍니까?”
하고 먼저 방에 들어가 넷이 둘러앉자
“저어, 이 선생님!”
이 선생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더니
“제가 명색 좀 있는 집에 귀한 아들로 자라서 남을 존경할 줄 모르는데 근래에 모처럼 한 분을 존경하게 된 분이 바로 선생님인 줄은 아시지요?”
“네에?”
“공직자로서의 포부나 신념, 또 내면적 성숙과 내공도 그렇지만 특히 선생님의 시에서 풍기는 아련한 인간적 향기와...”
“아이구, 왜 이러시는지? 소쿠리뱅기 고만 태우소.”
“아, 아닙니다. 진정입니다.”
하고 윤여사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서로 사인을 맞춘 듯
“실은 요즘 지리산 쪽에 조금 투자를 늘이다보니 자금사정이 여의찮아 여기 오리 땅을 조금 처분할까 생각중인데 말입니다.”
“...”
“선생님께서 힘들여 개간하신 땅을 내어놓으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그렇고.”
“...”
“또 선생님이 이 오리 땅에 애착도 많으시고 주변사람들과 적응도 잘 하시는 게 영판 임자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욱이 이 임시건물도 그렇고.”
“...”
“땅은 매실나무를 심은 위쪽을 빼고 아래쪽 600평을 전부 팔 예정이지만 2-300평으로 잘라서 사도 되고 위치는 어느 쪽이라도 좋습니다.”
“아니, 우리는 아직 땅 산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어서. 물론 돈도 없고...”
“아니요. 소리 없는 알부자로 알고 있는데요.”
“저런! 그래 가격은 평당 얼마나?”
마침 얼마 전에 보일러김사장과 윤 여사가 평당 55만 원에 땅을 내놓았는데 아래쪽에 있는 간판집 땅 600평이 30만 원에 팔린 것으로 보아 아무리 땅이 평평해도 온갖 잡동사니가 다 묻힌 성토자리인 만큼 평당 한 35만원, 잘 해야 37-8만 원 정도라고 이야기하던 일이 생각나는데
“원래 한 60만 원은 받아야 되지만 우리가 돈이 급하니 55만 원 정도로 낮추고 또 가선생님이라면 한 50만 원 정도로 낮출 수도 있지요.”
“아, 그렇구나? 가격이.”
아무 뜻이 없다는 듯 받는데
“곧 고리 1,2호기가 폐쇄된다는 이야기도 있어 투자가치도 높은 편입니다. 그리고 만약 일대가 아파트단지나 골프장부지로 개발되면 중심부의 저지대인 이 땅은 거의 알 박기 수준으로...”
“...”
“바로 옆에 폭이 4미터가 넘은 길이 있으니 건축도 가능하고.”
“건축이라?”
열찬씨가 히쭉 웃자
“예. 아무도 허가를 못내는 임시건물허가를 단 10분 만에 받아내는 선생님정도의 능력이면 군청에서 건축허가 정도야 말입니다.”
“허허 참. 그래도 그거 다르고 또 그거 다르지.”
(세상에나 사람을 얼마나 호구로 아는 거야? 부동산업자들이 땅값을 불릴 때는 사기꾼과 다름이 없다더니...)
40년이나 행정업무를 본 사람 앞에 현황도로만 있고 법정도로가 없는 맹지(盲地)에 건물을 짓는다고 사기를 치다니...)
싶어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이선생도 멈칫하는데
“예.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가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어서요.”
영순씨가 나서자
“예 뭐 당장 결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한번 생각해 보시라구요.”
하며 이선생이 물러서는데
“라면이라도 끓여서 같이 드실랍니까?”
영순씨의 말에
“아니, 우리는 아들하고 같이 만나 횟집에 갈 약속이 있어서요.”
좀체 어머니라고 불러주지 않는 아들을 굳이 우리 아들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윤여사가 방을 나서서
“아따, 김장배추도 잘 됐다. 우리 선생님 농사솜씨가 완전 프로야!”
감탄하는 척 하며 영순씨의 눈을 바라봤다. 내 땅에서 이렇게 농사를 잘 짓지 않느냐는 뜻을 알아챈 영순씨가
“뭐 워낙 땅이 좋고 공기가 좋다보니...”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선생의 말에
“예. 그러지요.”
하고 두 사람이 떠나자
“당신 14층에 우리가 명촌에 땅 샀다는 이야기 했나?”
“아니요.”
“그런데 갑자기 왜 땅을 사라는 걸까?”
“하연이할매가 요새 부쩍 언양에 자주 간다는 말에 땅을 둘러보러간다고 한 일은 있는데.”
“그래서 언양땅 사기전에 선수를 치는 모양이군.”
“좌우간 능력은 있어. 금방 낌새를 느끼다니.”
하고 둘이 허허 웃었다.
이제 어떻게 언양에 땅을 사고 언제 쯤 옮긴다는 이별통보를 하는 것이 문제였다.
“김장채소 뽑고 나서 한해 농사 잘 지었다는 인사 겸해 넷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합시다.”
하연이할머니에게 이미 땅을 샀다는 이야기와 윤여사가 섭섭할까 걱정이라는 이야기 끝에 그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그간 농사도 잘 지었고 하니 망년회 겸 저녁식사나 하자며 연락을 해 적당한 장소가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니 연산로터리에 있는 단골 초밥집을 지목했는데 열찬씨도 가끔 다닌 곳이었다.
영순씨와 둘이 초밥집에 들어서자
“축하합니다. 언양에 땅을 샀다면서요?”
“예. 제 평생소원이 고향인 언양의 신불산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서 말입니다.”
“좋겠습니다. 글이 절로 나오겠습니다.”
“예. 뭐 그건 그렇고...”
“아무튼 축하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헤어질 줄은 몰랐지만 저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 근래 단 한 사람 존경하는 분을 만난 것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이제 형님처럼 지내고 싶어요.”
“아이구, 과분한 말씀.”
하면서도 언양에 땅을 샀다는 이야기를 차마 하기 힘들 것 같던 고민이 자동해소 되어 한숨을 돌리는데
“참, 선생님 오리농장의 건물이랑 집기랑 농기구와 거름은 다 어쩌실 건데요?”
“아, 예...”
한참이나 미간을 찌프리고 생각하던 열찬씨가 영순씨와 눈을 맞추며
“다른 건 몰라도 농막은 가져가야 될 것 같아요. 그래야 비바람도 피하고 글도 쓰고.”
“그게 한번 움직이기 쉽지 않을 텐데요.”
“예. 장비가 한번 오는데 40만 원이라고 들었습니다. 돈이 좀 들어도 하는 수 없지요.”
하는 순간
“그런데 말입니다.”
이 선생이 눈을 빛내더니
“선생님은 거기 새 땅서 집을 짓던지 아님 다시 가건물을 짓던지 하고 농막은 여기 두고 가시지요. 제가 수시로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좋았지만 여태 번듯한 건물이 있다가 뜯겨나간 뒷자리가 너무 허전할 것도 같고.”
“그렇겠네요.”
“해서 안에 있는 집기일체를 포함해 우리에게 넘겨주시면 합니다.”
“집기까지?”
하며 영순씨를 바라보는데
“이 양반 컴퓨터 말고는 다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싹싹하게 나오자
“비용이 얼마나 들었지요?”
“예. 집기를 빼고 순수 건물 값이 200만원에 가림막에 방수탁자에 쓰레기 소각통 등 부대경비가 한 50만 원 가치는 된답니다.”
“예. 그럼 건물과 가림막과 탁자와 소각통을 합쳐 200만 원, 나머지 냉장고 세탁기등, 전기난방등을 쳐서 20만 원 도합 220만 원에 저희가 인수를 하면?”
“보자아...”
열찬씨가 생각에 잠기는데
“그리하시죠.”
영순씨가 시원시원하게 말하자 분위기가 일단락되고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자리가 파할 때쯤
“자, 선생님 시집. 약속대로 돌려드립니다.”
윤여사가 <비오는 날의 연가>를 꺼내주자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비가 오거나 울적한 날 수시로 꺼내 읽었는데...”
이선생이 몹시도 아쉬운 표정이라
“죄송합니다. 저도 여분이 없어서. 혹시라도 책이 생기면 한권 드릴 게요.”
“시집이 생기다니요?”
“친구나 친척집에 가서 아무 관심도 못 받고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쓴 책을 보면 내 자식이 어디서 천대받는 것만 같아 슬며시 가져오는 수가 있어요.”
“저런! 비록 시를 좋아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게 그 사람들에겐 의미 있는 소장품이나 기념품일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지요. 뭐.”
열찬씨가 계산을 하자
“선생님, 오늘 같은 날 노래방은 어때요?”
해서 넷이 한 시간 반이나 노래방에서 놀다가 헤어졌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