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공유주의의 비교 이미지 [by AI copilot]
들어가며: 공유주의란 무엇인가
‘공유주의(共有主義, Commonism)’라는 말은 아직 낯설게 들릴 수 있다. 이는 공산주의(Communism)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을 중심 가치로 삼는 체제라면, 공유주의는 공유 자원(commons)을 사회 운영의 핵심 가치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토지, 물, 공기, 숲, 바다 같은 자연 자원뿐 아니라, 데이터, 지식, 문화와 같은 현대적 자원까지도 모두가 함께 관리하고, 그 과실을 공정하게 나누자는 원리다. 쉽게 말해, “우리 모두의 것”을 “우리 모두의 방식”으로 지켜내자는 사회적 비전이다.
1. 공유지의 비극과 그 반박
1968년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에서,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초지에 소를 방목하면 각자 이익을 위해 소를 더 늘리려 하고, 결국 목초지가 황폐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이 공유 자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사유화나 강력한 국가 규제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럼은 다른 길을 제시했다. 그녀는 세계 곳곳의 어장, 관개수로, 산림 공동체를 연구하며, 사람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감시하며 자원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공유지는 반드시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며, 제도와 신뢰가 있다면 오히려 지속 가능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을 떠올려 보자. 모두가 함께 쓰는 공간이지만, 주민들이 규칙을 정하고 서로 지켜보면 큰 갈등 없이 운영된다. 반대로 규칙이 없거나 무시된다면, 이기적인 주차가 난무하고 결국 모두가 불편해진다. 공유지의 운명은 인간 본성 자체가 아니라, 어떤 제도가 마련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2. 두 이론이 전제한 인간 본성
하딘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로 전제했다. 반면 오스트럼은 인간이 협력하고 규범을 따를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예로 들어보자. 하딘의 관점대로라면 사람들은 귀찮음을 피하려 아무렇게나 버리고, 결국 재활용 시스템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규칙을 지키고, 관리사무소가 감시와 제재를 가하면서 질서가 유지된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상황과 제도에 따라 협력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로, 동네 도서관을 생각해 보자. 모두가 책을 빌려가면서 제때 반납하지 않는다면 도서관은 금세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다수가 규칙을 지키고, 연체료라는 제재 장치가 있어 시스템이 유지된다. 이는 인간이 제도와 규범 속에서 충분히 협력적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3.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여와 한계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동력으로 삼아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는 이를 극대화하여 시장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그 결과 우리는 값싼 상품, 빠른 기술 발전,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평등의 심화, 환경 파괴, 공동체 해체라는 부작용도 겪고 있다. 예컨대 대형마트의 저가 경쟁은 소비자에게는 이익이지만, 동네 상권을 무너뜨리고 지역 공동체를 약화시켰다. 또 온라인 플랫폼의 편리함은 삶을 바꾸었지만, 배달 노동자들의 과로와 불안정한 고용이라는 그림자를 남겼다.
자본주의는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풍요가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 일부만이 과실을 독점하고, 다수는 불안정한 삶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고착화되고 있다.
4. 그 한계의 근본 원인: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
자본주의는 인간을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존재로 전제했다. 그래서 시장이라는 장치를 통해 욕망을 경쟁으로 묶어두려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의 협력 가능성, 윤리적 판단력, 공동체적 감수성은 과소평가되었다.
회사 조직을 예로 들어보자. 상사가 직원들을 ‘성과급’이라는 경쟁 논리로만 관리하면, 직원들은 서로 협력하기보다 경쟁자로 인식한다. 그러나 협력적 문화를 중시하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서로 돕고, 장기적으로 더 큰 성과를 낸다. 결국 인간은 어떤 제도와 문화 속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5. 맹자와 순자를 넘어서는 묵자의 ‘소염론’(所染論)
동양 철학에서도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오래되었다. 맹자는 인간이 본래 선하다고 했고, 순자는 본래 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묵자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은 선도 악도 아닌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환경과 제도에 따라 물든다고 보았다.
마치 흰 천이 어떤 물감에 담기느냐에 따라 색이 달라지듯, 인간도 어떤 제도와 문화 속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는 경쟁적 인간이, 협력적 제도 속에서는 협력적 인간이 자라난다.
학교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입시 경쟁만 강조하는 제도 속에서는 학생들이 서로를 경쟁자로만 본다. 그러나 협동 학습과 공동 프로젝트를 강조하는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협력과 배려를 배우며 성장한다. 묵자의 통찰은 오늘날 교육과 사회 제도 설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6.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제도 구축 : 공유 기반 소득 배당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답은 제도 설계에 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만 전제하는 대신, 협력적 존재로 물들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 대안 중 하나가 공유 자원 기반의 소득 배당, 즉 기본 소득이다. 토지, 환경, 데이터, 공공 인프라 등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모두에게 배당하는 방식이다.
실제로도 사례가 있다. 미국 알래스카 주는 석유 수익을 기금으로 조성해 주민들에게 매년 배당금을 지급한다. 핀란드는 기본소득 실험을 통해, 일정 금액을 무조건 지급받은 사람들이 더 큰 삶의 안정과 사회적 신뢰를 경험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런 사례는 공유주의적 발상이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작동 가능한 제도임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마을 사람들이 함께 가꾼 텃밭에서 수확물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내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지키는 법을 배운다.
맺으며: 인간을 다시 상상하는 정치
우리는 어떤 인간을 상상하는가에 따라, 어떤 사회를 설계할 것인가가 결정된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상상했고, 그에 맞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제는 인간을 협력하고 책임지는 존재로 상상하고, 그에 맞는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공유지의 비극은 인간 본성의 비극이 아니라, 잘못 설계된 제도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제도를 만들고, 어떤 사회를 꿈꾸느냐에 따라 인간은 달라질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자본주의의 최전성기에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성취를 넘어설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공유주의와 기본소득은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실험되고 있는 현실적 대안이다. 알래스카의 석유 기금 배당,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앞선 비전은 언제나 처음에는 낯설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가 지금 공유주의적 상상력을 품고, 협력과 분배의 제도를 설계한다면, 미래 세대는 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공유주의로, 승자독식에서 기본소득으로!’ 이제는 인간을 다시 상상하고, 제도를 다시 설계해야 할 때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진실한 비전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