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에 대한 관견(管見) ⑥기본소득은 사고(思考) 혁명의 열매

기본소득에 대한 관견(管見) ⑥기본소득은 사고(思考) 혁명의 열매

조송원 승인 2017.06.11 00:00 의견 0

실업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대에는 기본소득 제도로 사회안전망을 세워야한다고 강조하는 마틴 포드.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컴퓨터 설계자,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미래사회를 전망하는 다수의 저서를 발간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사진 왼쪽은 미래사회를 그린 그의 대표적인 저서 표지.  

개인의 인격성숙도의 지표는 무엇일까? 나아가 한 사회의 건강성의 표지(標識)는 무엇일까? 감연히 말해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약자를 포함하여 사회적 소수자(특히 성적 소수자)와 이주민, 장애인 등에게 주류집단 구성원들이 보내는 시선의 온도에 개인의 인격성숙도와 사회의 건강성이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크게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가부장적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는 여성도 약자의 범주에 넣어도 대과는 없으리라.

우리나라는 소득집중도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매우 불평등한 나라이다. 물론 불평등 문제는 그 정도의 차이일 뿐 세계적인 현상이다. 왜 산업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21세기에서 불평등이 악화되었고 악화일로에 있는 것일까?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컬럼비아대 교수의 『불평등의 대가』와 『거대한 불평등』 , 그리고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 교수의 『21세기 자본』을 언급하지 않으면 지식 생산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저마다 독법은 다르겠지만, 스티글리츠 교수가 필자에게 준 영감은, 경제 문제에 대한 정치의 역할이다. 흔히들 정치가 밥 먹여 주나, 하고 우리의 살림살이 문제와 정치는 무관하다고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스티글리츠 교수는 우리가 행사하는 한 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이미 우리는 증험하고 있다. 대통령 한 사람 바꿨을 뿐인데 호흡하는 공기가 다르지 않는가.

피케티 교수는 우리나라가 왜 ‘성형대국’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돈을 버는 속도(자본수익률)가 사람이 일해서 버는 속도(경제성장률)보다 빠르기 때문에 소득이 집중된다. 하여 가족의 부(富)가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부자로 태어나거나 결혼을 잘하는 것이 열심히 일을 한다거나 창업을 하는 것보다 개인의 성공에 더 확실한 보증수표가 된다. 그러므로 성공을 하는 한 방법으로서 결혼을 잘하기 위해 성형을 하는 것을 누가 ‘외모지상주의(lookism)’라고 폄훼할 수 있으랴! 합리적인 투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그러나 가족주의는 조선 시대를 관통하는 행동원칙이었다. 조선 시대도 고고한 선비의 나라는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속담이 괜히 생겼겠는가. 불평등을 저어하는 속담도 있다. ‘천석꾼 하나 나면 삼십 리 안이 망한다.’

민족국가가 없는 식민지 공간에서도 행동원칙은 가족주의였다. 일제가 자본주의를 촉진하는 제도를 갖추고 일본인 기업이 투자를 늘리자 경제적 기회도 증가했다. 한국인들은 가족의 번영을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했다. 가족 이외에는 자신의 생존과 꿈을 보장해 주고 실현시켜 줄 제도가 전무한 사회에서 가족주의는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부역자는 아니었더라도 친일로 경제적 기반을 다진 이들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면면히 ‘지대추구 연합(rent-seeking coalition)’을 형성해 왔다. 지대추구(rent seeking)란 부를 창출한 대가로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창출된 부 가운데 상대적으로 많은 몫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차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지대란 불로소득이다.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도 ‘rent’란 단어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경제학 용어로서 rent는 ‘초과이윤’이란 뜻이 있으니, 지대추구를 ‘초과 이윤 추구’ 혹은 의역하여 ‘불공정 이윤 추구’라 풀면 그 뜻이 경제학 문외한에게도 가슴에 와 닿는다.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행위도, 사업자가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행위도, 공무원이 뇌물을 받는 행위도 모두 ‘rent seeking’ 곧 불공정 이윤 추구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헬조선’의 소득불평등뿐 아니라 사회 전부문의 불평등은 이 가족주의와 불공정 이윤 추구에 그 근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우리 사회는 가족에 대해 아주 관대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발전된 복지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가족에게 떠넘겨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레기’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신은 물론이고 세월에 꺾인 부모, 사랑하는 아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의 밥그릇을 갖고 장난을 친다면, 그 누가 그 압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 눈보라 휘몰아치는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한 독립투사의 의기를 너와 나 우리 소시민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일은 아닌가!

하여 늙은이든 젊은이든 어린이든 대한민국 구성원의 자격으로 누구나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제공된다면? 쉬 붓을 구부리거나 국정 농락 세력에 머리 조아리지 않을 거라고 단언한다.

기본소득, 하면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돈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재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문제가 될 뿐이다. 돈은 충분하다.

첫째, ‘클로백(clawback)’ 제도를 활용한다. 5000만 전 국민에게 월 100만 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면 연 600조 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기본소득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이므로 상위 50% 소득자에게서는 세금으로 지급된 기본소득을 환수하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실제 필요한 예산은 300조 원으로 반감한다.

둘째, 선대인의 『프리라이더』에 따르면, ①조세 구조개혁과 세출 구조조정을 통해 각각 50조 원씩, 100조 원의 추가 재정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②부동산 보유세가 미국은 1.5~1.6%, 일본은 1%이다. 우리도 전체 부동산 자산의 1%에만 과세해도 매년 약 60조 원의 세수를 추가로 거둘 수 있다.

오건호의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에 따르면, 우리의 ‘총직접세(직접세+사회보장기여금)율’은 2007년 기준으로 GDP 17.5%로 OECD 평균 24.6%에 비해 7.1% 포인트가 부족하다. 소득재분배 효과를 가진 총직접세 수입이 매년 OECD 국가들에 비해 약 70조 원을 덜 걷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GNP의 27%에 달하는 지하경제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상속세 등을 제대로 매긴다면 300조 원의 재원 마련은 우리 경제 실력에 결코 버거운 일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우리 사회에 대한 믿음은 기본소득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사회가 책임을 져 준다는 제도가 확고할 때, 세금은 그 자체로 보험의 역할을 하므로 조세 저항은 최소화될 것이다. 복지병은 기우에 불과하다. 인간은 보람을 먹고 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펠츠만 효과(Peltzman effect)’라는 게 있다. 자동차의 안전장치 개발로 오히려 자동차 사고와 사망자 수가 더 늘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안전장치를 신뢰한 나머지 난폭 운전을 하게 되어 사고율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의 경제적 함의는 무엇일까?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성공한 실리콘 밸리 사업가인 마틴 포드(Martin Ford)는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블루칼라, 화이트칼라를 막론하고 10~20년 안에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며 이런 충격을 흡수하려면 지금부터 ‘기본소득 보장’ 등의 안전망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이 어려운 방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기본소득 보장으로 저는 더 많은 기업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더 많은 사람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시작할 겁니다. 경제학에서는 말하는 ‘펠츠만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겁니다. 안전망을 제대로 갖춰 줄수록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거죠.”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다수 구성원이 고통 받는 현 지배구조와 사회구조는 그 정당성을 잃었다. 하여 주인인 너와 내가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 기존 생각에 변화가 있을 때 혁명이 일어난다. 정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정치는 타협이다. 강고한 기득권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근본적 변혁은 정치로써는 불가능하다.

‘먹고사니즘’을 넘어 마음껏 자원봉사를 할 수 있고, 상품 가치와 무관하게 예술에 몰입할 수 있으며, 태생적 한계를 지닌 자식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필요가 없는 사회, 나아가 인간의 품위를 지키면서 게으를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사고(思考)의 혁명을 하자.

혁명이란 본시 한 사람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에서 시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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