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情萬里 - 박창희의 길 이야기 <1>황산도 나그네㊤

無情萬里 - 박창희의 길 이야기 <1>황산도 나그네㊤

박 창희 승인 2018.01.17 00:00 의견 0

경남 양산 물금읍 지역주민이 옛 황산역 터를 가리키며 황산역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창희

한참을 몇 번 가야 만리를 가겠는가. 만리가 달리 만리랴.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고, 가다 보면 천리, 만리인 것을. 무정터라 한탄 말고 무정만리 걸을 참이니, 세상의 도반(道伴)들이여, 같이 발맞추지 않을 손가.

#황산(黃山)이 어드메뇨

사배고개를 넘는다. 사배고개는 부산과 양산을 경계 짓는 지경(地境)고개다. 나이 든 분들은 ‘사밧재’라 해야 알아듣는다. 요산 김정한은 소설 「사밧재」에서 송 노인을 통해 “문경 새재가 높다카더만, 머 사밧재보다 짜다라 높지는 않을꾸로!”하며 사밧재의 험준함을 설명한다. 사밧재 길은 범어사 옛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신라 문무왕대인 7세기부터 터인 길이다.

박 선달의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 지방도니, 고속도로니 해서 사밧재가 뭉턱뭉턱 깎여 나갔다. 그렇긴 해도 사밧재는 여전히 만만한 재가 아니다. 박 선달은 오늘 황산역(黃山驛)까지 걸을 참이다. 양산박물관에서 ‘황산역 특별전’을 열고 있다니 긔 아니 반갑고야.

황산(黃山)은 오늘날 양산 물금을 이른다. 황산, 왜 누른 산이라 했을꼬? 황산이란 지명은 가야-신라적 철기시대를 호출한다. 1997년 경남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와 가촌리 일대에서는 철을 생산하는 제철 관련 구덩이 10여 곳이 발굴되었다. 철광석과 송풍관 등 철 생산 유물도 나왔다. 가까이는 1960년 초부터 철을 캐낸 오봉산의 물금 광산이 있다. 물금 광산은 약 30년간 335만 톤의 철을 캐낸 노다지였다. 여기서 캐낸 자철광, 적철광, 경철광 등은 대부분 포항제철소에 보내졌다. 이러한 철산지가 멀리는 ‘철의 왕국’ 가야의 기반이었다. 오봉산 등지의 철광산에서 흘러나온 누른 물이 ‘황산’이란 지명을 낳은 셈이다.

황산이 물금(勿禁)된 건 다소 뜬금없다. 일설에는 가야-신라의 왕래가 잦은 이곳은 전쟁이 나더라도 ‘금하지 말자’는 뜻이라 하고, 일설에는 낙동강 수해가 잦아 ‘물이 넘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금(水禁)→물금’이라 했다는 것이다.

물금은 그렇다 치고, ‘황산’이란 지명은 뿌리가 있다.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조(서기 77년)에는 신라가 남쪽 변방지대인 이곳에 황산진(黃山津)을 설치·운영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후 665년(문무왕 5) 삽량주(歃良州)가 설치될 때에도 이곳은 황산, 또는 황산진으로 불렸다. 낙동강을 황산하(黃山河), 황산진이라 이름한 것도 이런 연유다. 하고 보면, 황산진, 즉 물금나루는 역사가 무려 2천 년이다. 이 땅 나루의 터줏대감 격이다.

나그네가 가지고 다니던 것들. 출처: 양산박물관 ‘황산도 특별전’.

고려 940년(태조 23) 양주(梁州)로 개칭되었을 때도 이곳은 황산진이라 불렸고, 조선시대 들어선 황산역(黃山驛)으로 바뀐다.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다.

조선 시대 전국의 도로는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9개 대로(大路)가 열려 있었다. 부산은 영남 대로를 통해 한양과 이어졌다. 영남 대로에는 다시 좌도, 중도, 우도 세 갈래 길이 있었는데, 그중 문경새재를 넘는 중도가 가장 널리 이용되었다. 이 길은 동래에서 시작하여 양산-삼랑진-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조령(문경새재)-충주-용인 등을 거쳐 14~15일이면 한양에 닿았다.

영남 대로는 파발을 통한 국가 공문서가 오간 관로, 선비들의 과거길, 보부상들의 장삿길, 왜상(倭商)들의 상경로였다.(임란 이후 왜상들의 상경은 금지됐다) 왕명을 받든 조선통신사들이 오갔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병들이 짓쳐 올라온 길이다. 한민족사의 영욕과 애환이 서린 길이다.

동래에서 밀양에 이르는 길은 ‘황산도(黃山道)’로 불렸다. 조선시대의 대로들은 요소 요소에 역참을 두었는데, 양산의 황산역(黃山驛)이 중심역이 되다 보니, 황산도란 이름이 통용된 듯하다.

황산도에 속한 역은 모두 16개였다.1) 역명을 보면 ①유산역(由山驛) 혹은 윤산역(輪山驛) ②위천역(渭川驛) ③덕천역(德泉驛) ④잉보역(仍甫驛) 혹은 잉포역(仍浦驛) ⑤노곡역(蘆谷驛) ⑥굴화역(掘火驛) 혹은 굴화역(堀火驛) ⑦간곡역(肝谷驛) ⑧아월역(阿月驛) 혹은 하월역(河月驛) ⑨신명역(新明驛) ⑩소산역(蘇山驛) ⑪휴산역(休山驛) ⑫수안역(水安驛) ⑬용가역(龍駕驛) ⑭덕산역(德山驛) ⑮무흘역(無屹驛) ⑯금동역(金洞驛) 등이다.

옛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오늘날 지명을 파악할 수 없다. 지명의 역사성을 우리 스스로 무시하고 외면한 결과다. 이름을 잃어버렸으니 정신이 남았겠는가. 역(驛)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질주의 시대’를 앞당겼으니, 우리는 달려도 너무 달렸다.

휴산역, 소산역이 표기된 조선 후기 지도.

황산역은 규모가 매우 컸다.2) 1895년에 발간된 『황산역지』에 따르면 역리가 7638명, 남·여 노비가 1176명, 말은 큰 말 7마리, 중간 말 29마리, 짐 싣는 말인 복마(卜馬) 10마리 등 모두 46마리가 배치됐다.

황산역은 중앙에서 파견된 찰방(察訪, 종6품)이 관장했다. 역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한 찰방은 위세가 대단했다. 양산 지역에 어사가 순찰을 돌 때 보필할뿐 아니라 군수(종4품)의 치정을 견제했다. 찰방에게 밉보이면 군수 해먹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역참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잇속을 챙기는 등 국고를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그 파란의 변화는 그대로 길의 역사다.

‘오, 황산역이여, 황산 옛터여!’ 박 선달은 황산역의 영화를 떠올리며 가는 신음을 내뱉는다. 길의 무정(無情)이 사무치는 탓이다. 오고 가는 것이 길이로구나, 그게 역사로구나….

박 선달의 오늘 목적지는 황산역 찰방이다. 동래의 휴산역(休山驛), 기찰(譏察), 소산역(蘇山驛), 듣기만 해도 가슴 뛰던 영남대로의 역참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황산역이 없으니 찰방이 있을리 없다. 무심한지고…. 목적지 없는 목적지를 가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리오. 그렇다고 누가 누굴 탓하리오. 길은 원래 무정하고 그 길이가 가히 만리라 했거늘. 걷고 또 걸으면 행신(行神)이 당겨주고 지신(地神)이 밀어주는 것을. 그게 길이거늘.

# 1)『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篇)1 역체(驛遞) 각도속역(各道屬驛)〉 1808년 편찬.    2)『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

※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1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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