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고야 성터 천수각에서 현해탄을 배경으로 선 필자. 임진왜란 출병지에서 현해탄을 바라보곤 상념에 잠긴 듯하다.
“‘여드레 전부터, 나의 반장화는 길의 돌멩이들에 찢겨 있었다’라고 랭보는 적고 있다.”(밀란 쿤데라 『불멸』 중)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Rimbaud, 1854~1891)는 열일곱에 시집을 내고 스무 살에 절필한 뒤 걸어서 세상을 떠돈 방랑자였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랭보를 불러낸 건 ‘걷기’ 때문인 듯하다. 랭보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지독한 걷기 마니아였다.
랭보는 어려서부터 자주 가출해 고향인 샤를르빌에서 파리까지 230km를 걸었고, 이웃 나라를 넘나들며 신들린 듯 길 위의 시를 썼다. 그러다 치명적인 병을 얻어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서른일곱에 생을 마감했다. 말하자면 랭보는 ‘걷기의 순교자’였다.
일본 규슈 사가현의 ‘가라츠 올레’를 걸으며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떠올린 것은, 길에 난 역사의 생채기 때문이었다. 길에 버려진 돌멩이가 나그네의 신발을 찢고 급기야 상처를 입혔다면, 돌멩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그 돌멩이가 현해탄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되었다면 원죄의 기념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은 걸어간 자의 궤적과 열정을 고스란히 기억하지는 않는다. 시간과 바람에 풍화되거나 마멸되어 상처난 곳에 꽃이 피고 꽃의 향기가 상처를 숨긴다. 랭보가 쓴 길 위의 시들은 그의 상처라기보다 명성으로 기억된다. 랭보에게 걷기란 답답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이자 시를 쓰는 과정이었다.
모처럼 해외에 나오니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새롭다. 박 선달은 ‘랭보는 하늘의 언어로 시를 쓴 무당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생전에 천재 시인이란 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임진왜란 출병지
가라츠 올레는 익히 알려진 대로, 한국의 제주 올레팀이 2013년 12월 현지 로열티를 받고 개척한 걷기 탐방로다. 가라츠 코스는 총 길이가 11.2㎞로, 히젠 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 터와 400년의 역사를 품은 옛길을 끼고 있어 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규슈 올레의 길 표식은 제주 올레의 간세와 화살표, 리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묘한 감회를 안겨준다. 한국의 길이 일본에 열렸다고 할까.
나고야 성이 어떤 곳인가? 신무기로 무장한 왜병들의 조총과 날선 함성에 실려 매캐한 화약 냄새가 피어오른다.
1591년 가을,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규슈 가라츠의 가키조에성(担添城)을 개수하여 대대적인 축성에 나선다. 한반도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고,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기요마사는 울산 아래에 서생포 왜성을 쌓았고, 그 경험으로 돌아와서는 구마모토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기요마사를 축성술의 귀재로 치켜세운다.
나고야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도 각 영주들의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영주들의 경쟁 심리를 유발하는 히데요시식 통치술이었다. 해발 89m의 높지 않은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天守閣, 텐슈카쿠)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 올렸다.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나고야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전형적인 왜성의 모습이다. 성은 축성을 시작한지 8개월만인 1592년 음력 3월 완성되었다. 속전속결이었다. 성의 총면적은 약 50만 평으로, 당시 일본 최대인 오사카 성 다음이었다.
히데요시는 1592년 음력 3월 교토를 출발해 나고야 성에 도착했다. 다음달 음력 4월 1일 그는 조선 출병을 명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가 이끄는 제1진이 조선으로 출발했다. 왜병은 전체 9군(軍) 총 15만 8,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명의 원군과 조선 각지의 의병으로 전황은 교착되고, 1593년 음력 4월 강화교섭이 성립된다. 강화 조건에 불복한 히데요시는 1597년 음력 2월 다시 14만의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재침(정유재란) 한다.
나고야 성은 왜군의 출병지이자 보급 거점이었다. 1598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죽자, 전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고 나고야 성의 역할도 이로써 끝난다. 전쟁 중 히데요시가 나고야 성에 머문건 1년 2개월이었으나 파장은 매우 컸다.
전쟁이 끝난 후 가라츠 지역은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다스리게 된다. 히로타카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해체하고 남은 부재로 가라츠 성을 축성한다. 그후 도쿠가와 막부는 침략 전쟁의 상징처럼 여겨진 나고야 성을 파괴해 버린다. 거대한 폐허로 남아 있던 나고야 성은 1926년(다이쇼 15년) 국가 지정 특별사적으로 변모했고, 2006년 일본 100대 명성(名城)에 선정되어 화려하게 부활한다.
#아리송한 겟토의 시비
“포연은 사라지고 포효는 현해탄의 파도가 되었군….” 박 선달은 상념어린 눈빛으로 나고야 성터의 천수각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천수각 자리에서 바라본 현해탄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장엄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임진왜란 출병지였다니! 박 선달의 상념이 어지럽다.
가라츠는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워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다. 가라츠에서 부산까지는 직선 항로상으로 약 200㎞. 눈앞에 가카라시마(加唐島)와 이키노시마(壹岐島), 그리고 멀리 대마도가 가물가물하다. 나고야 성의 천수대 마루에서 보면 가카라시마와 현해탄, 대한해협, 대마도, 부산이 일직선 항로다.
나고야 성 안에 있는 성적비와 겟토시비(오른쪽). 사진=박창희
가카라시마는 백제 무령왕의 탄생지로 소문나 있고, 이키노시마는 규슈와 대마도 사이의 섬으로 고대 유적의 보고다. 모두 한반도와 연관된 역사의 섬들이다. 가라츠 지역에 있는 가가미신사(鏡神社)에는 높이 4m의 대형 고려 불화인 ‘수월관음도’가 있다. 우리의 보물이 영문도 모른 채 일본에 가 있는 사례는 이것말고도 부지기수다.
나고야 성터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넓은 성터 가운데에 세워진 ‘명호옥성지(名護屋城址)’라는 성적(城跡·성터) 비이고, 또 하나는 현해탄을 굽어보는 위치에 세워진 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詩碑)다. ‘명호옥성지’는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라고 한다. 러일 전쟁의 영웅인 도고는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혀 더욱 화제가 된 해군 제독이다. 1930년에 세워진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글자가 주는 당당함과 무게감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대륙 정복을 꿈꾼 히데요시의 야망을 고스란히 담은 모습이랄까.
겟토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는데, 읽을수록 시맛이 저릿하다. 어찌보니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고, 어찌보니 역사적 상념을 추수르며 후일을 도모하는 내용 같다. 시비에는 겟토의 하이쿠 한 구절이 적혀 있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하구나.’
‘다이코(太閤)’는 천왕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에게 양위한 뒤에도 국사를 요리한 위인이다. 겟토의 하이쿠는 안개만 잔뜩 피운 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역사의 진실을 묻는다. 우리는 역사 앞에 숙연해진다. 저 바다 건너 대마도가 어렴풋이 드러나고 부산이 가물가물하다.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1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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