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情萬里- 박창희의 길 이야기 <7>임진왜란과 가라츠 올레길㊦

無情萬里- 박창희의 길 이야기 <7>임진왜란과 가라츠 올레길㊦

박 창희 승인 2018.03.15 00:00 의견 0

일본 가라츠 나고야성터 천수각에서 바라본 현해탄. 사진=박창희

#130개의 번국 진영터

가라츠 올레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거대한 나고야 성터와 왜장으로 조선에 출병한 당시 다이묘들이 머문 진영터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옛길과 성터를 말끔하게 정비해놓은 것으로 봐서 일본은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가보다.

나고야 성터 주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160여 명의 다이묘(大名)들이 각기 쌓은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영터가 산재한다. 천하 통일로 기세가 오른 히데요시는 휘하 다이묘들에게 나고야 성 아래에서 출정 대기토록 했다. 출정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진영터가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정부는 땅을 사들인 뒤 주변을 정비하고 옛길을 복원해 역사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올레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마에다 진영터가 나오고, 후루타, 호리 진영터를 잇따라 만난다. 진영터 숲속 어디선가 조총을 겨눈 왜병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호리 진영터에는 당시에 쓰던 다실과 전통 가면극인 노(能) 무대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일본의 전통문화 자취가 낯설다. 400년이나 됐다는 구시미치(串道) 옛길을 지날 때는 역사적 무게감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찌 보니, 축성에 쓰인 받침돌 하나, 주춧돌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를 옛길로 포장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라츠 옛길의 돌들은 4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임진왜란의 까닭과 명분을 묻는다. 일본은 당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한반도의 처참한 유린이었다. 수천의 도공이 끌려갔고, 수만의 피로인이 눈물을 삼켰다. 씻을 수 없는 상처는 멍든 역사로 기록돼 있다.

일본 규슈 가라츠 올레길의 나고야성 호리 진영터. 사진=박창희

#두 얼굴의 일본

가라츠 올레를 한 바퀴 돌게 되면 나고야 성 박물관으로 발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일본 측에서 ‘한-일 교류사 및 평화박물관’으로 설정하고 홍보하는 곳이다. 박물관 입구에 다가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제주의 돌하르방과 한국의 장승이다. 박물관 안에는 한반도와 일본의 긴 교류사가 정리돼 있고, 신라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고려시대 불화인 수월관음도, 조선의 거북선, 조선통신사의 행로 등이 유물 또는 지도로 전시돼 있다.

‘일본 맞나?’ 박물관을 돌아본 박 선달은 연신 고개를 갸웃 한다. 일본 규슈 외곽의 작은 도시 가라츠에서 교류와 평화를 강조하는 일본과 수도인 도쿄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은 두 얼굴의 나라가 아닌가. 박 선달은 하마터면 ‘이건 위장 평화공세야!’하고 소리칠 뻔 했다. 그러면서도 ‘위장이라도 평화는 소중한 것’이란 생각이 퍼뜩 스쳤다.

착잡하다는 생각도 잠시,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논개 후일담은 듣는 귀를 의심케 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와 그때 죽은 왜장의 영혼결혼식 이야기였다. 요지는 이랬다.

한 별난 일본인이 1976년 후쿠오카 근처의 히코산에서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라는 장수의 묘비를 발견한다. 그가 바로 논개에게 껴안긴 채 죽은 사람이다. 게야무라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으로, 당시 20대 후반이었으며 힘이 장사였고 마을에서 효자로 통했다고 한다. 그를 챙겨온 일본인은 진혼제를 지내고 수차례 진주시를 방문해 영혼결혼식을 추진했다 한다.

한국에선 ‘웃기는 일’로 치부했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 별난 일본인은 1990년대 중반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 영정이 친일 논란에 휩싸이자, 문제의 영정을 구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게야무라는 현재 규슈 나고야성의 기다진자(貴田神社)에 ‘모셔져’ 있다.

‘알다가도 모를 일본’이라고 말하는 건 순진한 상황 판단이다. 논개 영혼결혼식을 민간 차원의 역사 화해 시도라고 하더라도, 그건 한국 정서와 동떨어진다. 역사를 그렇게 끌고 가서도 안 된다.

#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

임진왜란 출병지인 가라츠에는 ‘공교롭게도’ 목하 한일 해저터널 시굴갱이 뚫리고 있다. 해저터널 시굴갱은 1980년 초부터 일한해저터널연구회가 연구 조사해온 민간 프로젝트다. 민간단체의 순수한 시도라고 하기엔 그들의 연구 조사가 너무나 장기적이고 치밀하다. 일한해저터널연구회는 최근 조직을 전국 규모로 확대했다고 한다.

일본 규슈 가라츠 올레길. 사진=박창희

박 선달은 겁이 덜컥 났다. “이게 일본의 민낯이구나! 이게 일본의 책략이자 본심은 아닐까.” 박 선달의 뇌리 속에 일제가 주장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조선 강토를 유린한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의 잔혹한 흑역사가 명멸했다.

시굴갱이 들어선 곳은 임진왜란 출병지 바로 그 자리다. 해저터널 논의가 필요하다손 치더라도, 하필 왜 그 자리인가? 한국과 가장 가까운 위치를 택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로선 임진왜란의 악몽이 상기되는 민간한 지점이다. 한국 쪽의 여론이 조성되면 즉각 해저터널을 뚫을 수 있다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일본의 ‘본심’을 꿰뚫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왜적들은 함선에 검은 휘장을 치고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글이 적힌 깃발을 앞세워 이리떼처럼 영도 앞 바다에 물밀듯 몰려들었다….‘(김훈 『칼의 노래』 중)

부처님의 말씀조차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던 일본. 침략을 교류로 분칠하고, 논개의 영혼을 불러내 화해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자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본은 거기 있는데, 우리만 벗어나려 하는 건 아닌가.

박 선달은 한동안 찜찜하고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즐겁게 가라츠 올레를 걸으러 갔다가 놀란 가슴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가라츠 올레는 두 겹, 세 겹의 역사적 상념과 의도를 뚫고 봐야 정확한 루트가 보일 것 같았다.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3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