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생명공동체, 현장귀농학교 등 제도권 밖의 생명교육에도 관심
임재택 교수는 부산대 유아교육과 교수로 있으면서 당시 교수로는 드물게 빈민탁아와 보육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시빈민지역 탁아문제 해소를 위한 제도개혁 운동에 나섰고, 1991년 1월 시행된 ‘영유아보육법’ 제정 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보육사업의 개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임 교수는 부산대 보육종합센터 설립을 주도해 한국 최초의 대학부설 어린이집 원장을 역임하게 된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한 6개월 과정이던 보육시설종사자교육훈련원을 1년 과정의 보육교사교육원으로 바꿀 것을 촉구하고, 보육교사교육원대학협의회 제2·3대 회장을 맡아 38권의 표준교재를 개발·보급하는 등 양질의 보육교사 양성 기반 마련에 앞장서왔다.
김영삼 정부가 1995년 5.31교육개혁의 핵심으로 1948년 제정된 우리나라 ‘교육법’을 '교육기본법 · 초중등교육법 · 고등교육법 · 평생교육법’의 4법 체제로 개편한다고 할 때였다. 이 때 임 교수는 초등학교 취학 전 1년의 ‘만5세 무상교육’ 도입을 주창하면서 1996년부터 ‘초등학교 취학전 1년 만5세 유치원 무상교육 실현을 위한 범국민연대모임'과 '유아교육 공교육체제 실현을 위한 범국민연대모임’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만5세아 무상교육과 유아교육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지금도 ‘유아교육·보육혁신연대(53개 단체)’의 유보통합 일원화 등 제도개혁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임 교수는 제도개혁을 넘어 제도권 밖의 생명교육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와 ‘현장귀농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아이들 건강을 위한 국민연대’를 창립해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하였다. 임 교수가 2002년에 창립한 농림부 소속 사단법인 생태유아공동체는 우리나라 친환경급식 운동의 초석을 다지는 생태적 식생활교육 국민운동으로 확산됐다. 2010년도 창립한 사단법인 한국숲유치원협회(초대·2대 회장)는 한국형 숲유치원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부인 김옥자 여사와는 ‘불간섭주의’, 각자 사회운동에 열심
이렇게 교수 임재택은 우리나라의 유아교육을 바꿔 생태유아교육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러면 그의 가정교육은 어땠을까? 임 교수는 “교육학, 유아교육을 전공한다면서도 정작 내 자식 키우는 문제는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기존의 시골생활에서 해오던 전통적인 육아 개념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아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임 교수는 1976년 중학교 교사시절 같은 학교 동료 교사이던 부인 김옥자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김 여사는 약 40년간 중·고등학교 과학 교사로 근무하다 임 교수가 정년퇴임한 다음해인 지난 2015년 2월 정년퇴임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산과학교사모임, 환경을 생각하는 부산교사모임, 어메니티과학교육연구회 등을 만들어 회장을 역임했고 도쿄청소년과학제전이나 APEC청소년과학제전 등 해외 과학축전에 과학동아리를 많이 참가시켰다. 2012년에는 대구대 대학원에서 과학교육으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퇴직 후에도 김 여사는 어메니티과학교육센터를 만들어 생태과학실험 개발 보급에 힘써왔으며, 10여전부터 해오던 동티모르 교육봉사 활동도 2017년부터는 연구회 자체 경비와 제자들의 후원만으로 동티모르 해라초등학교에서 매년 ‘어메니티 어린이과학캠프(Ko-TiAC)’를 열고 있다. 2017년부터는 지역 환경단체인 ‘습지와 새들의 친구’ 이사장을 맡는 등 대외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러면 결혼 당시 김 여사 눈에 비친 임 교수의 모습은 어땠을까? 김 여사는 말한다. “결혼 전 같은 중학교에 있을 때 임 선생은 사람은 호리호리해도 당시 교장의 부당한 행정에 교사들이 목소리 내기 어려운 자리에서도 일어나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매력으로 와 닿았는데 그 뒤에 살아오면서 보니까 고집 하나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어요. 그게 힘들기도 했죠. 근데 나이가 들면서 그래도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해요.”
김 여사는 자녀교육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래 전에 임 교수가 술이 한잔 돼 들어와서는 아이들을 불러모아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가족을 위해 살고,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위해 살고, 너희들은 인류와 세계를 위해 살아가는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정작 본인 자녀교육에는 무관심, “지금도 미안한 마음”
그러나 임 교수는 지금까지도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한단다. “그나마 아내가 아들, 딸의 초등학교 공부는 철저하고 흥미진진하게 안내해 아이들도 자부심은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생태교육 운동한다고 하면서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우리 아이에게 형편없는 부모였었죠. 그게 부부싸움의 요인도 됐구요. 저는 말 그대로 ‘바깥양반’이었죠. 아내는 전교조 활동도 하고, 학생들의 교외활동 지도, 틈나면 꽃꽂이, 다도 등 취미활동으로 젊었을 때는 저보다 더 바빠 서로 많이 부딪혔어요. 서로 다 강했기 때문이죠. 그래도 이나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 일에 관여 안하는 걸 인정했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물론 외할머니나 친할머니가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신 힘도 크구요.”
임 교수댁에서 재미있는 점은 자제들의 대학 전공이 부모의 것을 교차로 물려받은 것이다. 아들은 엄마 전공인 화학을, 딸은 아빠 전공을 따라 유아교육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집은 며느리도 화학 전공으로 고부간의 ‘케미’가 정말 좋단다. 딸은 부산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뒤 일본 오차노미즈대학에서 유아교육으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2018년부터 (사)한국생태유아교육연구소에서 연구팀장을 맡고 있다. 임 박사는 아이살림·생명살림의 생태유아교육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며, 한편 아버지의 그늘에서 독립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귀띔한다.
#“생태학회 회장이 노상 담배?” 뜨끔, 바로 금연 실행
임 교수는 한때 골초였다가 생태유아교육을 하면서 담배를 끊게 됐다고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재수하면서 배운 담배가 골초 수준에 이르러 하루 2-3갑을 피울 정도였는데 여성들을 자주 만나는 여건에서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가족에게 피해를 주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금연의 결정적 계기는 20여 년 전인 2002년 6월 생태유아교육학회 창립총회에서였어요. 휴게시간에 참가자 500여명이 부산대 본관 3층에서 유기농과일을 비롯한 간식을 먹고 있는데, 행사에 긴장한 나는 연속 담배를 피우고 다닌 거죠. 내가 지나가는데 뒤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에이씨! 생태학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노상 담배를 물고 다닌다!’ 하는 뒷말을 듣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후 한 달 만에 담배를 완전히 끊어버렸지요.”
그는 생태유아교육학회를 하면서 사람들의 비판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것이 나를 살리는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님이 저가 담배를 끊는다니까 ‘니가 담배를 끊어? 아나 콩콩, 니가 담배 끊으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켜서 하늘로 올라가지!’ 하시더라고요. 얼마 후 진짜로 담배를 끊고 나니 ‘우리 아들 대단하네! 아이구 잘 했네!’ 하면서 엄청 좋아하셨어요. 아내와 두 아이도 아버지의 금연 결단은 인정해줬어요. 술은 아직 끊지 못했지만 잘 조절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해관 장두석 선생으로부터 ‘생태적 삶과 육아지혜’ 가르침 받아-함께 방북도
임 교수의 생태유아교육의 깊이는 민족생활의학자인 해관 장두석(1938-2015) 선생과의 교류와도 관계가 있다. 임 교수는 2005년 즈음에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이던 장두석 선생을 만나 민족생활의학을 통한 생태적 삶과 조상의 육아지혜에 대해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장두석 선생은 당시 교수를 ‘생명 죽임의 미제(美製) 학문을 하는 괴수’라고 할 정도 교수사회를 질타한 분이라고 한다. 장 선생은 임 교수에게도 “생태유아교육을 하는 교수라는 사람이 단식을 비롯한 민족생활의학의 체험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하도 비판을 하기에 10박11일 몸마음수련 단식을 실천한 것이 교류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2008년 9월에는 해관 선생께서 우리 집을 방문해 저희 어머님께 큰 절을 하시고 식물원이 내려다보이는 빌라 1층 집 앞 아름드리 소나무를 둘러보고 김치에 막걸리 한잔을 하시면서 비로소 저를 교수로 인정해주셨어요. 그리고 학산(鶴山)이라는 호를 지어주시고 얼마 후 ‘학산송헌(鶴山松軒)’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쓴 큰 액자 2점을 보내주셔서 지금도 마루 양쪽 벽면 상단에 걸어놓고 있어요.”
2014년 10월 2일부터 6일까지 단군릉 개건 20돌 기념 ‘단기 4347년(2014) 평양 단군릉 개천절 민족공동행사’가 있었는데 임 교수는 한국생태유아교육학회 회장으로 남측대표단(46명) 일원으로 참가했다. 임 교수는 방북기간 중 특히 북한의 유아교육에 관심을 갖고 유심히 살펴보았다고 한다.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개천절민족(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가 펴낸 「개천절민족(남측대표단 평양방문기-개천절, 남북이 하나 되다」라는 보고서에 임 교수는 ‘통일의 씨앗을 보다’라는 제목의 소감문을 올렸다. 임 교수가 북한의 유치원을 참관하고 느낀 점은 이러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북의 유치원을 보여줄 때는 아주 심하게 경직된 교육을 시키는 것 같아 많이 걱정스러웠는데, 직접 대면해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유치원 아이들 자는 시간이라며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일정을 바꾸는 것이라든가, 경직된 얼굴이라기보다 천진하고 호기심에 찬 아이들의 얼굴에서, 평소에 가졌던 우려와 걱정이 많이 줄어들었다. 자유분방함 이런 것은 덜 했지만, 아이들을 귀하게 생각해서 잘 교육하려고 노력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진지함을 느낄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임 교수는 “방북하고 나서 저는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이 현실에 대해 후손들, 선조들 앞에 정말 창피한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이유를 불문하고 남북이 자주 만나야 해요. 그리하여 남북의 유치원 아이들도 함께 손잡고 뛰노는 아이행복세상 꿈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이런 꿈들이 짓눌리는 현실이 참 안타깝고 답답해요.”라고 말한다. 임 교수는 당시 방북 때 4박5일 동안 장두석 선생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임 교수는 그 뒤 장두석 선생의 민족생활의학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을 생태유아교육의 주요 사상과 생활건강법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2006년 5월 한국생태유아교육학회 춘계학술대회 주제로 ‘자연의 순리·조상의 지혜로 아이 키우기’를 채택하여 초등학교 2년 중퇴의 무학에 가까운 민족생활의학자 장두석 선생을 초청해 학회 회원들 앞에서 발표자리를 마련했다. 2002년 생태유아교육학회 창립 이래 20여년의 춘계·추계 학술대회 주제와 발제자의 면면을 보면 생태유아교육의 이론과 실제의 진화 과정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기조발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생명문화운동에서 본 아이살림·생명살림의 유아교육(김지하 시인) △유아교육과 한국의 미래(도올 김용옥 선생) △혼돈의 육아현실, 유아교육의 정도를 찾아(법륜 스님) △풀꽃 같은 아이들, 푸르게 자라게 하라(조정래 소설가)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아이들을 정성으로 모시지 않는 세상은 희망이 없다(도법 스님)
임 교수는 1998년부터 해오던 생태강좌 ‘생태적 각성-생명살림의 길을 찾아서’도 2009년부터는 월례강좌 형식으로 바꿔 진행해왔다. 또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수도권공동체에서도 월례강좌를 진행하도록 했다. 이때 월례강좌에서 발제를 해준 사람들이 김지하 시인, 변산공동체 윤구병 선생, 실상사 도법스님, 정토회 법륜스님,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 흙집학교 ‘흙처럼 아쉬람’ 원장 고제순 선생, 자연치유의학자 전홍준 의학박사, 죽변교회 이현주 목사, 도올 김용옥 선생, 대구가톨릭대 정홍규 신부, 동일한의원 박석준 한의사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생태적 지성들이다.
임 교수는 특히 생태유아공동체와 생태유아교육학회를 만들 때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과 단군·동학사상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사상적 접근을 한다는 점과 동학이나 고대사상을 재해석하여 한국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김지하의 생명사상을 ‘생명살림’이라는 공통된 화두로 유아교육을 풀어 생태유아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연구한 것이 박영신·김은주의 ‘김지하 생명사상의 생태유아교육적 함의’(생태유아교육연구 제3권 1호, 2004)라는 논문이다. 이들은 논문에서 ‘아이는 한울님이자 천지부모요, 홍익인간이고 이화세계를 이끌어갈 존재요, 신령과 생명을 제 안팎에 모신 영성-생명적 존재이므로 모시고 살려야 하며, 모시고 살리되 틈을 가지고 조심하는 교육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1947-2020) 선생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김종철 선생은 생태유아공동체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셨고, 특히 생태유아교육의 이론적 뒷받침을 많이 주셨죠. 김 선생님한테 영향을 받은 것 중 하나가 그 분이 견지한 심층생태학이에요. 저는 심층생태학 그런 거 잘 몰랐지만 자연의 순리대로 하면 옛날 우리 시골에서 하던 대로 그대로 가야 하니까 그 사상이 유아교육뿐만 아니라 한살림의 이론적 바탕도 됐단 말이죠. 특히 김 선생님은 유아생태공동체를 협동조합 방식으로 만들라고 저한테 조언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보니까 유치원 어린이집 300곳을 대상으로 모집하려고 하니까 모집 자체가 불가능한 거야. 그래서 사단법인으로 바꿨어요. 근데 김 선생님이 처음엔 좀 화도 내고 하셨는데 나중에는 다 이해를 하셨어요.”
임 교수는 도법 스님이 만든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 운영위원으로 십여년 함께 했다. “저가 생태교육 프로그램으로 친환경 먹거리, 텃밭 가꾸기, 도농교류 같은 이런저런 걸 막 하니까 현장귀농학교 교장도 좀 했으면 좋겠다 해서 그렇게 했죠. 나중에는 대안학교 운동, 먹거리운동도 함께 했어요. 그 뒤 스님께서 불교생협 만드는 데도 사실 저가 기여를 좀 했지요. 저가 한번은 도법 스님께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 무슨 불교가 생명을 위하고 살생하지 말라카면서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리는 데 그렇게 농약 비료 제초제 친 그런 과일하고 쌀하고를 올리는 게 말이 되냐고 공개적으로 말씀을 드렸죠. 도법 스님께서 약간 멈칫하는 걸 느꼈어요. 그 뒤 친환경 불교생협이 만들어졌어요.”
#부산대 어린이집 적극 지원해준 당시 부산대 장혁표 총장께 늘 감사한 마음
임 교수는 그 동안 유아교육 운동을 하면서 열일을 해왔는데 그 가운데 모함도 적잖았다고 한다. 한 때 부산을 비롯한 전국 새마을유아원이 어린이집 활성화에 힘을 쏟는 임 교수에 반감을 갖고 “타도 임재택!”을 외치기도 해 한동안 일이 손에 안 잡힐 때도 있었단다. 그 비난의 속내는 교육부 소속인 부산대 교수가 복지부와 부산시 예산 지원을 받아 부산대 보육종합센터와 어린이집을 설립 운영하면서 교육부의 교육법을 고쳐 만5세 유치원 무상교육을 주창하는 배신자라는 것이었단다.
“저로서는 교육법을 고쳐 유치원 5세 무상교육이 실현되면 곧바로 영유아보육법도 고쳐 어린이집 5세 무상보육도 하게 될 건데 그새를 못 참는 현실이 참 안타까울 뿐이었어요. 게다가 만5세 무상교육 찬반 논쟁 당시 장혁표 부산대 총장님께 투서가 수십 통이 들어갔다고 해요.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느니 돈을 떼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었다네요. 당시 26억 원이라는 거금을 외부에서 끌어와 부산대 보육종합센터 건립 공사의 총괄책임자가 교무처장이고 저가 실무간사 역할을 했을 때죠. 그런데 당시 장 총장님께서 이래저래 알아보시고 저 입장을 이해해주셨지요. 장 총장님은 그 뒤 어디 가시더라도 어린이집 설립한 것이 너무 잘 한 일이라고 말씀을 많이 하신다고 해요. 사실 부산대가 유보통합의 상징이면서 전국대학 직장어린이집 1호를 설립한 거지요. 당시 서상목 보건복지부장관이 보육종합센터 개관식에 참석해 ‘한국보육의 요람’이라 치하를 하기도 했죠. 어쨌든 지나고 보니 그런 와중에서도 말썽 없이 대과 없이 살아온 게 참 감사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모친이 늘 저에게 해주신 ‘욕먹고 다니지 말라’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기에 가능했는지도 몰라요.”
#박원순 서울시정에 참여 '생태친화보육사업'과 유아숲교육 적극 보급
임 교수는 박원순(1955-2020) 전 서울특별시장과의 특별한 인연 또한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1997년 참여연대 시절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 유아교육 이야기를 했고 그 이후로 참여연대의 김기식 사무처장이 몇 년간 유아교육 제도개혁에 함께 해줬다고 한다. 과거에 임 교수는 유보통합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강한 몇몇 여성 정치인과 의견이 많이 부딪히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이 유보통합을 제대로 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잘 됐으면 실제 대선에서 민주당이 학부모 마음을 더 많이 얻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서울시가 생태친화보육사업을 공약으로 채택해 1년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교육과정이 아직도 예전 그대로인 현실을 박 시장님이 적극 공감하고 많이 안타까워했어요. 박 시장 때 처음엔 서울시 공무원들이 생태친화보육과 유아숲교육을 강조한 저의 제안을 간섭으로 생각하고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박 시장님의 판단으로 유아숲교육 담당부서를 공원조성과에서 자연생태과로 옮기기도 했어요. 서울시의 생태친화보육 사업 추진도 초기 담당 부서 안팎의 부정적 비협조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집 현장 교사와 학부모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1년 만에 언론의 호평 기사가 수십 건 나오면서 순조롭게 안착되어갔지요. 당시 박 시장님은 생태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아시고 공무원에 휘둘리지 않고 일을 잘 처리하시는 분으로 기억합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저로서는 박 시장님이 살아계셨으면 참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 참 아쉽고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계속)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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