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우리 아이 잘 자라고 있나요?
2. 7세까지 아이의 뇌는 어떻게 배우고 자라는가?
3. 아이들은 논다 : 뇌가 좋아하는 놀이
4. 아이들은 표현한다 : 만들고 그리고 이야기하며 발달하는 뇌
5. 아이들은 일상을 반복하다 : 뇌 발달을 보장하는 하루 일과
6. 아이들은 공간과 호흡한다 : 뇌발달을 지원하는 환경
7. 대한민국에서 지혜로운 부모 되기
#3-17. 원체험(原体験), 생명이 자연에 뿌리내리는 과정
영상과 인공물로 세상을 알아가는 요즘 아이들
흙이나 모래를 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이가 흙모래를 만져본 날이 며칠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이전 세대보다 자연 체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요즘 아이들, 살아있는 자연 보다 플라스틱과 같은 인공물과 액정 화면 속 영상을 통해 세계를 알아가는 요즘 아이들, 정말 괜찮을까?
영유아기 원체험(proto-experience)으로서 자연
원체험(原体験, proto experience)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연물을 대상으로 오감을 사용해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직접 체험을 말한다. 일본 식물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야마다 타쿠조우(山田卓三, 前효고 교육대학교 교수)는 교육학 용어인 원체험(original experience) 대신 ‘proto(원시의, 원형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어린 시절 자연 체험을 ‘원시적 체험(proto experience)’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10만 년 전 원시인이 경험했던 것과 현대 아이들이 경험하는 자연 체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 것이다. 「원체험 교육연구회」는 원체험을 다음의 8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의 특별한 배움을 강조하였다.
체험 : 불을 붙이고 끄는 경험, 연기가 눈에 들어가는 경험, 불의 따뜻한 느낌 등을 통해 불의 고마움과 위험, 인류만이 불을 사용한다는 것 등을 배운다.
체험 : 흙과 모래를 만지고 움켜쥐는 경험, 진흙을 반죽하는 경험 등을 통해 흙이 피부에 닿는 느낌과 흙냄새, 흙에 곤충이 살고 있다는 것 등을 배운다.
체험 : 돌을 보고 만지고 던지고 쌓는 경험 등을 통해 돌의 형태와 무게, 색과 모양의 차이 등을 배운다.
체험 : 물을 만지고 헤엄치고 물에 첨벙 뛰어드는 경험 등을 통해 물온도나 물보라의 움직임, 몸이 떠서 발이 닿지 않을 때의 두려움 등을 배운다.
체험 : 나무에 오르거나 냄새 맡고, 잎과 줄기를 관찰하는 경험 등을 통해 자연의 생명력과 신록·단풍의 아름다움, 열매와 나뭇결, 나이테와 세월의 의미 등을 배운다.
체험 : 냄새를 맡고, 풀피리를 만드는 경험 등을 통해 풀의 촉감, 다양한 형태와 모양의 차이, 옷에 얼룩이나 피부에 상처가 나기도 한다는 것, 자연의 생명력, 등을 배운다.
체험 : 크고 작은 동물을 만지거나, 잡기, 울음소리를 듣거나 냄새 맡기, 사육하기, 등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 생명력, 애정, 배려, 죽음의 슬픔을 극복하는 것 등을 배운다.
체험 : 비바람이나 자연, 어둠이 주는 무서움, 배고픔,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경험 등을 통해 자연의 위협과 고마움, 과학기술의 고마움, 아름다움, 외로움, 무서움, 배고픔, 갈증, 더위와 추위 등의 감각을 배운다.
원체험은 자연 속 실물을 통한 직접 체험
8가지 원체험들은 분명 요즘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단순하고 너무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생태교육과 비교하면 세련되지도 전문적이지도 못한 것 같다.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깔끔한 교실 테이블에서 원석 키트에 라벨이라도 붙여야 제대로 된 생태교육인 것 같다. 생태교육은 많지만 원체험은 부족해 보인다. 야마다는 강조한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깊이 남아있는 원체험은 책이나 영상, 키트를 통한 간접 경험이 아닌 자연 속에서 실물을 보고 만지고 느끼는 체험이라고.
원체험이 필요한 이유, 하나, 원체험이 온전한 신경(뇌) 발달을 견인한다
아이들은 오감에 와 닿는 자연의 감각에 본능적으로 끌리기 마련이다. 신체적, 인지적, 사회·정서적 성장 중인 영유아는 온전한 발달을 위해 적절한 감각 자극이 있어야 하는데, 자연 체험은 이에 필요한 양질의 감각 정보를 제공한다. 흙냄새, 바람 소리, 거친 나뭇잎의 촉감, 온도 변화 등 다양하고 풍부하며 통합적인 감각을 제공하는 자연환경은 뇌의 감각 피질을 활성화시키 의사결정에 영향을 준다. 자연환경은 인공적 환경보다 주의력 요구도가 낮아 심리적 안정, 스트레스 감소, 불안 완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연구자들은 자연환경이 아닌 인공적인 수단을 통한 지각 발달은 인지 향상에 실패할 수 있고, 오히려 타고난 인간 지각과 기존의 논리적 추론을 방해하고 교란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즉, 대뇌피질에 탁월한 영향을 주는 것은 자연 감각이며 인공물에 의한 감각이 아니라고 말한다.
둘, 원체험은 찐한 감동, 마음을 움직이는 경험이다
생태학자 레이첼 카슨은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연 속에서 함께 감동하고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자연 체험은 그 어떤 경험보다 아이의 감정과 정서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풀숲에서 꼬물거리는 살아있는 방아깨비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 내가 심은 작은 씨앗이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을 때 느끼는 놀라움 등, 아이들은 자연에서 대단하다, 신비롭다, 재미있다, 무섭다 등의 정서를 온몸으로 느낀다.
현대 뇌과학에서는 전전두엽의 중요한 인지 능력 중 실행 기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의욕과 동기와 같은 감정임을 강조한다. 원체험은 특히 호기심이나 탐구 의욕을 기르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필자는 장래 자기 주도 학습이 가능한 아이로 키우려면 자연 체험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1998년 일본 문부성에서 국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인터뷰 조사에서 다수의 응답자가 어린 시절 자연과의 접촉 경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셋, 원체험은 자신감을 키워주는 경험이다
아이들이 자연을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연이 아이에게 자유와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나 열매를 보며, 물과 모래를 보며 ‘이걸로 뭘 하지?’, ‘어떻게 하지?’ 생각하고,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놀지도 스스로 결정한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생각한다. 실패할까, 평가에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자연히 도전도 쉬워진다. 내가 선택하고 행동하고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시도해 보는 과정, 바로 아이가 건전한 자신감을 얻어가는 과정이 자연 놀이에서 이루어진다.
넷, 원체험은 아이, 생명이 자연에 뿌리내리는 과정이다.
자연의 다른 이름은 생명이다. 아이는 끊임없이 변하는 대기 속에서 숨쉬며 곤충이나 동물의 삶과 죽음을 만나고, 계절마다 나무가 색을 바꾸고 열매 맺는 것을 본다. 인간의 세계관은 결국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법이다. 이렇게 생명과 친밀한 경험을 쌓는 아이는 자연이 자신과 분리되거나 박제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인다. 말로 정확히 표현은 못 해도 자신이 다른 생명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바로 생태적인 감수성이 자란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인 이상 원체험이 영유아기에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은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 가득하구나’, ‘나는 대자연과 이어져 있구나’라는 실재에 기반한 감각이 있어야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근원적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원체험은 아이가 생명으로서 자연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다.
도심 속에서도 가능한 원체험, 하늘을 이고 놀아보자
요즘만큼 교육 현장에서 자연 체험이나 생태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원체험이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자연에서 오감을 충분히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여유와 자유를 아이에게 주고 있을까? 원체험은 그래서 천연색 가득한 숲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이의 정수리가 하늘과 맞닿아 있다면 아이의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온 지구를 여행하는 대기와 맞닿아 있다면 그곳에서도 원체험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늘은 얼른 저녁을 먹고 아이 손잡고 집주변을 산책해 보자.
◇ 임지연 박사
▷(사)한국생태유아교육연구소(https://www.ecoikium.org/) 소장
▷서울시 생태친화보육사업 컨설턴트
▷대구교육대학교 생태유아교육 강사
▷호치민시 한국학교 유치원 교사
▷부산대 유아교육학과 학사/석사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