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왕 · 양반의 공간, 독립운동 · 친일인사와 관련된 공간, 건축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빌딩들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책을 쓰는 동안, 대(大)서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나머지 공간은 거의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재개발 · 재건축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서울의 진정한 모습은 주변부에 몰려 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유목민의 삶을 살던 인류는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발명하면서 자연을 지배하게 되고, 정착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구성했다. 나아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규범과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편의를 제공하는 장치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는 ‘도시화’라 정의한다.
도시를 사람의 몸과 비교하면 도로는 혈관, 상·하수도는 소화기관이다. 도시화의 과정은 도시를 개발하는 것이다. 과거의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가는 도시 개발과 토목 사업은 오랫동안 인류에게 풍요와 번영을 보장할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급속한 도시화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만든다. 무분별한 도시의 개발과 확장은 도시의 기록과 흔적을 지워 버린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은 전후 복구와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성장 중심, 개발독재의 길을 걸어왔다. 보존과 개발, 공공성과 사익이라는 선택의 순간에서 항상 개발과 사익을 우선순위로 선택했고 이러한 결과는 인구 천만의 국제도시라는 위상만큼이나 큰 도시의 그늘을 만들었다. 도시를 둘러 싼 갈등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문헌학자이며 답사가인 김시덕의 저서 「갈등 도시」는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잊혀져 가는 서울의 흔적과 기억을 도시답사의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저자는 21세기에 새롭게 창조된 조선시대 풍 현대건축이나 도시공간보다는, 19세기 말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물과 도시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개량과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낡고, 때로는 지저분한 흔적들을 지우기에 급급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도시의 나이테를 알려주는 작은 표식을 찾아 해석하고 기록한다. 그 표식 속에는 건축물과 기념비, 작은 도로 뿐만 아니라 건물의 머릿돌과 골목 어귀의 비석, 낡은 간판과 벽보, 점집의 깃발까지 어우러져 있으며 무심히 버려진 표식 속에서 시대의 소리와 의미를 끄집어낸다.” (10쪽)
「갈등 도시」는 크게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다. 제1장 ‘대서울이란 무엇인가?’ 편에서는 먼저 서울을 중심으로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권역을 ‘대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이 책의 전편인 「서울선언」을 통해 ‘대서울’의 영역을 기존의 경성과 함께 일제 강점기 편입된 용산과 영등포부터 인천을 아우르는 〈경인〉의 영역에, 강남 3구와 1, 2기 신도시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정의한 바 있다. “‘대서울’은 경제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광역교통망에 따라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을 의미하는 수도권, 부동산의 개념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주택구매를 고려하는 바깥 한계인 서울 세력권과 구분된다.” (21쪽) ‘대서울’은 도로와 도시계획에 따라 인위적으로 연결된 서울의 위성도시와 구분하여 서울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공간적 범위이며, 하나의 문화권으로 해석된다.
제2장 ‘도시 문헌학과 도시화석’ 편은 문헌학자이기도 한 저자가 도시를 보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도시 곳곳의 오래된 간판과 재개발 현장을 둘러싼 대자보, 건물의 머릿돌과 마을 초입의 비석, 기념비를 통해 그 시대를 읽어나가며, 이러한 흔적들을 도시화석이라 칭한다. 도시화석을 통한 서울 들여다보기는 역사유물과 대형건축물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거대담론의 도시 답사와 크게 구별된다.
제3장 ‘갈등도시, 대서울을 걷다’ 편은 일제 강점기 이후 수도 경성에 포함된 영등포 지역과 서울과 인천이 맞닿은 경기 서북부를 시작으로, 대서울의 중심인 종로와 을지로, 그리고 수도권 동남부를 직접 답사하고 곳곳에 숨어 있는 도시 화석을 통해 도시의 궤적을 설명한다. 근대화 슈퍼가 새마을 슈퍼를 거쳐 마트로 변하는 과정을, 당산동에 영동빌딩이, 신대방동에 강남아파트가 있는 이유를, 기자촌과 교수촌, 문화촌의 뒷이야기, 수도권 위성도시의 태동과 변화의 역사를 직접 찍은 사진과 친밀한 언어로 풀어나간다.
「갈등 도시」는 기록되지 않는 서울의 성장기와 서울을 읽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알려지지 않는 서울의 뒷골목, ‘여기도 서울인가?’ 싶은 장소를 걸으면서 도시가 미쳐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읽어내고 익힌 바를 함께 나누고 있다.
광활한 초원이나 평야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알기 위해 도시 곳곳에 이정표를 세웠다. 이러한 이정표는 현대도시에서 랜드마크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부질없이 높고 크고 괴기스러운 모습이다. 역사성과 지역성이 배제된 도시의 거대한 건축물을 보면서 진정한 의미의 랜드마크는 도시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지역의 숨은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의 기록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시 개발의 페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부수고 다시 짓는 도시에서 기억하고 재생하는 도시를 만들려는 노력이 분주하다. 우리 모두가 내가 사는 도시의 뿌리를 궁금해 하고, 뒷골목의 변화를 지켜보며, 어느 순간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도시의 기록들을 한 번 더 눈여겨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 # 이 서평은 국회도서관의 승인을 받아 '휴먼전문가 서평'을 전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http://hn.nanet.go.kr 02-788-4053 국회휴먼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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