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마을에 있는 제산 김성탁 종택. 사진=조해훈
스승 이현일의 신원 호소하다 유배 가 사망한 제산 김성탁 내겐 여든의 늙은 어머니가 我有老母年八耋 기력이 쇠해 병석에 계신다오 氣息奄奄在牀褥 생각건대 지난 날 급히 옥에 갇히던 날 憶昨蒼黃就獄日 아이 등에 업혀 문에서 작별하실 때 侍兒背負出門訣 못난 아들의 죄가 무거운 것도 모르시고 不知愚兒罪犯重 우시며 어서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하셨네 涕泣謂我歸來速 (… …)
위 시는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마을(내앞마을) 출신의 의성 김씨인 제산 김성탁(1684~1747)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제산집』 권1에 나오는 <아유가>(我有歌) 7수 중 첫 수다. 제산이 54세 되던 해인 1737년에 제주도 유배시절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읊은 시이다.
제산의 어머니는 아들이 잡혀가던 날, 손자의 등에 업혀 자식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신 채 어서 갔다가 돌아오라고 당부하셨다. 제산은 내내 그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이처럼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제산의 <아유가>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스승 이현일에 대한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려는 의식이 담겨 있다. 그는 256수의 시를 남겼다.
이처럼 효심과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도리를 지키려고 했던 제산은 무슨 죄로 제주도까지 유배를 갔을까.
그는 52세인 17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2년 뒤인 1737년 스승인 갈암 이현일을 신원(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 해달라는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제산이 살아간 전후 100년간은 당쟁의 시대였다. 경신환국(1680)과 기사환국(1689), 갑술정변(1694), 정미환국(1727) 등의 정변이 이어졌다.
이런 시기에 태어난 제산은 가학을 계승하고 퇴계학을 정통으로 계승했다. 그의 학문 연원은 이황-김성일-장흥효-이현일로 이어지는데, 제산은 이현일의 아들 이재와 함께 갈암 학통의 한 학파를 형성하여, 그 학문을 자신의 아들인 김낙행에게 전했다.
그는 17세에 이현일의 문하에 나아갔다. 이때 갈암은 광양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돌아와 안동의 금수(현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후 제산은 갈암을 통해 많은 학문을 익혔으며, 그의 나이 21세 때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
제산은 54세 때인 1737년 5월에 옥당인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교리가 되었다. 이처럼 제산이 덕행과 문장으로 출세를 거듭하자 당론이 치열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에 이해로와 신헌 등이 상소를 올려 제산을 무함하고 그의 스승인 갈암까지 모독하였던 것이다. 즉 갈암이 정경세의 묘비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인현왕후를 자손록(子孫錄)에서 삭제했다는 것이다.
이에 제산은 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영조는 갈암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갈암은 1693년(숙종 19)에 새로 태어난 왕자와 관련하여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했다. 그 왕자가 바로 영조였던 것이다. 갈암을 신원해달라는 상소문은 결국 노론의 반발심만 자극한 꼴이 돼 버린 셈이었다.
그러면 스승인 갈암은 어떤 억울함을 당했길래 제자인 제산이 신원을 해달라고 소를 냈던 것일까.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황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으로 꼽힌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 확대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문신이다. 갈암은 1692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병조참판·자헌대부·우참찬·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하지만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을 잃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다. 갈암은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문신인 조사기(1617∼1694)가 죄가 없다고 하였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권력이 바뀐 것이다.
갈암은 함경도 홍원에서 종성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97년에는 전라도 광양현으로, 72세 때인 1698년에 섬진강가인 갈은리로 유배지가 바뀌었다가 1699년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후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의 북쪽인 금양에 기거를 하며 후학들에게 강학하다 1704년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다.
제산 김성탁의 문집인 『제산집』. 출처=한국국학진흥원
조사기는 누구일까. 그는 1648년에 문과에 급제한 문사로 1678년 오위의 부호군에 서임되었는데 “최근의 가뭄이 대례(大禮)을 치른 다음 종묘에 고하지 않아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공격한 일로 1680년 유배되었다가 1694년 참수되었다.
제산은 상소문으로 인하여 옥에 갇힌 지 5개월 만에 출옥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이 당시 제산의 맏아들인 구사당 김낙행이 동행하였다. 여기서 제산이 <아유가>를 지은 것이다. 이듬해인 55세 때인 1733년 6월에 전라도 광양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개월 후 다시 광양의 섬진으로 이배되었다.
이어 제산은 57세인 1740년 12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그의 아들 낙행이 영조에게 글을 올려 제산이 어머니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다, 제산은 이듬해 2월에 집에 도착하여 4월에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다시 유배지인 섬진으로 돌아왔다.
62세 때인 1745년 10월에 해남현 신지도로 또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2월 다시 광양으로 이배되었다. 제산은 이처럼 유배지를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기구한 생을 보내다 64세인 1747년 4월 30일 유배지인 광양의 섬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2년 전 여름 필자가 제산 종택을 찾았을 때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 하시다 내려와 종택을 지키고 계시던 70대 초반의 제산 후손을 만났다. 그 분은 제산이 광양에서 세상을 버리자 맏아들 낙행이 부친의 상여를 끌고 온 수레바퀴를 필자에게 보이며 설명을 해주셨다.
제산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하고 애절했다. 맏아들로서 효심이 컸던 제산이 어머니를 그리며 읊은 <반포조>(反哺鳥)란 시도 유명하다. 동백나무 숲에서 어미에게 쉬지 않고 먹이를 물어다주는 까마귀를 통해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슬픔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필자도 현재 와병 중이신 여든의 노모를 모시고 있다.
※참고자료 -『구사당집』(김영옥,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7.) -「연원정맥의 의로운 학자 제산 김성탁」(김윤규, 『동양예학』 25, 2011.) -「김성탁의 생애와 <아유가>」(이원걸, 『한문교육연구』 27, 2006.) -「제산 김성탁 선생의 상소문」(김시황, 『동방한문학』 12, 1996.) -「제산 김성탁의 학문관과 영남유림에서의 역할」(허권수, 『동방한문학』 12, 1996.) 등
<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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