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를 떠나는 배들은 대개가 각오가 대단한 용사처럼 보인다. 거대한 여객선 동방명주가 인천항을 떠날 때는, 해지는 서쪽 바다가 배경으로 깔리기 때문에 그 각오는 비장미가 넘쳐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일찍이 이 시대 최고의 가객 정태춘은 동방명주의 낭만을 노래했다.
'동방명주, 대륙 가는 배가 반도를 떠나는구나'.
인당수, 장산곶, 요동반도... 차라리 그의 노래는 서정시가 아니라 서사시라 해야 옳다. 상해의 동방명주도 명물이지만 단동 가는 ‘동방명주’야말로 한중(韓中)간의 진정한 명물이 아닐까.
나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두 해 건너 한번 정도 만주에 다녀왔다. 비행기 타는 것을 무지기도 싫어해 배로 갔으니 동방명주를 열 번 정도 탄 셈이다. 지인들은 그런 나를 보고 고소공포증이다 뭐다 하며 비웃지만 비행기 여행은 영 여행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만주 갈 때는 동방명주를 탄다. 그리고 꼭 일반 다인실을 탄다. 기왕 배를 탔으면 선박 여행의 맛을 오로지 느끼는 것이 상책이다. 여행이란 일상과 달라 ‘일등실 삼류, 삼등실 일류’란 말이 있을 법하다. 여행의 고수들은 결코 특실이나 일등실을 이용하지 않는다. 일반실은 일등실보다는 우선 확 트인 넓은 공간이 좋고,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사귈 수 있는 것도 좋다.
배삯도 아주 저렴하다. 편도 100달러 정도이니 비행기에 비하면 경제적 부담도 없다. 오후 3시쯤 승선하면 다음 날 열 시쯤 단동에 도착한다. 17, 18 시간이나 어떻게 배를 타느냐고 하지만 그것 또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단 승선을 하고서 깡통맥주 하나 뽑아서 갑판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맥주를 느긋하게 마시면서 장엄한 서해 노을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덧 저녁이 다가오고, 저녁 식사 뒤, 적당히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누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배는 이미 도둑처럼 대륙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2006년 겨울에도 동방명주를 탔다. 그때도 역시 일반실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으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이다. 제 각각 사연을 안고 대륙으로 가는 그 만물상 같은 표정들을 나는 너무 좋아한다. 마치 어린 시절 장터 분위기였다. 장터 근처에서 자란 나는 장날이 되면 괜히 마음이 들떠 잔치 마당 같은 장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 보는 것을 좋아했다.
칸막이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두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둘 다 옛날 장터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표정이 너무 대조적이었다. 같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지만 한 사내는 꿈꾸듯 앉아있었고, 한 사내는 그 꿈이 다 말라버린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두 얼굴이 남과 북? 아니면 좌우 같은 무엇인가 중요한 부분을 대표하는 것 같았는데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우리는 쉽게 이야기 동무가 되었다. 선박 여행에서는 누구나 쉽게 말을 걸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동무가 될 수 있는 법이니...
한국에서 좋은 사장 만나 5년 동안 돈을 벌어 귀국한다는 조선족 구 씨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 듯 얼굴에 만족감이 넘쳤고, 어깨에 힘까지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는 나와 일행에게 맥주로 선심을 썼다.
사업을 한다는 한 씨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옆에는 서툰 한국말을 하는 중국 여자가 있었다. 한 씨의 아내였다. 얼핏 보아도 스무 살 정도는 젊어 보였다. 그녀는 맥주 집에서 일하는데 그 수입으로 단동에 있는 가족들도 살기가 편해졌다고 했다. 그렇고 보니 한 씨는 백수였고, 중국 여자에게 얹혀사는 형국이었다. 젊음과 돈 버는 기회라는 끈으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런대로 평화로워 보였다. 한중간의 결혼들이 대부분 위장과 사기로 파판이 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오히려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 동방명주 칸막이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두 얼굴의 표정은 만주 여행 내내 따라 다녔다. 어쩌면 그 얼굴이 오늘 날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있는 우리 한민족 중년 사내들의 평균값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 뒤 십여 년이 흐른 2017년에 나는 똑 같이 동방명주를 탔다. 십 년 사이 동방명주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배 안을 지배하던 한국인 보따리장수들이 눈에 띄게 줄었고, 그나마 남은 장사꾼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예약을 늦게 하는 바람에 일반 다인실은 매진이어서 4인실 표를 구했다. 4인실이라지만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아 얼굴 익히는 것도 대화하기도 어려웠다. 심심해서 다인실 쪽을 몇 번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기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말붙일 만한 보따리장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혼자 선상 카페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2000원 하는 맥주 한 병과 10위안 하는 구운 명태로 안주 삼아 혼자 마셨다. 뛰엄뛰엄 술을 마시는 승객들이 있었지만 말을 걸기가 마땅치가 않았다. 그래서 줄곧 혼자 마시다가 잠자리로 왔다.
내 침대는 2층이었다. 그런데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다. 어두워서 불을 켜려다 다른 손님들 잠을 깨울까 그냥 더듬어 바닥으로 내려오려는 데 그만 발을 헛딛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이번 여행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라는 직감이 스쳐갔다. 최소한 중상일 것 같았다.
컴컴한 바닥에 굴러떨어져 쳐박힌 채로 한동안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내 몸의 다친 정도가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달 예정한 여행이 시작과 동시에 끝을 낸다는 게 아쉬웠다. 잠시 뒤 먼저 얼굴부터 머리 그 다음 팔과 다리 내 신체 부위를 쭉 더듬었다. 다행이 다친 곳이 없었다. 평소 테니스로 단련된 운동신경이 잘 대처를 한 것 같았다. 십 년을 감수했다. ‘역시 동방명주는 다인실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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