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의 만주 일기 (12) 목단강 이야기

박명호 승인 2019.06.17 09:30 | 최종 수정 2019.06.24 20:11 의견 0

목단강에는 이야기가 많다.

목단강은 세계 유일하게 강과 도시 이름이 같다. 다시 말하면 강 이름도 ‘목단강’이요, 그 강이 중심으로 흐르는 도시 이름도 ‘목단강’인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목단강을 갈 때는 ‘간다’는 표현 대신에 ‘건너 간다’는 표현을 더 즐겨 쓰게 된다. 목단강은 이래 저래 우리 민족에게 참 사연이 많은 도시다.

기차로 목단강을 처음 건너갈 때 나는 중학교 때 읽은 황순원의 소설 ‘이리도’가 떠올랐다.

자작나무숲이 들어선 구릉 같은 산맥과 잇닿아 펼쳐진 무연한 초원. 거기에 여러 십, 여러 백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 이리떼, 소들은 밤이면 이들 사나운 짐승의 습격을 방위하기 위해 자기네의 어린 것을 가운데 두고 삥-둘러 뿔을 밖으로 향하여 자고, 말들은 또 말들대로 자기네 어린 것의 주위에 머리를 안으로 모으고 자는 곳... 중학생인 ‘나’에게 친구인 만수 외삼촌이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의 소설이다.

‘만주땅의 스릴 넘치는 마적 이야기며 불가사의한 중국 사람과 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북만주 눈보라치는 밤에 승냥이의 울음소리, 마굿간의 말이 추위에 발을 옮겨 짚느라고 언 땅에 내는 소리, 밤늦은 나그네 지나가는 썰매 방울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처량해져 고향생각이 간절하다가도 정작 이렇게 돌아오면 되레 그때의 일이 그리워진다는 만수 외삼촌 자신의 이야기. 이런 만수 외삼촌은 만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자 만수를 데리고 다시 대륙으로 갔다. 그 뒤에 만수가 그냥 대륙에 있는지 혹은 소원이던 마도로스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두만강 국경 도시 도문(두만강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토문강(土門江)’이 거기서 유래란 것인지 알 수 없지만)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왕청현을 지나 노송령을 넘으면 넓은 평야지대가 나온다. 그 일대는 과거 발해의 중심 무대였고, 목단강 유역이 된다. 지금은 그저 옥수수 밭이 끊없이 계속될 뿐이다.

목단강 조선족 거리. 사진=박명호
목단강 조선족 거리. 사진=박명호

평일 낮 시간이라 기차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았다. 나는 한 노인과 마주 앉았다. 예상대로 노인은 조선족이었다. 노인은 동경성까지 간다고 했다. 어떻게 발해의 도시 이름이 아직 남아 있느냐 물으니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은 ‘발해’라고 해 더욱 놀랐다. 노인은 기독교인이었다. 한국에서 온 목사 설교를 들으러 연길 갔다가 오는 모양이었다. 한국의 도움으로 마을에 교회가 생겼다고 크게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교인수가 한 삼십여 명 되는데 공산당원들도 당원을 포기하고... 중(僧)도 있지요.”

노인은 불교신자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은 듯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기차간에서 노인에게 목단강과 관련된 삽화 몇 가지를 들었다. 그 중 혼자 듣기에 아까운 아주 만주다운 이야기가 있었다.

목단강 부근에 살던 조선족 부부가 해방 소식을 듣고 아이를 업고 조선으로 가다가 노송령을 넘었다. 여러 날 굶었다. 고개를 넘다가 날이 어두워 불빛이 보이는 한 집을 찾았다. 그 집은 비적의 집이었다. 비적은 여자에게 마음이 있었으므로 옥수수 죽으로 대접하고 하루를 묵게 했다. 그리고 여자를 건드렸다. 남자는 알고도 항의하지 못했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 길을 떠나자고 하니 여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비적이 그것을 보고 남자에게 총을 들이대며 그냥 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아이를 업고 혼자 떠났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허리춤에 돈이 있다고 알려 줬다. 비적이 따라와 돈을 다 빼앗았다. 남자는 처와 돈마저 잃고 가다가 일본군 패잔병을 만나 그 억울한 사정을 말했다. 사연을 들은 패잔병도 분노했다. 패잔병들은 비적의 집으로 도로가서 마침 비적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를 집으로 가두고는 불을 질러버렸다.

박명호

◇소설가 박명호는

▷경북 청송 출생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장편 '가롯의 창세기', '또야, 안뇨옹'
▷소설집 '우리 집에 왜 왔니', '뻐구기뿔',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
▷잡감집 '촌놈과 상놈' 등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