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추천사】 처연한 슬픔과 눙치는 어법 - 정유미의 「불면증」 외 13편

장소시학 승인 2023.02.03 13:34 | 최종 수정 2023.02.03 13:49 의견 0

신인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은 특별하다. 그동안 서랍 속에 꼭꼭 감추어둔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마음의 결이 단순하지 않고 여러 갈래의 복잡 미묘한 무늬와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이 읽히고 평가받는 데 대한 기대나 두려움이 교차되어 있기도 하고,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은근한 자부심과 뒤섞여 있기도 하며, 신인 특유의 풋풋함과 신선함이 곳곳에서 묻어나기도 한다. 더러는 아직 채 완성되지 않은 기량으로 인해 서투른 면모가 부각 되기도 하고, 반대로 신인답지 않은 솜씨와 역량을 선보이며 자못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신인의 작품은 우선 술술 읽히는 맛이 우선되어야 읽는 즐거움이 크지 않을까 싶다. 너무 감춰져 있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이거나, 반대로 너무 드러나 있어서 전모가 대충 짐작이 되는 작품들은 제각기 상반되는 이유로 인해 술술 읽히지 않는다. 시도 결국에는 말하기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선 술술 읽혀야 그 의미든 어법이든 솜씨든 가늠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신인의 작품에서 이것저것 요구가 많으면 그게 오히려 병이 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정유미의 작품들이 갖는 큰 미덕의 하나는 먼저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여기서 술술 읽힌다는 것은 단순히 쉽다는 뜻이 아니다. 정유미의 시를 읽어가는 동안 문득 시인의 은근한 속내와 만나기도 하고 오랜 상처를 접하기도 하며, 이미 읽고 지나간 부분의 감춰진 행간을 다시 되짚어 짐작하기도 할 것인데, 때로 하소연이나 넋두리처럼 조곤조곤 늘어놓는 시행들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일상에서 얻어지는 소소한 깨달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대단하거나 거창하게 삶의 비의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제각기 다르고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 어찌 보면 삶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게 거기서 거기인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의 깨달음도 제각기 유별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소소한 차원에서 얻어지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깨달음이 오히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속담 중에 ‘손톱은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우리네 주변보다는 북한이나 연변 지역에서 더 널리 쓰인다고 알고 있는데, 물론 이 속담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비유를 품고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발톱보다는 손톱을 더 자주 깎는다는 사실은 대체로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왜 손톱을 더 자주 깎을까. 당연하게도 손톱이 발톱보다 더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톱은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란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네 삶의 일상 속에는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새삼 부각시켜 준다. 정유미의 작품들은 이렇게 손톱은 과연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라는 것이 정말 맞는 말이라고, 그것이 마치 과학적 진실인 양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특별한 공감의 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 대단하거나 거창한 통찰은 아닐지라도 우리네 삶의 일상이 안고 있는 본질의 한 모습이라는 점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정유미의 작품들 중에서 표제작인 「불면증」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뱃속에서 유산된 아이와 그로 인한 화자의 내적 트라우마를 술술 풀어내고 있으며, 「우리 동네」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동네의 수군거림을 견뎌야 하는 심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왼 어깨 륙색」이나 「그 겨울 사흘」 등의 작품을 통해 가부장 중심의 오랜 문화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그로 인해 깊어진 아버지와의 갈등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유미의 작품들 전체를 관류하는 정서는, 물론 ‘눈물’이나 ‘울음’ 등의 시어가 빈번하다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으로서의 신산스러운 삶과 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렇게만 보면 정유미의 작품들은 그리 새롭지 않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신산스러운 삶의 풍경은 굳이 정유미의 작품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여러 여성시인들의 작품들을 통해 거듭 변주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다시 언급하자면 삶의 일상에서 얻어지는 통찰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정유미의 어법은 그 소소한 깨달음의 재확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설움과 상처뿐일지라도 “그래도 밥은 먹고 일은 해야”(「조언」) 하는 게 삶이라는 것을, 그래서 “해로운 건 눈물로”(「해로운 건 눈물로」) 씻어낸다는 식의 지극히 평이한 해법도 때로 울림의 진폭이 크다는 것을, 아마 정유미 시인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충분히 터득하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출가외인 돈 없다”라든가 “가스나가 무슨 대학”이라든가 등등의 차별을 당해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공인중개사 손해평가사 나무 의사” 등 여러 자격증을 따며 강한 생활력을 갖게 된 결과를 “아버지예 덕분입니더”(「그 겨울 사흘」)라며 눙치는 결구의 진술은 눈물 짠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결구 속에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오랫동안 겪어온 여성 특유의 원망과 해학이 한데 뒤섞여 있다. 이러한 정황을 자연스러운 어법으로 눙치고 있는 작품들에서 우리는 세련된 솜씨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이 되는 삶의 놀라운 혜안을 만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라지만, 결국에는 엄마처럼 살게 되거나 적어도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쩔 수 없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이 속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엄마처럼 될까 싶어”(「육교 밑 취한 남자」) 걱정을 하더라도 삶이 거기서 거기였다는 인식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가 머물다 가는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이런 점에서 정유미의 작품들은 울음의 처연함에 웃음의 허탈함이 겹쳐지며 짠하게 읽힌다. 그 처연한 슬픔이 눙치는 어법과 미묘하게 어우러지며 술술 읽힌다. 사실 슬픔은 안으로 감출수록 깊어지지만, 어쩌랴, 문학은, 특히 시는 안으로 감춰서 깊어질수록 술술 읽힌다는 것을.

<시인·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장소시학』은 본지와 콘텐츠 제휴매체입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