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추천시인】 정유미 - 불면증 외 13편

장소시학 승인 2023.02.02 17:08 | 최종 수정 2023.10.11 11:05 의견 0

제2회 추천 신인상 수상작

 

불면증 외 13편

정 유 미

 

엄마가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하자
거실이 부엌이 방이 스위치를 내린다
밤에 옆구리는 안 잔다
배 감으면 머리카락이 뜨고
등이 다음엔 발가락이 소스라쳐
맥주를 한 병 소주를 섞어 한 병
그러면 귀 속이 차갑다
둥 떠오른다
구급차 소리 꺼도 안 꺼진다
의사가 수면제를 줬지만 믿을 수 없다
아기가 다녀간 때문이라는데
원래 없었는데 없어진 게 뭐라
있던 게 없어진 것도 아니 
없던 게 없어졌나?
그렇지만 여섯 달을 뱃속에
분하다 어디 가서 찾아와야 할지
모로 누워 빙빙 일부터 백까지
밤새 짓무른 눈 좀 붙여 엄마한테 가 있어 
못 견디는 남편이 돌려준
엄마는 자다가 네 번 들어와 
청소기는 밤에 못 돌려 아파트야 미안해 
베란다 쪼그려 담배를 피고 
이사를 결심하다 주저앉는 엄마는 
해 뜨면 돌리는 엄마는 
울 코스 쉐타를 돌리고
히야신스 알뿌리는 언제 귀여운 봉오리를 낳을까  
무릎을 TV를 
돌릴 수 있는 걸 돌리는 
아가는 청소기가 제일 좋은데.

 

해로운 건 눈물로

 

튀김 감자 두 개 주먹밥 한 알 돈까스 접시 앞에 앉아 울었다
막아보려 했지만 찍어내도 자꾸 올라왔다

그러니까 우리집은 매실댁 아래채였어예 
그 집 큰오빠는 중학교 졸업하고 우체부가 됐는데예 
어제는 등기 배달 와서 지지난 가실에 엄마도 가고 
인자 우리집 빈집 됐다 
혼잣말인지 내 들으란 소린지 

아지메는 몸띠가 소만 한 딸이 있었어예 눈만 뜨면 안산 논배미 얼라들 돌 떤지고 눈알 뻘거이 고래고래 질러 쌓더마는 정신병원 뚤맞아 죽었단 소리도 있고

열 한 살 땐가 서울서 기차 타고 내려왔어예 
한덴지 방인지 
다후다 이불 밑에 까망까망 오디 눈

빨간 다라이 엄마를 기다렸어예 
겨울바람 찬바람 오복골 만대이 내천 물알 
황강 자꾸 불기만 하대예

해로운 건 눈물로 씻었다.

 

우리 동네

 

눈물이 안 나왔다
가시나들이 아베가 갔는데 
울지도 않는다 수군거렸다 
가게 나가는 쪽문 위에 대못이 하나 
수학여행 기념 복조리가 걸려 있던 
아베는 못에 맞아 돌아가셨다
며칠 지나
사람 좋은 바우 구장이
철구 어메가 밤새도록 서방한테 쯔쯔
분명히 들었는데 자는 잠에 떠나신 걸로
경찰이 조사는 하고 아무도 안 잡아갔다
동네 사람들은 입이 하나 
까마귀 전봇대도 입이 하나
이놈 개가 못 볼 걸 봤나 순구야
버들개지 달싹이던 세 번의 봄 출렁
철구 아버지도 갔다
철구는 배다른 누나가 둘
여동생 남동생 뿔뿔이
뿔뿔이.

 

우수

 

얼마나 걸어야
얼마나 젖어야

너 듣고 싶어 
불 끄고 공원에 차 세워 빗소리 

내 못하는 일 잘도 해내는 
비야 뻥 뻥 내려
일자로 십자로 
일억 일만 씻기는 비야
귀 파는 비야.

 

조언

 

잊은 것이 무언지 모른 채
잊힌 것이 아련해 울고 싶은 아침
그래도 밥은 먹고 일은 해야지
직박구리 창 너머 야무지게 말 건넨다
그래, 밥은 먹고 일은 하고

직박구리 조언으로 일 나갑니다 
밥은 점빵 가서 먹구요
박카스도 한 병 
봄 번쩍! 들 겁니다

점빵에 관한 엉뚱한 댓글
저희 집안에 점빵 할머니가 계셨어요 
증조할머니신데 축첩이 유산이었던지 
증조할아버지 몇 번째 부인이었는지 
낳은 자녀 하나 없이 말년까지 같이 사셨던
싸돌아다니기 편해지면 책 보러 가야지

저도 점빵 호호. 

 

왼 어깨 륙색

 

아버지가 오셨다고 기다리신다고
야간반 마치고 먹은 시금치 뼈다구가 끄윽
쪽가위 호주머니 넣고
꼬기꼬기 발가락 말며 걸었다 해는 누리끼리
덜덜거리는 선풍기 수위실 
언덕길 올라 온 륙색 땀범벅 
어쩐 일로 오셨습니꺼?
내 목소리 내 귀에 차디차

수위실 언덕길 내려 87번 종점 고개 푹 
뒤통수 등줄기 질질 가던 버스
아버지가 앞에 나는 뒤에

서부정류장 내려
수고가 많다.

 

조복순 여사 스무 장

 

엄마 빠져나간 옷장
뒤적이다 까리까리 천 원짜리 
누가 주고 간 걸까 
쉐타 주머니 속 천 원짜리 스무 장
설날 세뱃돈 남은 걸까
이저리 갈라주고 
해 떨어져도 안 오는 손주 몫 
꼬깃 접어둔 걸까
아무래도 아무래도
아버지한테 시집오기 전 지릿재 너머 이슥골 
맨드라미 벼슬 타닥 쪼고 노리던 
장독대 숨어 맨발 뛰쳐나올 때
젖 퉁퉁 두고 온 첫아들 
그 아들의 딸이
할머니, 쥐여주고 간 걸까.

 

그 겨울 사흘

 

아버지 집이 나왔는데예 
이백만 원만 빌려 주이소
출가외인 돈 없다 
밤샘 뜬 눈 싹둑 잘리고
야속한 콧물에 눈물 쭈그려 앉았으니
 
보내 주이소
가스나가 무슨 대학
제 학력고사 잘 봤어예 
입학금 한 번만 내주이소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된다
보내 주이소 작은방 자물쇠 걸어 

배고프면 나올끼다 
엄마도 오빠도 백구야 
백구밖에 없는 우리 집
정지서 오빠 남긴 밥 말아 먹고
신협에 취직했다

시집와서 서른네 해 
공인중개사 손해평가사 나무 의사
아버지예 덕분입니더. 

 

블라인드

 

“왜 떠났어?”
“눈을 떴으니까”
냄새를 따라 소리를 따라 더듬
더듬이 나에게 자작나무 숲 달려
겨울 아침 책 읽어주러 왔다 
알비노병 흉측한 몰골로 불리는
마리, 기품 있는 목소리
거울이란 거울 없었으면
비추는 건 전부 깨졌으면
얼굴 몸통이 덜거덕거려요
흰 눈썹 머리칼 엄마가 던진 멍투성이 
흉투성이 사랑할 수 없어
녹색 눈 붉은 머리를 만났습니다
연못 속 비단잉어 부비덕 부비덕
울었습니다
손으로 뚫어보는 루벤을 만났습니다
못 보고 다 보는
웃었습니다

본다는 건 뭘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만질 수 없는 마리라니
마리

정원으로 나온 루벤 
얼음송곳에 눈을 
꽂고 있다.

 

육교 밑 취한 남자

 

훅 끼쳐온다 

적포 다리 공사판 벌어졌다
엄마는 코앞 벌어진 공사에 눈이 반질했다
회사 쉬는 주말에 버스 타고 시골 왔다
마루 끝에는 잠 덜 깬 새벽이 앉아 있었고 
하품도 못하게 추운 아침
고등어김치찌개 알루미늄 밥상 밀어주면 
늦게 일어난 포크레인 훌훌 먹었다
종이컵 커피 마루 숙취 퀭하던 남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수직수직 사다리 타던 연애 던지고
아이 갖고 결혼했다
웬수 지옥 취하면 머리를 찧었다

엄마처럼 될까 싶어
개구리 두꺼비 울었다.

 

장마와 연탄

 

대구 이천동 미군부대 정문 앞 
녹색 철 대문 들어서면 부엌 찔끔 딸린 방 
주인집 안방과는 마루 건너 하품 소리 
들어가자마자 TV 틀어야 
덜커덕 쪽문 당기면 부엌인지 
부엌 끝에 주인집도 자취방도 쓰는 변소
봉숭아 얼굴 씻기는 비 저녁 
주인집 마루는 고기를 웬일이래 구웠다
빙 둘러 여섯 식구 볼따구 미어지더니 
밤새 마루 내려서는 크작은 슬리퍼 소리
처마 물 게우는 소리
코를 막으면 기어이 벌리는 비 
귀를 막으면 쿠당탕 자빠지는 비

꿉꿉하고 냄새 사나워 연탄 피웠다가 
기어 벌벌 나왔던.

 

세 번 결심하고 네 번째 날

 

남편이 데려갔어요
힘드냐 묻는데 몸무게가 줄어요
다이어트엔 땀보다 눈물
알알이 수면제 깨고 오른 산
그 남자 눈을 처음 봤어요
울지 않는 굵은 손이 적셔 준 마음
갈마산 내려와 남편은 일 나가고 
거실 방 마당 방 마당 
결혼 기념 목걸이 반지 잊지 않고
어디 좀 떠나 조르다가도 일만 하는 사랑이 미안해서 닥치고 빨래 
부푼 달 부는 바람에 팬티를 사자 
사다 보면 하늘하늘 외로워 
가을 서둘러 회오리 사러 갔어요
꼬챙이처럼 말라도 아이는 자라고 
뒷집 에쿠스 단풍 드라이브 
나 좀 데려가 방문 목구멍 걸린 목소리
비너스 쇼윈도 돌다 지친 레이스 팬티 서랍 쏟아지는 저녁
리모컨 쥐고 잠든 남편 꾹 누르면 
언제부터 잠겼던 눈물이.

 

다정

 

눈발 콧등 치는 금요일
해는 져서 어두워
막걸리 몇 포기 치댔지
없던 하늘 눈 내리고
말이란 막걸리 
빨갛게 물들였네
트랄랄랄라 
젓가락 죽죽 찢어 
슬퍼서 웃을게요 
웃어서 울게요
밤 깊도록 
함박함박.

 

금목서

 

물고기 이름인 줄 알았다 

그녀가 살던 자취방으로 내가 들어간 건 
미술 시간에 파란과 주홍으로 금붕어를 그리고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들어 보이면 와아
엎드려 있던 경숙이가 일어나고
해 다 진 자취방 밀면 윽 변소 냄새
여기서 같이 살자

시골집 가서 동생한테 머리 뜯기고
이게 누구 때문인데
열아홉 다 실어 뺨을 갈기고
내 자취방 가자
덮으면 따뜻하긴 할까 싶은 홑이불 

가는 비 수요일 새벽까지 안 들어왔다 
물어 찾아간 서문시장 언덕배기
경숙이는 형부 뒤엉켜


언니 어디 갔노 집에 가자, 어서 가자 집에! 
앙다문 봉숭아 울지도 않고

자취방 돌아와 앉은뱅이책상 교과서 공책
째서 쫙쫙 버렸다
눈먼 가시나 눈먼 가시나

다시는 보지 말자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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