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추천사】 멋진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 정유미의 「불면증」 외 13편

장소시학 승인 2023.02.06 10:27 | 최종 수정 2023.02.07 18:09 의견 0

정유미의 시에는 최근의 우리 시가 잃어가고 있는 시적 자질 가운데 하나인 구술성口述性이 있다. 구어와 문어 사이에서 그 둘의 습합으로 만들어지는 구술이라는 양식은 입과 글이 서로를 덮어쓰면서 생기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 매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이 특징은 곧 정유미 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첫째, 개인의 역사와 사물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를 통합하는 힘. 시는 서사적인 진술이 아니면서도 하나의 사물, 하나의 기억, 하나의 단어로 개인과 사물과 사람들의 역사를 소환한다. 「그 겨울 사흘」이 요약하는 개인의 추억은 가부장제의 역사이자 여성의 수난사가 되며, 「해로운 건 눈물로」에서 드러난 매실 아지메 집안의 슬픔은 “황강”의 수량水量으로 측정되고, 「우리 동네」가 숨기고 있는 철구 아베의 죽음의 비밀은 후일담의 배경으로 잠복해 있다. “내 젊을 적 이야기는 대하소설 감이야”라고 말하는 어르신들의 말은 그런 점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체험이 숨기고 있는 감정의 부피는 그만큼 크지만, 그 이야기는 이처럼 하나의 순간에 농축되므로 대하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유미의 시가 한 편마다 하나의 일대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그 말을 전달하는 리듬의 힘. 구술성은 기억술의 주요한 방편이기도 하며, 이를 위해 화자는 자신의 말을 특별한 리듬 위에 얹는다. 이 리듬은 언중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시의 공공성을 벗어나지 않지만, 말하는 사람의 몸을 통해서 울려 나오기 때문에 개성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3연으로 된 「우수」는 각 연마다 비 오는 풍경(1연)과 내리는 비(2연)와 다시 퍼붓는 비(3연)를 그 소리-뜻들로 보여주며(예컨대 “걸어야”와 “젖어야”, “너 듣고”와 “불 끄고”, “일자로 십자로”와 “일억 일만”의 병치가 그렇다), 「왼 어깨 륙색」은 도처의 생략으로 답답하고 치밀어오르는 딸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선고 과정에서 빠졌지만 「추석 가까이」는 전체가 리듬 충동으로 들썩인다.

셋째, 화제話題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의 힘. 구술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대화 가운데 중심이 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말의 긴 연쇄를 시작하고 이어주고 종결하게 해주는 눈앞의 것, 일탈한 이야기를 집 나간 아이처럼 되돌아오게 해주는 것, 이것이 구술 속의 이미지인데, 시는 바로 그 이미지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정유미의 시에서 그 이미지들은 대개 맨 앞자리에 놓인다(구술성이 아니었다면 이미지가 반드시 맨 앞에 놓일 필요는 없다). 「불면증」은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서 촉발된 말들의 연쇄이며, 「조언」은 “직박구리”가 건넨 소리로 시작되며(이 소리의 반향이 ‘점빵, 박카스, 번쩍!, 엉뚱, 축첩……’으로 이어진다), 「조복순 여사 스무 장」은 엄마가 남긴 옷장 속 “천 원짜리 스무 장”이 불러들인 가족사다.

넷째, 목소리들의 중첩. 당연한 말이지만 구술성을 통해서 입말과 글말이 중첩되고, 화자와 청자가 중첩되며, 개인과 공동체가 중첩된다. 정유미 시의 목소리에서 어린아이와 노년의 육성이 함께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육교 밑 취한 남자」나 「세 번 결심하고 네 번째 날」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바로 이런 중첩된 목소리다. 엄마의 삶을 요약하는 목소리에 어린 딸의 목소리가 끼어들고, 남편을 원망하는 시선에 그를 측은해하는 시선이 겹친다. 이것이 정유미의 시를 풍요롭게 읽게 만든다.

좋은 시에 추천의 말을 얹게 되어 기쁘다. 멋진 시인의 탄생을 축하드린다.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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