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특집 : 의령 장소시】 고향 중리中里 외 5편 - 제해만

장소시학 승인 2023.03.08 11:12 | 최종 수정 2023.03.10 15:35 의견 0

장소시

 

고향 중리中里 외 5편

제 해 만

 

참꽃 꺾으러 떠난 아이들이 어둠에 갇혀
한 보름 마을엔 등불만 높더니
청개구리 울음에 대낮도 묻힐 무렵
봇물 넘치는 소리 천지 밖에서 들리었다.

어음산 그늘이 먹물처럼 번지면
몰래몰래 마을을 실어내던 개울물,
버들잎 다 흔들고 온 바람이 대숲에 잠들면
낮은 지붕부터 덮어주던 따뜻한 눈.

산 밑 끊어진 길목까지 와서
새끼 노루 한 마리 울고 가고
첫 번 내린 눈을 보며
마을의 토종개들은 컹컹 짖고 있었다.1)

----------
1)『도시의 서쪽』, 한겨레출판사, 1979, 46쪽


바람일기·4
- 봄이 오면

봄이 오면 고향으로 돌아갈까 보다
달동네 어귀에 쌓인 연탄재와 오물
철거한 집터와 냉냉한 눈무더기를 떠나
복숭아꽃 환히 피는 고향으로 갈까 보다

구름 그림자 내리는 낮은 산
실낱 같은 산길 돌아서면
옹기종기 이마를 대고 누운 집들
거기 알맞은 평수의 마당에선
새로 깐 병아리들 종알거리고
맨드라미 채송화 싹이 돋는 장독간
구식 울음으로 토종개가 울고
문풍지 바르르 떠는 방안엔
아버지 영정 그대로 걸려 있는 곳
들길 나서면 이름 없는 풀꽃 위에
벌 나비 분주히 날고 앉고
하루 세끼 끼니 끓이는 연기
꿈결처럼 마을 위를 감돌고
얼었던 앞 냇물 풀리는 소리
아지랑이 어울려 골짜기 흐르고
얼음 깨며 와와 떠들던 아이들
꽃 따러 간다고 산허릿길 질러
아슬아슬 구름 위로 오르는 곳

봄이 오면 고향으로 돌아갈까 보다
스탠드 빠와 에로티시즘 영화 광고
더덕더덕 붙어 있는 달동네 골목을 떠나
복숭아꽃 환히 피는 고향으로 갈까 보다2)

----------
2)『바람일기』, 인문당, 1990, 70-71쪽.

 

바람일기·6
- 고향에 와서

고향에 와서 물을 본다
어제 오늘 내일을 흐르는 물
십 년 머슴살이 돌석이의 땀과
전쟁 과부 하동댁의 눈물이
그들 떠난 고향의 물이 되어 흐른다

고향에 와서 들을 본다
순한 인정처럼 질펀한 들
아무도 탐내지 않는 묵은 기슭엔
나생이 비듬풀 한숨처럼 솟고
버려진 세월도 잠들어 있다
고향에 와서 산을 본다
허기진 다리 끌며 고개 오르던 산
철쭉꽃 먹고 객혈로 쓰러져서
칡덩굴 사이로 여윈 손 내밀던
순자 어머니의 주검도 묻혀 있다

고향에 와서 하늘을 본다
높고 푸르기만을 바라던 하늘
고향 사람들의 마음 담겨 있기에
저녁 연기조차 피해 흐르고
구름 한 점 영혼처럼 떠돌고 있다3)

----------
3)『바람일기』, 74쪽.

 

아지매
- 고향 이야기 3

데름, 와 일카노 와 일카노
누 보믄 우짤라고 이라노
청상과부 아지매 데불고 야간도주한 병식이
가다 말고 가다 말고 돌아보던 동구 밖인데
떠돌이 머슴살다 지랄 문둥병에 걸려
소록도 가는 보리밭에서 꺼꾸러져 죽고
시동생 남편 태어난 고향 보러
다리 밑까지 와서 눈물 나누나
살구꽃 허드러지게 핀 마을 보고 눈물짓누나4)

----------
4)『먼 기억속으로』, 외길사, 1992, 13쪽.

 

민들레 눈뜨는 걸 보면
- 고향 이야기 14

민들레 눈뜨는 걸 보면 모두 그립다
쇠똥밭에 무더기로 솟던 쑥내음 그립고
나뭇짐 벗어놓고 떠난 낮은 언덕 그립고
순이 손목 놓고 돌아서던 긴 강둑 그립고
어머니 옷소매 적시며 섰던 동구 밖 그립고
강남 갔다 돌아와 새끼 치던 제비 그립고
미워해도 꼬리 치며 따르던 삽살이 그립고
손에 잡힐 듯 달아나던 피라미떼 그립고
해종일 풀숲에서 울음 울던 뻐꾸기 그립고
담장마다 보얗게 등불 켜든 살구꽃 그립고
초가지붕 지우며 가던 산그림자 그립고
아이들 부르는 소리 은은한 메아리 그립고
저녁 밥상 희미하게 밝히던 등잔불 그립고
자고 나도 변함없이 흐르던 개울물 그립고
천년 서 있고 또 천년 서 있을 뒷산 그립고
한 번 헛맹세에 영영 토라진 친구 그립고
흙파기를 큰 벼슬로 알던 마을 사람 그립고
민들레 눈뜨는 걸 보면 모두 그립다5)

----------
5)『
먼 기억속으로』, 24쪽.

 

중리의 첫눈
- 고향 이야기 21

중리에 올해의 첫눈이 내려
끊어진 아버님 산소길 쪽에
소리쳐도 닿을 듯이 저승이 보이더라
밝은 해 서산을 넘어 낙양쯤 갔는가
떠들던 아이들은 벌써 깊은 잠에 빠지고
다리가 짧은 굴뚝새의 발자국만
하얀 눈 흰눈 위에 선명하더라
동구 밖 갈랫길의 늙은 느티나무에선
빨리 온 겨울을 원망하는 바람의 울음
돌아오라던 그날의 아버님 말씀
물든 숲 위로 휙휙 날아오르던
높고 청명한 작은형의 휘파람 소리도
이제는 하얗게 부서진 시간이 되어
싸늘하게 식은 앞내에 내려붓더라
프로빈쟈 늦었어요 너무 늦었어요.
서러운 귀향의 가슴을 향한 몇 소절 노래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독백이 되어
적막강산을 채우고 있더라
저승까지 하나로 덮어 놓더라6)

----------
6)『먼 기억속으로』, 31쪽.

 

※ 『장소시학』은 본지와 콘텐츠 제휴매체입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