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특집 : 의령 장소시】 비바람과 함께 외 - 전훈

장소시학 승인 2023.03.02 17:37 | 최종 수정 2023.03.02 17:46 의견 0

장소시

 

비바람과 함께 외 5편
                              전 훈

 

흐뭇이 베풀어주는 은혜인 양
흐뭇이 젖어서 아까운 것도 없어라
가로등마저 빛이 없는 이 항구에
내 무엇을 그리고 또 아끼어
애틋이 맴도는 것이냐?

나의 좋은 동무들
하나씩 둘씩
어느새 다 가버리고
노여움과 외로움과 쓰라린 시장끼만이 남는 거리……

분노의 술잔
입술에서 사라져도
떠날 줄을 모르는 통분이여! 불길이여!
미친 놈마냥 비칠거리며
비바람과 함께
흘러야만 가는 것
흐뭇이 베풀어 주는 은혜인 양
흐뭇이 젖어도 아까운 것 없어라
빗발 사이로
검푸른 산맥과 산맥 사이로
성좌처럼 기웃거리는 조국이여!
목숨이여!


어덴들 내려앉으면
발 밑 땅을 쪼아
외롬을 심는 나그네야
남국이라 창파만리
님 찾아 헤매어
가느다란 다리
거센 파도에 찢기고 할퀴어
눈인 양 희어진
날개며 몸뚱어리
황혼의 그림자처럼
흰 슬픔이 있더냐
소스라쳐도
소리 없는 통분이드냐
푸른 하늘가
저 구름 너머로 향수를
추켜드는 모가지야
어덴들 내려앉으면
외롬을 심는 나그네가 있다.


귀로

온 종일 시달린
사지를 끌고
어린 비둘기마냥
깃으로 돌아오는
시악씨 그림자엔
시장끼와 조름이 휘감겨

들국화 향기에 
가슴 저리우며 저리우며
들길 굽이 돌아
고개 추켜 들고
머얼리 노려보는 동자엔
새날에의 의지가 불타는구나

보랏빛 노을은
이처럼 짙어 가는데
겨레의 가을은
이냥 시드는 것일까

폭풍에 시달려
작은 가슴 멍들었을지라도
시악씨야
하냥 푸는 바다 파도와 싸우며
높은 하늘 성좌에
뜻을 이어
갈매기와 함께
내일을 비상하라!


막차
- 두 번째 8·15에 

동방의 외로운 지역을
님 실은 막차는 달린다
서른여섯 해를 나리 날마다 그리던 님
그 얼굴 다시 뵈올 길 없어
인민은 우노라 찬바람 휩쓰는 정거장에서
반목질시의 밤아 새어라
멱살을 쥔 손목아 풀어라
어둠 속 무거운 물결
자꾸자꾸 일월은 흘러
다시는 없는 막차를 놓치고
남아 있는 인민들의 표정을 보느냐?

깨어진 공이다 사라진 무지개다
잃어버린 보석이다 떨어진 화병이다
폭풍이 지난 폐허다 폐허!
흐느껴 울며 꿈틀거리는 어깨 어깨
묘지처럼 연속한 인민의 잔등 잔등
또 잔등!

오 네 가슴에도
내 가슴에도 아직 남아 있는
이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무엇이냐? 


피어오를 새날

마구 쏟아지는 소나기에
모가지 하나
피할 곳이 없구나

곡예에 능한 쌀값마저
식어 가는 체온을 조롱하는가

영화와 치욕의
못에 매달린
수많은 모가지야!

눈물도 웃음도
이제 비타민인 양
삼켜야 하나니

언제면 활짝 밤이 지고
모란꽃 모양
피어오를 새날이여!

그때 저마다
먹빛 가슴 속에
일곱 색 무지개 서리라
그립던 것 껴안고
통곡하리라

 

한역寒驛

해마다 가을이면
벼 이랑 누우렇게 풍년을 이루는
옥야沃野 한복판인데
모여든 나그네들

쌀값 얘기로 목덜미가 마르는
경전남부선 군북역
조수처럼 밀려드는 황혼!
황혼의 외론 그림자를
저마다 끌고
쌀자루에 지친 아낙네들이
예서부터 또 어느 보헤미안의
길손이 되려는 것인가?

피곤을 동정하며
서로 어깨를 기대어도
찍힌 티케트 조각보다
더욱 허전한 삶이 거미줄을 치는 마음
기다리던 철마가 달려들면
자랑일 수 없는 우리의 여정旅程이 비롯하려니……
저기 콩나물국 냄새 풍기는
막걸리집이나마 찾아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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