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특집 : 의로운 향 의로울 향, 의령】 북한문학에 나타난 '곽재우' - 김봉희

장소시학 승인 2023.02.15 11:28 | 최종 수정 2023.02.23 16:17 의견 0

문학전통

 

북한문학에 나타난 ‘곽재우’

김 봉 희

 

1. 들머리

망우당 곽재우(1552-1617)는 의령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통해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이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뛰어난 공적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 과 『선조 수정실록』1) 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전傳2)의 양식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민중들을 중심 향유층으로 한 설화에서도 곽재우 장군의 공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의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3)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곽재우는 역사적 기록과 허구화된 이야기 속에 모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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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곽재우의 의병장 활동은 대부분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연구의 기초 문헌이라 할 수 있는 곽재우 문집인 『망우집(忘憂集)』의 부록 「용사별록(龍蛇別錄)」을 시작으로 이로(1544-1598)의 『용사일기(龍蛇日記)』,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활용했다. 반면 『선조실록』과 『선조 수정실록』에서는 임진왜란 전반기와 후반기 곽재우의 생애를 정리할 뿐만 아니라 곽재우에 대한 선조와 정부 관료들의 인식과 평가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2)곽재우의 전(傳)은 왕의 명령으로 입전되었다. 1617년 곽재우가 사망하자 광해군은 즉시 전의를 보내고 예조좌랑 유약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사관이었던 배대유(1563-1632)에게 전을 지어 역사책을 쓰도록 명했다. 그 후, 비지류(碑誌類)가 저작되었다. 비지류의 대표적인 보기는 다음과 같다. “이광정(1552-1627)이 지은 전(傳), 허목(1595-1682)이 지은 창암유허비명(倉巖遺墟碑銘), 권유 (1633-1704)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이덕수(1673-1744)가 지은 묘의(墓衣), 홍만조(1645-1724)가 지은 시장(諡將), 김석위(1634-1684)가 지은 전(傳)” 장영희, 「곽재우의 전과 야담의 수용양상」, 『한문학보』 제14집, 우리한문학회, 2006. 187쪽. 그 외,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이 지난 후에 필기는 비지전류와 같이 인물의 역사 기록성을 지니며 유지되었다. 허구성이 가담된 야담은 19세기 전후에 저작되었다.

3)곽재우 장군 설화는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27편, 신태수와 김광순이 수집한 망우당곽재우 연구 자료편(곽망우당기념사업회, 1992) 158편으로 모두 185편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곽재우는 전쟁터에서 백의종군하다가 전사한 이순신이나, 전란 과정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 원사한 김덕령과는 달리 전란이 끝나자 벼슬을 사양하고 낙동강 변에 지은 ‘滄岩江舍’에서 여생을 보냈던 인물로서 다른 장군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민중들은 이러한 곽재우 장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승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하여 그는 이야기 속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김영미, 곽재우 장군 설화의 전승 양상 연구, 동아대 석사 논문, 2001. 1-2쪽.

 

이러한 곽재우의 인물 전승 양상은 한국 학계에서 다양한 성과를 이루었다. 첫째,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한 임진왜란의 의병 활동과 관군 활동에 관한 연구이다. 둘째, 임진왜란 이후 다른 의병장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 인물로서 민중의식이 덧붙여진 곽재우 장군 설화에 관한 연구이다. 셋째, 곽재우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이다. 넷째, 곽재우의 한시 속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한편, 북한에서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에 관한 연구는 항왜 정신을 앞세워 인민들에게 민족문화 정서를 함양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다. 북한의 정책변화에 따른 시기별로 약간의 관점 차이는 있겠지만 의병과 민중들의 처절한 저항의식을 통해 인민들에게 애국적 민족문화 정신을 함양시키는 역할을 했다. 더불어 임진왜란의 항왜 혁명에 정신 근간으로 삼아 김일성의 ‘혁명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 정권 체제를 공고히 다져 나갔다. 특히, 전쟁기부터는 임진왜란(임진조국전쟁)을 ‘조국 방위 전쟁, 정의의 전쟁, 승리의 전쟁’4)으로 간주하고 전쟁에서 활약한 애국적인 영웅적 면모를 담아내고 있다. 본 연구에서 다룰 ‘곽재우’도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애국적 영웅으로 형상해 놓고 있다.

사실, 한국 학계에서 논의된 북한 고전문학 연구는 북한 문학사나 북한 자료에 의존해서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 학계에 성과로 알려진 고전소설이나 현대화된 고전문학 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5). 현재, 연구 환경 속에서 북한의 정권 시기에 따른 고전문학 수용 양상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에 관한 논의가 미비하다. 북한 문학에서 나타난 곽재우의 형상화나 서사 수용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김봉희의 논문 「북한의 고전소설 『임진록』 의 서사적 변개 양상과 의미–윤세평의 『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을 중심으로」(『열린정신인문학연구』 제20집 3호,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9)에서 북한문학에서 곽재우 서사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임진록』 에 포함된 하나의 서사로 ‘곽재우’를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글쓴이는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태풍』 제2권 1호, 태풍사, 1949.1)6)와 윤세평의 「곽재우」(『임진록』 , 민주청년사, 1955)7)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북한 문학에서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곽재우의 형상화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북한의 정권 수립 시기와 전후복구 시기에 곽재우 서사의 수용 양상을 비교하는 동시에 북한 문단에서 ‘임진왜란’을 수용하는 관점과 자세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남북한의 곽재우 서사의 수용 양상을 비교·대조할 수 있는 자료로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로 인해 북한 고전문학을 이해하며 수용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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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본 침략자를 반대하여 진행한 조선 인민전쟁은 자기 조국의 독립과 영예를 고수하기 위한 조국 방위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침략을 반대하는 정의의 전쟁이었다. -(줄임)- 이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최후의 승리를 조선 인민들이 쟁취함으로써 자기들의 그 위력과 군사 예술의 우수성을 널리 시위하였고 따라서 자기 력량에 대한 신심을 한층 갖게 되었으며 숭고한 민족적인 자부심을 더욱 제고시켰다.” 리청원, 「임진조국 전쟁의 그 성격과 의의」, 로동신문, 로동신문사, 1952. 4. 13.

5)한국 학계에서 북한의 고전수용 양상에 관한 연구는 북한 문학사에서 언급되고 자료화한 춘향전심청전에 기울어져 있다. 한국 연구자 가운데 북한 고전문학 연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 이는 전영선이다. 전영선은 북한의 고전소설을 수용의 의미를 통해 그 특성 연구에 집중하였다. 전영선, 북한에서의 고전소설 수용양상 연구, 북한연구학회 소식 4권 제2, 북한연구학회, 2000 : 춘향전에 대한 북한 인식과 접근 태도, 민족문학연구 4, 한국민족학회, 2000 : 북한 고전문학의 진정성과 특성 연구-전소설을 중심으로, 어문학 91, 2000 : 고전소설의 역사적 전개와 남북한의 춘향전, 문학마을사, 2003 : 심청전, 고전문학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 고전문학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 박이정, 2012. 그 외, 이상숙의 춘향전을 중심으로 한 전통 논의의 양상(국어국문학 120, 국어국문학회, 1997)와 송소라의 북한의 심청전 수용양상과 의미(Journal of Culture 30,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2015)가 대표적 논의이다.

6)북한 문단에서 작가 아을파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작가의 이름에서 짐작해보면 필명일 가능성이 있다. 잡지 태풍은 태풍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체신성 출판물 관리처에 취급하는 종합잡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잡지 목차를 살펴보면 남한 정권이나 실생활의 비판을 가하는 논평이나 수필 등이 실려 있으며 민속 설화나 민속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란도 있다. 이를 통해 북한 정권 시기 사회주의 국가의 우수성과 정권의 정당성을 피력한 잡지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 이 잡지는 한국전쟁 당시 남한 민중들을 선전·선동하는데 배부되기도 했다.

7)윤세평은 본명은 규섭이며 1911년 8월 11일 전북 남원군 운봉면 북천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에 월북한 그는 북한 문단 주력 매체에서 근무하면서 출판, 교육에 이바지했다. 특히, 고전문학에 대한 주해와 연구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1955년에 우리나라의 애국적 학자 박연암(민주청년사), 임진록(민주청년사), 조선문학사(15-19세기)(교육도서출판사)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가운데 임진록은 고전소설을 개작하여 ‘임진왜란’ 당시 왜에 맞서 싸운 애국적 인물의 사상을 북한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2. 곽재우의 초기 의병 활동과 전투·전략 묘사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

북한 정권 수립 시기 민족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인민 교양을 통해 ‘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워 정권 유지를 공고히 다져 나가기 위함이었다. 그 가운데 고전문학은 인민성을 바탕으로 한 계급성을 고양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 민족문화 유산 보호 정책 아래 다양한 신문·잡지 등에 수록된 고전문학은 인민들에게 교양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민족적 자긍심을 통해 북한 정권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당시,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태풍』 제2권 1호, 태풍사, 1948. 12)에서도 곽재우의 임진왜란 초기 의병 활약상을 실어 전하고 있다.

1)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한 경상우도 전투 서사 확대

대부분 『태풍』 에 실린 글은 남조선의 정치와 경제, 미국의 자본주의를 비방하는 정론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논하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민족문화 유산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전설을 비롯한 애국적 역사 인물에 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도 잡지 『태풍』 의 ‘임진왜란사화壬辰倭亂史話’8) 코너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의 애국적 활약을 역사적 근간을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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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북한 정권 수립 시기에는 북한에서도 ‘임진왜란’이라는 역사 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 서사를 차례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홍의장군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는 의병장이다.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 사람이다.

② 곽재우는 호협하여 의협심이 많고 담이 크다. 사십이 넘도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의령에서 고기를 낚으며 지냈다.

③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조정과 높은 벼슬아치를 위시한 수령방백이 도망쳤다. 곽재우는 가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그를 미쳤다고 비방하는 사람이 있었다.

④ 의령, 삼가, 합천 지역이 위험해지자 곽재우는 정진 함안을 추격하여 적군 50명의 머리를 베었다. 곽재우가 싸울 때, 몸에 붉은 옷을 입고 싸워서 ‘천강홍의장군’이라 하였다.

⑤ 곽재우는 모인 장정들을 위해 소를 잡아 먹이고 초계 곡창의 곡식을 취하여 군령으로 삼았다. 우병사 조대곤은 곽재우를 토적으로 몰아 체포령을 내렸다. 낙담한 곽재우에게 초유사 김성일은 군사를 일으켜 싸우라고 격려했다.

⑥ 정진 전투-적이 마른 땅에 꽂은 나무작대기를 진흙 구덩이에 다시 꽂고 복병을 심었다. 곽재우는 많은 적군을 대항하기 위해 10명에게 자기와 같은 붉은 옷을 입히고 흰 말에 태워 적을 유인하여 적군을 대파했다.

⑦ 그 뒤로 반드시 승리하며 곽재우의 흰 말은 나르는 것같이 빠르고 적군의 화살에 맞지 않아 그를 ‘신장’이라고 불렀다.

⑧ 군영 멀리 적이 있는 곳까지 척후를 늘어놓고 적의 공격에 대비, 적군이 많을 때는 수풀에 의병을 풀어 군사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밤에는 다섯 머리를 가진 횃불을 들어 사면에 함성을 질렀다. 자신의 부하가 적군에 포위됐을 때, 반드시 구해냈다.

⑨ 곽재우는 군사를 모집, 일곱 둔을 만들어 낙동강에서 정진에 이르기까지 전군을 통솔했다. 초유사 김성일은 삼가 군사를 재우에게 속하게 하였다. 시골 부자들로 쌀과 소를 내게 하여 그것으로 군사들을 먹이고, 합천 세 고을은 전과 같이 농사를 지었다.

⑩ 임진 유월 왜선 18척이 정진으로 들어오자 물리쳤다. 적이 영산, 창녕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도강 할 때 홍의장군이 있음을 알고 강을 피해 달아났다. 그 적을 쫓아 성주 안어역에서 적을 습격하였다. 이때, 경상감사 김수가 용인 전투에 패하자 재우는 분개하여 목을 치려 했다. 오히려 김수는 조정에 곽재우를 참소하여 김성일이 조정에 변명하여 무사했다.

⑪ 현풍 전투 : 정병 수백을 뽑아 현풍에 쳐들어갔다. 적군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밤에 비슬산에서 소리를 치며 총을 놓고 불을 꺼서 사람이 없는 듯 꾸미고, 다시 성 뒤 높은 곳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성안을 비치게 한 다음 “홍의장군이 내일 아침, 성을 치러 간다.”고 외쳤다. 적이 겁을 먹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⑫ 영산 전투 : 영산에 적의 세력이 강해 군병을 더하여 영산성으로 진격했으나 별장 윤택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재우는 비장 주몽룡을 시켜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 내달아 적이 그대로 물러났다. 다시 크게 사흘을 전투해서 적이 물러났다.

⑬ 이리하여 경상우도가 평정되었다. 다만 밀양 대구로 하여 안동 성안이 적이 왕래하는 길이 되었다.

⑭ 왜적이 물러난 뒤, 곽재우는 산으로 들어가 ‘벽곡생식’을 하였다. 조정에서 불러들였으나 비슬산에 들어가 세상을 떠났다.

⑮ 세상 사람들은 그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조정이 부패하고 당파 싸움으로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을 보고 증오심을 가져 출사하지 않았다. 특히, 김덕령 같은 애국적 장수가 죄없이 죽는 것에 증오심이 더했다.

 

인용 글은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되었으며 크게 ‘처음, 가운데, 끝’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처음 부분은 ①, ②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무서워하는 의병장으로 곽재우를 표현하고 있으며 “의령 사람, 호협, 의협, 담이 크며 사십이 넘도록 출사하지 않고 고기를 낚는” 모습까지 포착하고 있다. 곽재우에 관한 세세한 출생과 성장 과정과 배경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곽재우의 문헌 가운데 전傳에서 첫머리에서 출생과 가계, 성장 과정을 나열하는 것과는 다른 기술이며 영웅적 인물의 비범함과 영웅적 행적을 찬양하는 비지류碑誌類의 앞머리와 다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아을파 「홍의장군 곽재우」의 곽재우 서사 형태는 임진왜란에 관한 직접적인 경험과 견문을 담은 필기류 『난중잡록』9) 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곧, 곽재우의 행적에 더 집중한 내용과 구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겠다.

가운데 부분은 ③에서 ⑬까지 기록이다. 가운데는 다시 세 부분의 서사로 나눠진다. 첫 서사는 ③∼⑤로 의병 봉기의 정당성과 ‘천강홍의 장군’ 서사 삽입, 의병장으로서 첫 위기를 직면하는 과정이다. 이는 국난을 통해서 영웅의 출현, 영웅의 면모, 위기에 봉착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곽재우의 첫 위기는 그의 행적에서 말미암는다. 그는 초계 곡창지대 곡식을 취하여 군사들을 먹였으나 우방사 조대곤에 의해서 토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진다. 곽재우는 의병으로 활약할 수 없는 첫 번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초유사 김성일이라는 조력자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어 본격적인 전투가 펼쳐지는 서사 과정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⑥∼⑨이다. 두 번째 서사 부분에서는 역사적인 정진 전투(정암진)10)와 전략 전술이 발휘되면서 곽재우의 흰 말과 같이 ‘신장’의 칭호를 부여받는다. 이와 더불어 곽재우의 백 가지 전술 가운데 다양한 전투·전술과 전략이 기술되면서 부하를 아끼는 의병장으로서 기개와 영웅적 면모를 드러낸다. 마침내 ⑨에 이르러서 낙동강 전선의 민중들의 안정성을 드러내면서 관군이 할 수 없었던 향토를 지켜내고 민중들을 보호하는 영웅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 부분 마지막 서사 부분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왜적들과 펼친 전투를 그린 ⑩∼⑬ 부분이다. 임진년 유월에 곽재우 부대는 낙동강 하류 기강岐江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성주 안어역에서 왜적을 습격하는 등 낙동강 연안에서 잦은 전투를 벌이고 승리를 한다. 그러던 중 경상감사 김수가 용인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곽재우는 노발대발하며 김수의 목을 치려고 한다. 오히려 김수는 조정에 곽재우가 모반을 꾀한다 참소를 하게 된다. 여기서 곽재우는 두 번째 위기를 맞는다. 이 글에서는 김수와 갈등의 서사를 간단하게 설명하고만 있다. 사실상, 곽재우와 김수는 서로를 비난하는 장계와 상소를 조정에 올리는 등 격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다시,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의 무고함을 알려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 후, 곽재우는 현동, 영산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 지략으로 경상우도 지역을 방어하게 되는 서사를 묘사해 놓고 있다.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의 끝부분은 역사서에서 역자의 논왈論曰처럼 곽재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이 부분에서 역사적 시간과 곽재우의 역사적 행적을 건너뛰고 그의 죽음 부분을 다루며11) 그에 따른 곽재우가 벼슬길을 버린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곽재우는 의병장에서 관군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몇 번의 귀향과 유배를 거쳐 비슬산에서 벽곡생식을 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임진년 의병장의 활동 양상만을 다루고 있다. 곽재우의 벼슬길에서 활약보다는 의병장으로서 향토를 지키고자 하는 충절과 민중을 보호하는 영웅적인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는 역사적 인물로서 곽재우를 포착해 두고 ‘영웅담’을 구조화하고 있다. 곽재우의 전체적인 서사를 ‘국가의 환난-영웅의 출현-영웅의 위기-구원자의 조력-영웅의 위기-구원자의 조력-혁혁한 전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곽재우의 역사적 시간 속에 영웅적인 면모를 박진감 있게 그려내기 위함이다. 게다가 ‘정암진-기강-낙동강 연안 전투-현풍-영산’을 거치는 경상우도 전투 서사12)를 확대하여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를 방어한 곽재우의 역사적 공로와 뛰어난 전투 지략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난의 위기 속에서 위정자들과 다른 행보를 보여준 의병장 곽재우의 애국적 영웅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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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필기류는 조선 초기 야사류를 포함한 잡록을 말한다. 필기는 크게 야담, 패설, 한문 단편 등과 함께 문헌설화에 포함된다. 하지만 필기류는 견문을 통한 기록성이 강한 실기문학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은 선조 15년인 1582년 12월부터 인조 15년인 1637년까지 약 57년간 국내외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기록물. 속잡록까지 합쳐 총 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중잡록 1권에 곽재우에 관한 서사가 기록되어 있다.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와 일치하는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유학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했는데 재우는 경상도 의령 사람이다. ②가산을 정리하여 군졸을 모으고 자기가 입을 옷을 벗어선 전사들의 처사에 입혔다. ③용사 50명을 뽑아 초계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먹였다. ④천강홍의 장군 서사 ⑤적후소 설치, 손잡이 하나 가지에 다섯씩 달리 횃불을 밤새도록 무서운 함성을 울리게 했다. ⑥김수와 갈등, 초유사 김성일 조정. ⑦초유사 김성일이 삼가 지역을 곽재우에게 주니 두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다. ⑧곽재우가 의령, 삼가, 합천 여러 고을을 수복, 정진에서 진을 치고 낙동강변 연변의 왜적을 추적해서 격파했다. ⑨기강에서 왜적이 홍의장군 진영인 줄 알고 물러났다. ⑩현풍 전투 : 밤에 비슬산에서 소리를 치며 총을 놓고 불을 꺼서 사람이 없는 듯, 다시 성 뒤 높은 곳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성안을 비치게 한 다음 “홍의장군이 내일 아침에 성을 치러 간다.”고 외쳤다. 적이 겁을 먹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⑪영산 전투 : 적의 군사가 많고 강했다. 윤탁이 영솔 후원, 윤탁을 후원했다. 윤탁이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다. 사흘을 싸워 영산성을 수복했다. ⑫창녕 한 길은 적병이 단절되고 중간 길로 밀양 대구에서 안동, 선산에 이르기까지 적의 왕래 길이 되었다.

10)곽재우의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대표적인 전투로 정진 전투를 꼽는다. 정진(정암진) 전투는 임진년 5월 말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곽재우가 임진년 4월 22일, 경남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펼치면서 5월 4, 6일에 기강(岐江) 전투, 5월 말경에 정암진 전투가 벌어졌다. 그 후, 진주성 방어지원 활동, 낙동강을 거슬러 연안 지역의 소규모 전투를 거쳐 같은 해 7월에 현풍·창녕·영산성 수복 활동을 펼쳤다.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는 정진 전투를 가장 먼저 앞세우고 있다. 이러한 서사 전개는 곽재우의 극적 영웅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한 전략으로 짐작할 수 있다.

11)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 곽재우의 마지막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부분은 야담류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난 후에 쥐 잡는 고양이 역할이 끝났다고 하고 방술을 배워 입산하여 신선” 전해 오는 이야기를 보충하고 있다. 기이한 환상성을 부여하기보다는 그만큼 곽재우의 왜란 이후의 다른 장수들과는 다른 행적에 대한 민중들의 긍정적인 기능이 더해진

12)곽재우의 전(傳)에서는 정암진 전투를 주로 다루면서 현풍 전투는 다루지 않고 있다. 비지류인 묘지명 형태도 마찬가지다. 신도비명과 시장에서는 홍의장군 서사를 확대하면서 현풍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 경상우도 전투 장면을 자세히 기술하며 전투마다 전술 지략을 각기 묘사하고 있다. 정진 전투에서는 적이 마른 땅에 표시해둔 나무작대기를 진흙에 꽂고 매복을 통해 왜적을 쳤다. 그리고 곽재우는 부하 10명에게 자신과 같은 붉은 옷에 흰말을 타게 하여 왜적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강한 쇠뇌로 적을 물리쳤다. 기강과 성주에서는 습격 형태의 전투를 강행하였다. 현풍 전투에서는 성문 안에서 꼼짝하지 않은 왜적에 대항하여 밤에 비슬산에 올라가 소리를 치며 횃불을 켰다가 끄다가 하니 진지가 어디에 있는지 혼란을 가하면서 성 뒤에 올라가 전투를 공지하는 등 왜적에게 두려움을 갖게 했다. 영산 전투에서는 왜적 군영을 향해 용감하게 쳐들어갔다. 이처럼 곽재우의 의병장으로서 기개와 전투에 대한 뛰어난 지략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2) 지배층 비판과 계급의식 발휘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들은 관군과는 별개로 활동하였다. 임진년 10월 이후, 의병이 관군에 의해 합해지거나 서로 협력하여 전투를 진행해 나갔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에 대한 조정에 보고는 1592년 6월 28일 『선조실록』 의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전황 보고 장계’에서 처음 파악되었다.13) 이 장계에서 곽재우는 경상감사 김수와의 마찰과 대립이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초기 의병 활동에 대한 평가가 수록되었다. 조선의 조정에서 곽재우는 유학자로 가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 점은 긍정적 평가를 했지만, 조정 관리와 대립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14) 반면,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 임진왜란의 전황 속에서 조선 조정의 관리의 부정적인 형태와 곽재우의 애국적 영웅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임진년을 당해 왜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범해오자 평시에 벼슬을 탐하여 높은 자리나 엿보고 백성의 질고도 돌아보지 않으며 뽐내기만 하고 있던 조정 신하를 위시하여 수령방백들이 다투어 성과 진을 내버리고, 목숨을 구하여 도망하는 것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15)

인용 글에서는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조정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뒤로한 채 성과 진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서 향토를 지키고자 했다. 분명, 국가의 환난 속에서 조정의 녹을 먹는 관리들의 위선적인 자세와 대조적이다. 비록 곽재우도 조선 사회의 양반이며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지배층 관리들과는 다른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가산을 털어 군사를 모집하고 자신과 가족의 옷을 벗어 군사와 그 처자들에게 입혔다. 그의 행동은 조정 관리에게는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진 함안을 습격하여 왜적을 물리치자 장정들이 곽재우의 진으로 자청해서 모이고,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곽재우는 모인 장정 오십 여 명을 격려하여 모두 죽기로써 적병을 물리치기를 맹세케 하고 소를 잡아 그들을 한바탕 먹인 후 초계(草溪) 곡창의 곡식을 취하여 군량으로 삼고 적과 싸울 준비를 공고히 하니 좋지 않은 자들은 그를 도적이라고 비방하였고 그때 산 중에 피해 들어 왔던 우병사 조대곤은 곽재우가 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토적(土賊)이라고 해서 체포령을 내려 그를 잡으려고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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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강문식, 「실록을 통해 본 곽재우의 의병활동」, 규장각 3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8. 98쪽.
14)“그 사람(곽재우)이 비록 담력과 용맹이 있으나 -(줄임)- 패주한 수령이나 변장(邊將)의 소식을 들으면 꼭 참수하라고 하며 심지어 감사(監司)와 병사(兵史)에 대해서도 불손한 말을 많이 하니, 그를 비방하는 말이 일어나 도적이라고 합니다.” 선조실록 권27, 선조 25년 6월 28일(병진).
15)아을파, 홍의장군 곽재우, 태풍 21, 태풍사, 1949, 45.
16)아을파, 앞의 글, 46.

 
곽재우는 관리들이 왜적에 피해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간 자리에서 왜적과 싸웠다. 소위 유학자나 양반이라는 사람들은 철저한 조선의 신분제도를 벗어나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곽재우 부대가 눈에 거슬렸다. 심지어 왜적을 피해 산 중으로 도망간 우병사 조대곤은 자신의 행동은 반성하지 않고 곽재우를 토적이라고 간주하고 체포령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의기투합해서 모인 장정들은 흩어지고 곽재우의 의병 활동의 위기가 찾아온다. 물론 초유사 김성일의 격려와 명령으로 곽재우와 의병들은 전장에 다시 나가게 된다.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 갈등 대립 요소는 외부에 있는 왜군이다. 명나라를 도모하기 위해 조선을 거쳐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과 조선의 민중들을 유린하는 왜적이 부정적인 악의 인물군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표면적인 조선과 왜의 대립 요소 외에도 조선 조정의 관리와 의병장 곽재우의 내부적 대립을 심어 놓고 있다. 조선의 힘없는 민중들을 외면한 조정 관리의 모습을 통해 곽재우는 국난 속에서 민중을 사랑하고 먼저 충의를 실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재우는 그의 수하 군사가 적의 포위를 만났을 때 먼 곳이라도 반드시 달려가 구해내 가지고 왔으며 이렇게 하여 그 군사의 상함이 적었고 또 군졸들이 감복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줄임)-

초유사 김성일이 삼가(三嘉)의 군사로 재우에게 속하게 하니 재우 두 고을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윤탁(尹鐸)으로 대신 장수(代將)를 삼고 전 부사 오운(吳雲)을 군사 모집하는 관원을 시켜 시골 부자들로 하여금 쌀과 소를 내게 하여 군사들을 먹이니 그 때문에 군중에 환성이 높아지고 군사들의 기운이 올랐다.17)

위의 인용 글에서 전장 속에서 곽재우의 장군으로서 면모와 함께 부자들에게서 군량을 모아 군사들을 먹이는 계급의식이 발휘된 인물로 형상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장에 있는 장군들은 군사가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지원병을 보내거나 후위에서 치러 나가는 지원 차원의 전술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곽재우는 적진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 자신의 군사들을 구해오는 모습은 의병장으로서 몸을 사리지 않는 충절의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관군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곽재우는 국난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급급했던 부자들의 소와 곡식을 거두어 군사들을 먹이게 했다. 유교 사회의 신분적인 위계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이것은 당대 조정의 관리들이 행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따라서 곽재우는 적진 속에 가장 먼저 달려갈 수 있는 의병장으로서 기개와 있는 자들의 재산을 민중들에게 나눌 수 있는 각성된 계급의식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조정 관리의 위선적 태도와 곽재우의 계급의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부분은 경상감사 김수와 대립 서사이다. 경상감사 김수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를 버리고 거창으로 도망간 이력이 있다. 그 후, 용인 전투를 지원하러 올라갔으나 대패하고 만다. 이것을 본 곽재우는 “김수가 적을 치러 나갔다가 적을 보기도 전에 도망하여” 왔다고 책망하면서 그의 머리를 치려고 했다. 오히려 김수는 이것을 분하게 여겨 곽재우의 모반을 참소하여 곽재우를 곤혹에 빠지게 하였다. 곧, 곽재우와 김수는 선악의 구도 속에 있게 된다.18) 이처럼 곽재우와 김수의 대립적 내부갈등19)은 문학적으로 펼쳐서 기술되지 않지만, 조정 관리의 위선적 행보를 비판하고 곽재우의 의로운 인물 행위를 부각하고 있다.

그는 조정에 벼슬하는 것 귀찮게 여겼을 뿐 아니라 당파 싸움이나 하고 서로 모함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몰아 죽이는 것을 보고 저기 증오를 느끼고 환로에 나서지 아니한 것이었다.

더구나 김덕령(金德齡)이 같은 애국적 장수가 아무런 죄없이 죽는 것을 보고 더욱 그런 맘을 굳게 하였던 것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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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아을파, 앞의 글, 48.
18)장영희, 「『난중잡록의 곽재우 인물 서사의 특징, 한문학보9, 우리한문학회, 124.
19)실제, 곽재우는 관군 장수들과 충돌하는 모습을 선조실록29 (선조 25, 87)선조 수정실록26(선조 25, 61)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조정에서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곽재우가 자신의 병세를 믿고 한 행동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밖에도 곽재우는 작전 수행 시 관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20)아을파, 앞의 글, 50.

 

모든 조정 관리와 의병장 곽재우의 대립적 갈등은 글의 마무리에서 귀결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뛰어난 공적을 세우고 출사하지 않은 곽재우를 보고 “방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 곽재우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던 까닭을 국난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배후인 당파 싸움에 전전하는 조정의 그릇됨에서 찾고 있다. 나랏일을 해야 할 곳에서 모함과 배반을 일삼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유교적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동시에 모함과 증오가 있는 길에 뜻과 정신을 두지 않은 곽재우의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에서 가장 큰 갈등 대립적 요소인 왜적을 두고 내부적인 갈등의 요소를 심어 두고 있다. 그것은 조선 조정의 부패와 관리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내부적 갈등 대립적 요소는 향토를 사랑하는 애국적 충절의 모범을 보이는 곽재우의 행적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반면, 지배 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곽재우의 모습을 통해 민중들은 지배 세력과 왜적에게 대항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을 통해서 인민들에게 애국 사상을 바탕으로 진보적인 계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3. 곽재우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주요 전투 묘사
-윤세평의 「곽재우」

북한 정권 수립기에는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민족문화 유산 보호 정책을 진행했으며 전후복구 시기에는 고전작가와 고전문학 사료에 관한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는 전쟁으로 흩어졌던 인민들의 민심을 한데 뭉치기 위해서 애국적인 영웅상이 절실히 필요했다. 게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스탈린 사망이라는 북소관계의 변화는 북한 내부에서 체제 위기로 이어졌다. 이러한 1950년대 북한 사회 위기 극복 전략으로 ‘임진왜란’21)을 활용한 것이다.22) 이 무렵, 발간된 윤세평의 『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은 청소년들에게 ‘임진왜란’ 속에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계몽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23) 본 연구에서 다룰 ‘곽재우 서사’는 윤세평의 『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 속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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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북한은 전쟁시기부터 임진왜란(1592-1597)임진조국 전쟁이라고 칭하며. 1952413로동신문임진조국 전쟁 360주년 특집기사를 기획한다. 이것은 임진조국 전쟁의 의미를 새기면서 민족 영웅 이순신을 비롯한 의병운동, 육전 승리, 여성들의 애국적 형상, 중국군의 도움 등 부각하여 한국전쟁의 승리와 인민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22)김봉희, 앞의 글, 254.

23)윤세평의 임진록은 윤세평의 글과 정현웅의 그림으로 엮어진 책이다. 이 책의 짜임을 살펴보면 일본의 정세나 목적, 조선 조정의 자세 등을 모두 생략한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항전의 기록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인물이 등장하지만, 차례에 열거해 있는 인물들은 승리의 항전을 기록한 인물들을 펼쳐 놓고 있다. 게다가 한 인물 편이 끝나면 사람 이름이나 관직명 청소년들이 어려워하는 낱말에 대한 를 달아 놓아 백과사전식 구성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책 머리말에서도 청소년을 위한 계몽서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간행하는 임진록은 특히 오늘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고전 임진록의 내용을 살리면서 또한 임진 조국 전쟁의 력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히 씌여졌다는 것을 밝혀둔다. 윤세평, 머리말, 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 3.

 

1) 전란의 시작과 끝 전투를 통한 항전의 역사성 강조

월북작가 윤세평은 월북 직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국’과 ‘민주조선사’를 거쳐 1954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조선문학 강좌장’을 맡으면서 옛 소설 주해서와 고전문학 연구서를 펴냈다. 그의 고전문학 연구는 옛 소설에서 인물, 역사에 이르기까지 두터운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유독 ‘임진왜란’에 관한 애국적 형상을 담은 글이나 비평을 많이 싣고 있다.24) 1955년에 『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을 출간하게 되는데, 『임진록』 이본을 선택적 수용 배치하여 ‘임진왜란’에 관한 애국적 형상화에 뒷받침하였다. 그 가운데 승병을 일으킨 ‘사명당’을 제외한 의병장으로 ‘정문부, 곽재우, 김덕령, 권률’을 선택했다. 특히, 곽재우는 역사적 전투를 중심으로 해서 곽재우가 활약한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인 ‘정암진’전투와 그가 치룬 정유재란의 끝 전투인 창녕 ‘화왕산성’전투를 자세히 묘사해 놓고 있다.

윤세평의 「곽재우」서사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곽재우는 의령 사람, 곽월의 아들이다. 곽재우는 도량이 넓어서 그의 집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며 그 가운데 인재들이 많았다.

②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조선에서 노략질하자 곽재우는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가산을 풀어 군사를 모으고 자신의 처자들 옷을 풀어 군사와 그의 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심대승을 비롯한 십 명의 장졸들과 생사를 맹세하며 왜적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기강에서 세미 1천으로 군량미로 쓰고 사창의 곡식을 풀어 기민에게 주었다.

③ 왜장 안국사가 정진 나루를 건너기 위해 옅은 목에 표목을 세운 것을 재우는 부하를 시켜 깊은 물에 표목을 고쳐 세웠다. 그리고 물목에다 복병을 대기시켰다. 이튿날 낮에는 성안에 지키고 있다 저녁에 패한 척 달아나다가 수풀 속 복병이 급속하여 물리쳤다.

④ 곽재우 의병 부대의 승리로 의령, 초계뿐만 아니라 삼가, 합천 고을 군사로 대부대를 이루게 되었다. 백성들은 평일 같이 농사를 지으며 군량미를 조달해 주었다.

⑤ 왜적은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난 곽재우를 천강 홍의장군이라고 불렀으며 그를 ‘신장’이라며 두려워했다. 곽재우의 전술에 능했다. 짚으로 가짜 군사 만들기, 나팔을 잘 부는 군사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왜적이 동요하면 나팔을 불게하고 복병을 내달아 치게 하였다.

⑥ 정유년(1597년) 가을 창녕 화왕산성으로 왜장 하라북이 대부대를 이끌고 옴. 성을 지키다 왜적이 산성에 닿으려고 하면 붉은 옷을 입고 큰소리로 위협하였다. 왜적은 신병이 온 줄 알고 하왕산 북쪽으로 도망갔다. 그 뒤에도 왜적은 하왕산을 함락하지 못했다.

윤세평의 「곽재우」 서사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역사적 기록에 의한 전개를 이끌고 있다. 곽재우의 ①출신과 ②가산을 털어 의병을 기병하고 곡식 창고를 풀어 군량으로 사용한 점은 문헌 설화에서 기술한 내용과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③정진 전투와 승리 ④그로 인한 의령, 초계, 합천 세 고을을 지켜낸 일, ⑤곽재우에 대한 왜적들의 두려움을 ‘천강홍의장군’과 ‘신장’의 서사로 기술한 것도 역사적 기록에 따른 것이다. 마지막 ⑥에서도 정유재란 당시 곽재우가 ‘경상도 방어사’라는 관군장이 되어 ‘화왕산 전투’에 임한 점 역시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25) 물론, 첫 서사 부분에서 곽재우는 “도량이 넓어” 집안에 “재주 많은 인재”들이 몰려왔다는 것은 사실적 기록임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성품과 집안에 인재들이 드나들었다는 점은 다음 서사인 ‘의병 기병’과 연결하기 위한 서사적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윤세평의 「곽재우」 서사 구성을 토대로 내용적인 면을 살펴보면 곽재우의 의병 활동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사실상 ②에서부터 ⑤까지의 내용이 그의 의병 활동에 기인한 서사 부분이다. ②에서는 의병 기병과 더불어 민중들로 구성된 군사들을 아끼는 곽재우의 의병장으로서 품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가산뿐만 아니라 자신과 처자의 옷을 벗어 군사와 그 가족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나라의 세금을 헐어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게다가 곡식 창고를 열어 전쟁에 헐벗은 기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러한 곽재우의 행적들은 민중으로 구성된 의병들의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은 ④ ‘정진 전투’다.

왜장 안국사가 낮에 미리 정진강의 깊고 옅은 곳을 살핀 후에 옅은 여울목에다 표목을 세우게 하였다. 이를 탐지한 곽재우는 왜적이 세워둔 표목을 옮겨다 깊은 골목에다 고쳐 세우고 좌우에다 복병을 시켜 대기하였더니 과연 안국사의 군사의 군사 밤에 정진강을 건너다가 모두 깊은 물에 빠져 크게 혼란에 빠졌다. 용정 수십 명을 뽑아 좌편 산’골에 매복시키고 기다리게 하였다.

이튿날 왜장 안국사는 낮에 정진강을 건너 바로 곽재우의 진을 향하여 몰려왔다. -(줄임)- 곽재우는 석양이 되어서야 겨우 진문을 열고 왜적과의 싸움을 걸고 거짓 패하는 체하여 달아났다. 안국사의 군사 급히 곽재우의 군사를 뒤따르니 곽재우 돌아서며 왜적과 싸우다가 또 패하는 체하여 달아났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차 -(줄임)- 곽재우를 쫓던 왜적이 산’골에 들어섰을 때 문득 수풀 사이로부터 난데없는 함성이 일어나며 좌우에서 복병이 내달아 급히 치니 안국사의 군사 불의의 습격을 만나 크게 패하고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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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현재, 한국 학계에서 정리한(박태일, 재북시기 윤세평 문헌지, 근대서지14, 근대서지학회, 2016) 윤세평의 임진왜란을 다룬 글은 다음과 같다. ①「리순신 장군, 청년생활2, 민주청년사, 1950. ②「임진조국전쟁 시기에 발휘된 녀성들의 애국 지성, 로동신문, 로동신문사, 1952. 4. 13. ③「문학작품을 통하여 본 임진조국전쟁 시기의 애국적 형상들, 인민4, 민주청년사, 1952. ④「고전문학에 반영된 조선 녀성의 도덕적 품성, 조선녀성3월호, 근로단체출판사, 1955. ⑤「력사상 나타난 조선 녀성들의 도덕적 품성, 조선녀성4월호, 근로단체출판사, 1955. ⑥『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

25)고전소설 임진록의 이본에서 모두에서 곽재우 서사를 싣고 있지 않다. 국립도서관 한문본에서는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에서 왜국 안국사를 물리치는 역사적 바탕으로 해서 그려 놓고 있다. 경판본에서는 곽재우의 지략을 통해 왜적을 물리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계열에 있는 이본에서는 역사적 사실성에 의존하여 문헌 설화의 영향으로 기술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관운장 계열에서는 역사적 사실성과 거리가 멀다. 곽재우를 패배자로 그려 놓는다. 이것은 신립의 이야기가 와전된 경우이다. 따라서 윤세평의 곽재우(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에서는 역사적인 기록에다 약간의 설화적 양상이 덧보태졌다.

26)윤세평, 곽재우, 임진록, 민주청년사, 1955. 62-63.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리던 조선 군대는 연신 왜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때, 임진년 5월 초순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정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관군이 할 수 없었던 승리를 민중으로 뭉쳐진 의병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 의병장 곽재우의 전략과 전술이 돋보였다.27) 곽재우는 정진강 여울 목 얕은 곳에 왜적이 표시한 푯말을 깊은 곳에 다시 꽂고 복병을 대기 시켰다.28) 이 글에서는 다음날 전황까지 싣고 있는데 다시 쳐들어온 안국사와 그의 부대에 대항하여 낮에는 성문을 굳게 지키고, 저녁이 돼서야 왜적과 싸우다가 패한 척 도망가기를 10여 차례 반복하여 달아났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 나중에 복병으로 물리치는 전투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정진 전투’가 극심하고 치열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한편 치열한 상황에서 얻은 승리는 더욱 값진 결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정진 전투 이후, 의령을 비롯한 초계, 삼가, 합천 세 고을이 안정화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농사지은 쌀로 군량미에 보탰다. 이 서사가 삽입된 까닭은 비록 곽재우 의병 부대의 뛰어난 활약이 있었지만, 민중들의 단합된 정신도 승리에 기인했음을 밝혀두기 위해서다. 이렇듯 정진 전투의 승리 이후 곽재우는 ‘천강홍의장군’ 서사와 ‘신장’이라는 서사를 획득하게 된다. 마지막 서사는 역사적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정유재란으로 건너간다. 곽재우의 마지막 전투인 창녕 ‘화왕산’ 전투를 그려 놓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곽재우는 방어사라는 벼슬을 받아 관군장이 되어 있었다. 왜적은 무서운 기세로 화왕산성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곽재우의 군사는 왜적의 수효가 너무도 많음을 보고 모두 겁을 먹게 되고 퇴각하기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곽재우는 왜적이 산성에 박두한 것을 보고도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만일 왜적이 진정으로 병술을 안다면 어찌 경솔하게 이곳을 침범하리요?”

하고 웃으며 성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곽재우는 왜적이 산성에 다달으자 비장 안택형을 시켜서 붉은 옷을 입고 조수 밀리듯 몰려오는 적병을 향하여 큰 소리로 웨치게 하였다.

“너이들은 감히 어데 들어오느뇨?”

그의 고함 소리는 앞뒤 좌우에 있는 산을 흔들어 봉우리마다 같은 소리가 울려 왔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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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실제, 윤세평는 그의 책 임진록에서 곽재우서사를 다루고 난 다음 를 달아 놓았는데, 곽재우에 대한 작가 윤세평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곽재우에 관한 주는 아래와 같다. 곽재우=임진 조국전쟁 시기 의병장으로서 가장 뛰어난 전략가의 한 사람이다. 또한, 량반 통치 계급 내부의 당파 싸움을 론죄한 사람이며 나종에 혐의를 받아 역적으로까지 몰리여 투옥되였으나 석방되여 세상을 숨어 지냈다. 윤세평, 앞의 글, 67.

28)정진 전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집(忘憂集)』의 부록 「용사별록(龍蛇別錄)」에서는 “건조한 곳에 나무 깃발을 달아 표시 -(줄임)- 그 깃발을 달아둔 나무를 빼어 수렁에 옮겨” 두고 군사들을 잠복하게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는 왜군이 정진 강을 넘기 위해 마른 땅에 꽂은 ‘나무 막대기’로 기록되어 있다. 비지류에는 정진 전투에 매복만 강조하고 있다.

29)윤세평, 앞의 글, 66쪽.

 

정유재란 ‘창녕 화왕산’ 전투는 앞선 임진년에 ‘정진 전투’에 비해 간단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는 특별한 전략 전술보다는 왜적에게 무섭게 호통을 치는 경우이다. 이 부분은 영웅적, 이인異人적인 부분이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30) 부하 장군 ‘안택령에게 붉은 옷을 입고 적병을 향해 외치는’ 서사가 삽입되었다.31) 실제 정유재란에 조선인이 입은 피해는 극심했다. 왜군의 무도함이 극렬하게 치를 떨게 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북한의 전후복구시기에서는 ‘임진왜란’은 관민들이 모두 합심하여 항전한 정의의 전쟁임을 공고히 했다. 인용 글에서도 험난하고 어려운 전황이었지만 곽재우의 기개와 용기로서 물리쳤음을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윤세평의 「곽재우」에서는 초기 의병 정진 전투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 창녕 ‘화왕산’ 전투까지 담아내고 있다. 그 가운데서 곽재우의 뛰어난 전술 전략과 담대한 영웅적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간단하지만 곽재우의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까지 묘사해 두는 것은 우리 민족이 왜적에게 끝까지 합심하여 항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내 조선이 이길 수밖에 없는 정황을 만들어 놓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청소년들에게 ‘곽재우’의 서사는 의병장으로 활약할 때나 관군이 되어 전투에 임할 때 한결같은 애국적 충절을 보여주면서 전쟁의 마지막까지 왜적에게 대항하는 항전의 역사성을 심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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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망우집(忘憂集)』의 부록 「용사별록(龍蛇別錄)」에서는 실제 왜군의 적세가 강해 군사들이 두려움에 동요를 하였지만, 곽재우는 요지부동하였다. 왜적은 곽재우 부대의 정제함을 보고 물러나고, 곽재우는 물러나는 적을 공격하였다. 구원 정해군이 오자 왜군은 화왕성 북쪽으로 후퇴했다고 전하고 있다. 배대유의 전(傳)에서는 왜적의 대군을 보고 동요를 하고 두려움에 떨자 명령을 어기는 자는 참수하고 섶을 불살라 죽음으로 성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왜적은 하루 밤낮을 지내니 물러났다고 전한다. 비지류에서는 ‘화왕산 전투’에서 군사들의 동요를 크게 다루면서 곽재우의 충절 어린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한편, 민중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곽재우의 영웅적 노래의 의미가 『개벽』(제34호, 1923.4.1) ‘경남잡화-영산의 승전가’에 실려져 있다. “영산에서 줄다리기를 하든지, 각력(角力)을 하든지 승전할 시에는 승전하는 편에서 “오왜승전아, 오왜승전아”를 부르고 돌아다닌다. 이것은 임진란에 곽망우당이 창녕 화왕산성에 의지하여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고 부르던 승전가(勝戰歌)인데, ‘오왜’라고 함은 왜를 무찔렀다는 의미이다.”

31)『임진록』 고려대 한문본의 ‘화왕산 전투’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2) 반외세 대항과 자주적 승리

곽재우는 역사상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서 최초의 의병장으로 나라를 지키고 승리를 이끄는 장군이다. 한편,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지방 수령 방백을 향해서 격문을 보내어 참수하겠다고 외쳤으며 군왕에게도 목숨을 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곽재우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군들의 행보와 달리 ‘벽곡생식’을 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것은 탁월한 현실 인식의 능력을 갖춘 곽재우가 국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삶의 방식을 취했기32)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지방 수령들과 마찰이 잦았으며 임진왜란 전투 수행에서도 다른 장군들과 견해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세평의 「곽재우」에서는 내부적인 마찰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오로지 조선을 획책하는 ‘왜적’에게 집중하고 있다.

왜적이 쳐들어와 경상도 일대를 풀 베듯 하는데33)

인용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곽재우의 ‘의병 봉기’의 가장 큰 원인을 조선에서 무고한 민중에게 노략질하는 ‘왜적’에게 두고 있다. 물론, 왜적이 쳐들어오자마자 관리들이 먼저 도망가고 민중들이 혼란에 빠지는 상황도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반외세의 침입과 노략질로 인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애국 충절이 비롯된 것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집忘憂集』 의 부록 「용사별록龍蛇別錄」과 「전傳」, 필기인 『용사일기龍蛇日記』 와 『난중잡록亂中雜錄』 의 서사에는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곽재우의 의병 봉기를 왜적의 조선 유린보다는 국난 속에서 산중으로 도망가는 지방 수령과 민심이 동요되는 과정에서 찾고 있다.34) 따라서 윤세평의 「곽재우」에서는 ‘의병 봉기’ 서사부터 반외세에 대항하는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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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곽정식, 「『곽재우전』과 『곽장군전』의 비교연구」, 『동양한문학연구』 제17집, 동양학문학회, 2003, 6쪽.

33)윤세평, 앞의 글, 61쪽.

34)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집(忘憂集)』의 부록 「용사별록(龍蛇別錄)」에서는 곽재우의 의병 기병 과정을 “당시에 초계(草溪) 군수 이유검이 김해성에서 성문을 잠그고 먼저 도망... 아전들과 백성들이 제멋대로 양식과 가구들을 가지고” 간 혼란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곧, “초계에는 주인이 없었다.”라고 하면서 그 땅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음을 기술하고 있다. 배대유의 「전(傳)」에서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칼을 잡고 먼저 일어나”라고 의병 기병을 알렸다. 임진왜란의 견문기록인 『용사일기(龍蛇日記)』와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도 조정 관리들이 깊은 산속으로 도망가서 제대로 교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을 나무라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윤세평의 「곽재우」에서 전투 서사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곽재우의 정진 전투 이전까지 조선 관군은 이렇다 할 승리의 전적을 이루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있었다. 임진왜란의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의 ‘정진 전투’는 의병의 승리이자 조선 민중의 승리였다. 이틀에 걸친 전투의 상세한 전황과 대응 전략 등이 실려져 있다. 왜장 안국사는 수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와서 정진강을 도강하려고 했다. 이때, 곽재우의 전술 작전이 펼쳐졌다. 첫째 날은 왜적을 정탐하여 얕은 여울에 세운 표목을 깊은 여울에 옮겨두고 수풀에 복병을 숨겨 두었다. 다음 날 패하고 돌아간 왜적은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곽재우 진까지 닿았으나 곽재우의 부대는 성문을 지키고 꼼짝하지도 않았다. 왜적들의 초조함을 이용한 것이었다.35) 저녁이 되어서 진문을 열고 전투하면서 패한 척 도망가기를 10여 차례 복병이 급습하여 왜적을 물리치게 되었다. 군사의 숫자가 열세인 곽재우의 부대가 꾀할 수 있는 전술이었으며 극적인 승리였다.

정유재란 당시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는 왜장 하라북을 위시로 밀물 닥치듯이 대부대가 몰려왔다. 그에 따라 곽재우의 부대는 두려움에 동요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부대를 보고 퇴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곽재우는 산성을 지키며 부하 안택령에게 “붉은 옷”을 입혀 왜적에게 호통을 치게 한다. 여기서 ‘붉은 옷’은 곽재우의 영웅적인 ‘천강홍의장군’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곽재우가 안택령을 선택한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를 통해 영웅의 상징성을 입혀 왜적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일종의 기만술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왜적은 화왕산에는 조선의 신병이 있는 줄 알고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갔다. 그 후에도 왜적은 화왕산을 정복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윤세평은 ‘곽재우’의 여러 전투 가운데 대표되는 전투, ‘정진 전투’와 창녕 ‘화왕산 전투’를 가져왔다. 이 전투들은 각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일어난 전투로 ‘임진왜란’이라고 총칭되는 7년간의 전쟁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고 있다. 곽재우의 위치도 달라져 있다. 정진 전투에서는 의병장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는 ‘방어사’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관군장이 되어 있다. 이것은 곽재우가 의병장이든 관군장이든 한결같은 애국적 충절로 군사들과 끝까지 반외세인 ‘왜적’과 항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또 한 가지 인용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전투에 대항하는 왜장의 이름이 ‘안국사, 하라북’36)이라고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곽재우와 조정 관리들의 마찰 대립적인 서사를 제외함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대립적이고 부정적인 반외세 세력 ‘왜적’에 항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세평의 「곽재우」에서 의병 기병의 주요 원인을 ‘왜적’에게 두고 그들에게 관군민이 합세하여 항전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게다가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 곽재우의 위치, 왜장의 이름, 전황과 대응 전술 묘사를 통해 반외세와 맞서 싸운 구체적인 승리라는 역사성을 확보해두고 있다. 특히, 임진년에 일어난 ‘정진 전투’의 서사를 확대 강조한 것은 단지 의병장 곽재우의 뛰어난 전략·전술만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뭉친 민중들의 승리이며 자주적 승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윤세평 「곽재우」의 서사 전략은 북한 청소년들에게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곽재우의 애국적 충절을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반외세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자주적 승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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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곽재우는 진문을 닫고 조곰도 요동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안국사 그의 부하를 시켜서 싸움을 걸고져 욕설을 퍼부어 마지않았다.” 윤세평, 앞의 글, 63쪽.

36)대부분 곽재우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나 문헌 설화에서 정진 전투의 왜장은 안국사로 왜의 승려임을 드러나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왜장은 대부분 가등청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윤세평의 곽재우에서는 하라북이라는 왜장으로 기술되고 있다. 사실, 가등청정은 임진년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붙잡아 선조에게 조선 영토 할양의 조건으로 교섭을 요구한 이다. 15977월 직산에서 마지막으로 명군과 전투를 한 후,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축성에만 전념했다. 이를 통해 1597년 가을에 창녕 화왕산 전투의 왜장은 가등청정이 아닐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4. 마무리

북한은 고전 문화유산을 비판적 수용이라는 입장에서 인민 대중의 협력을 꾀하며 정권 체제 유지를 단단히 해나갔다. 특히, 조선 민족의 국난극복이라는 경험을 다룬 ‘임진왜란’에 관한 고전문학은 인민들에게 항왜정신을 기반으로 한 애국적 영웅상을 구축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 가운데 글쓴이는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태풍』 제2권 1호, 태풍사, 1949)와 윤세평의 「곽재우」(『임진록』 , 민주청년사, 1955)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북한 문학에서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곽재우의 형상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논의된 내용을 요약하여 마무리로 삼는다.

첫째, 아을파의 「홍의장군 곽재우」를 통해서는 의병장 곽재우의 경상우도 서사를 통해 인민들에게 애국 사상을 바탕으로 한 진보적인 계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역사기록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의 환난-영웅의 출현-영웅의 위기-구원자의 조력-영웅의 위기-구원자의 조력-혁혁한 전적’으로 영웅담의 구조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 속에서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를 방어한 곽재우의 전투를 강조하면서 국난의 위기 속에서 위정자들과 다른 행보를 보여준 의병장 곽재우의 애국적 영웅성을 강조한다. 덧붙여 큰 갈등 대립적 요소인 왜적을 두고, 내부적인 갈등의 요소인 지배층 관리들과 대립을 통해 곽재우의 향토를 사랑하고 민중을 아끼는 계급의식 발현을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 윤세평의 「곽재우」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주요 전투를 묘사하여 곽재우의 애국적 충절을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반외세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자주적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곽재우’의 서사는 의병장으로 활약할 때나 관군이 되어 전투에 임할 때 한결같은 애국적 충절을 보여주면서 전쟁의 마지막까지 왜적에게 대항하는 항전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게다가 이 글에서는 곽재우의 의병 기병의 주요 원인을 ‘왜적’에 집중하여 반외세에 대항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와 더불어 북한 청소년들에게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 곽재우의 위치, 왜장의 이름, 전황과 대응 전술 묘사를 통해 반외세와 맞서 싸운 민중들의 승리라는 자긍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처럼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북한 문학에 나타난 곽재우 형상화 양상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민족문화 유산의 계승은 혁명문화와 결합을 의미한다. 특히, 북한의 정권 수립시기에는 고전문학에서도 사회주의 공산 체계 수립 위에서 가장 먼저 계급적인 인식 발현을 목적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곽재우’ 서사도 곽재우가 유학자인 동시에 봉건 양반사회 지배계급임에도 의병장의 뛰어난 면모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사랑하고 지배 관료들과 마찰 대립을 통한 계급적 의식 발현된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전쟁기를 거치면서 북한 사회에서는 ‘임진왜란’을 조선 민중이 항전한 ‘조국 방위 전쟁, 정의의 전쟁, 승리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임진조국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후복구시기에 나타난 ‘곽재우’에 관한 서사에 강조된 사실은 ‘반외세에 항전하는 승리의 전투’이다. 그러한 승리를 이끄는 애국적 영웅 ‘곽재우’ 형상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곧, 임진조국전쟁을 한국전쟁과 결부하여 애국적 영웅과 인민들이 반외세 사상으로 항전하며 자주적 승리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본 연구를 토대로 북한의 원전 발굴을 통해 ‘곽재우’ 서사의 수용 양상을 비롯해 ‘임진왜란’의 수용과 관점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도움글

1. 1차 문헌

아을파, 「홍의장군 곽재우」, 『태풍』 제2권 1호, 태풍사, 1948. 12.
윤세평, 『임진록』 , 민주청년사, 1955.
홍만종, 『해동이적海東異蹟』 , 경인문화사, 2011.
홍우흠, 『국역 망우선생문집』 , 한국무속박물관출판부, 1996.

2. 2차 문헌

강문식, 「실록을 통해 본 곽재우의 의병활동」, 『규장각』 3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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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식, 「망우당설화에서 본 사실과 허구의 관련 양상」, 『한국문학논총』 제35집, 한국문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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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정, 『임진록 연구』 , 도서출판 박이정, 2003.

<계속> ☞ [붙임1 - 「홍의장군 곽재우」 / 아을파], [붙임2 - 「곽재우」 / 윤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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