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홀 개념도. 출처 : curiosity.com
웜홀은 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있는 기묘한 그림자를 만든다!
인도 타타기초연구센터의 라지불 사이크(Rajibul Shaikh) 박사는 최근 출판 전 공개 사이트 arXive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특정 타입의 회전 웜홀(rotating wormhole)이 블랙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뒤틀린 그림자를 형성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웜홀이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면 그 그림자는 다소 찌부러지는 데 반해 블랙홀의 그림자는 디스크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사이크 박사는 설명했다. 따라서 이들 그림자 관측을 통해 블랙홀인지, 웜홀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사이크 박사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과 설명을 하는 걸까?
세계 천문학계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포착하기 위해 현재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라는 국제협력 프로젝트를 가동 중에 있다. 천문학계는 전 세계 전파망원경을 연결해 사실상 지구 크기의 망원경을 만들어 블랙홀의 그림자를 관측하는 것이다.
마침내 천문학자들은 지난해 모은 첫 데이터 묶음을 분석하고 있다. 사이크 박사의 논문은 바로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이다.
웜홀 그림자는 광자가 웜홈에 빨려들어가고 난 뒤 남긴 어둡고 둥근 공동(void)을 말한다. 이 그림자는 우리은하 중심의 초질량 블랙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그림자는 매우 희미하기 때문에 직접 관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 프로젝트의 첫 성과라고 할 만하다.
이번에 사이크 박사가 직접 웜홀의 그림자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이 모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천문학자들이 웜홀 그림자를 원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웜홀의 관측 방법을 연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웜홀의 존재를 어느 정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사이크 박사는 “우리가 웜홀 그림자를 관측한다면 안정된 웜홀이 존재할 수 없다는 현대 물리학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웜홀은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초공간상의 터널이다. 칼 세이건 원작의 영화 ‘콘택트’와 201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킵 손이 자문한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했다. 그렇다고 웜홀이 완전히 공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사실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된 지 80년이 넘었다.
블랙홀과 마찬가지로 웜홀도 일반상대성이론에 바탕을 둔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지 석달 만에 칼 슈바르츠쉴트가 중력장 방정식(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풀어 블랙홀(나중에 명명됨)을 예언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말도 안 된다’며 무시했다.
그러던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한지 2년 후인 1935년 제자 네이던 로젠과 함께 ‘아인슈타인-로젠 브릿지(Einstein-Rosen Bridge)’를 발표했다. 이 아인슈타인-로젠 브릿지가 바로 웜홀이다. 블랙홀 두 개의 특이점이 연결되어 생긴다. 순전히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 방정식에서 유도된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아인슈타인은 웜홀을 본격 연구하지 않았다.
웜홀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반세기 후 본격화되었다. 바로 중력파 연구로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킵 손에 의해서다. 킵 손이 웜홀을 연구한 계기와 내용은 그의 대표작 ‘블랙홀과 시간여행-아인슈타인의 찬란한 유산’에 잘 서술되어 있다.
킵 손은 1985년 어느 날 절친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전화를 받는다. 내용인 즉, “인류와 외계 문명과의 첫 번째 조우를 그린 소설을 완성했는데, 물리학적으로 타당한 지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다.
킵 손이 2주 후 배달된 소설 초고를 읽어보니 우주선을 타고 26광년 거리의 베가성에 갔다오는데 블랙홀을 통과하는 내용이 있었다. 잘 알다시피 블랙홀에 들어갔다가 온전하게 나올 수는 없다. 킵 손은 블랙홀 대신 웜홀로 수정해준다.
킵 손은 이 과정에서 웜홀의 물리학적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웜홀은 아인슈타인-로젠 브릿지가 말해주듯 중력장 방정식에서 유도된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킵 손이 검토해보니 웜홀은 생기자마자 파괴되어 버린다. 웜홀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중력 작용을 하는 이상 물질(exotic matter)을 흘려보내야만 한다. 이상 물질은 음의 평균에너지 밀도를 가져야 하는데, 일단 이 물질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킵 손은 다시 이상 물질이 우주상에 존재하는지를 검토했다. 확률은 낮지만 존재할 수 있다는 계산을 얻었다. 그래서 칼 세이건한테 웜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이상 물질을 발견하고 이를 웜홀을 열어놓는 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킵 손은 ‘무한히 발전된 문명’이라는 가정 아래, 웜홀을 만들고, 이상 물질을 통해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이상 물질의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바로 전자기장의 진공요동이라고 제안했다.
킵 손은 또 이 같은 웜홀을 통해 시간여행이 가능함을 보였다. 물론 웜홀을 만든 시점보다 과거로는 갈 수 없지만.
하지만 추가적인 검토 끝에 웜홀 타임머신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0년 킵 손은 박사후 과정에 있던 김성원(이화여대 교수)과 계산한 결과 진공요동 광선이 웜홀을 파괴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앞서 스티븐 호킹도 이러한 견해를 밝혔다.
1990년대 스티븐 호킹과 킵 손의 웜홀 타임머신에 대한 한시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모든 타임머신은 사람들이 그것을 작동시키려는 바로 그 순간 순환하는 진공요동에 의해 스스로 파괴될 것이다.’
킵 손은 이런 결론을 내리면서도 약간의 여지를 두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이 양자중력의 법칙을 깊이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 없다’.
ER=EPR 개념도. 출처 : Nature
최근 들어 킵 손이 남겨둔 여지가 현실화되었다. 2013년 레너드 서스킨드와 후안 말다세나가 ER=EPR라는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이 방정식은 웜홀(아인슈타인-로젠 브릿지)이 바로 두 블랙홀이 양자 얽힘에 의해 연결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EPR(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은 당초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논증한 논문인데, 결과적으로 약 반세기 후 실험에 의해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을 확인해주었다.
양자 얽힘은 시간이 지나도 유지된다. 따라서 ER=EPR 이론이 맞다면 킵 손의 훰홀은 양자적 진공요동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적 얽힘에 의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웜홀이 물리적 실체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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