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동천과 십리벚꽃(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쌍계사) 전경. 출처: 픽사베이(sapiago156)
조국 민정수석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¹⁾
“세상은 사람이 바꾸는 것인데, 사람은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잡한 동물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이성적 판단으로 시작하기보다는 감성적 느낌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은 네 가지 유형이 아닐까 싶다.
첫째는 나와 생각도 같고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다. 둘째는 나와 생각은 같은데 인간적으로 싫은 사람이다. 셋째는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다. 넷째는 나와 생각도 다르고 인간적으로도 싫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진보라고 하는데 왠지 싫은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왠지 좋은 사람이 내 주변에 몇몇 있다. 인간관계가 진보냐 보수냐, 로 딱 잘라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인 사람들 가운데 부모님 역시 기본 성향이 진보적인 분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 부모님에게 이성적인 설교를 한다고 성향이 바뀔까? 설득과 공감은 감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이념이 닮은 사람을 만나면 바로 연애를 하고 싶어질까? 단순히 이념으로 사람을 나누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바야흐로 벚꽃 철이다. 매년 이때쯤이면 하동읍에서 쌍계사까지 찻길은 미어터진다. 요즘 벚꽃 길 좋은 데가 어디 한두 군데일까만, 화개장터와 ‘십리벚꽃’ 이름값 덕분이리라. 어느 지자체 없이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익히 안다. 그러나 관광객과 맞상대할 일이 없는 그 지역의 대다수 주민들은 어쩜 벚꽃 철이 애물단지이다. 긴급한 환자라도 생기면 찻길이 꽉 막혔으니 낭패가 이만저만 아닐 수도 있다. 꽃구경 온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가는 지폐 몇 장이 돌고 돌아 자신들의 호주머니에도 들어온다고들 하지만······.
땀을 흘리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관광지나 경승지를 ‘바보들의 천국’(fools' paradise)이라는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건 ‘머리’ 쪽의 반응이고, 가슴은 만개한 벚꽃 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풀어 오른다. 그 벚꽃 길을 걷고 싶다. 토박이로서 교통 사정을 잘 아니 천상 ‘요루 하나미’(よる はなみ·밤 벚꽃 구경)를 해야 한다.
같이 즐길 친구가 필요하다. 자연을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삶의 깊이가 지극한 사람이다. 감히 그에 미치지를 못한다. 하여 나는 ‘바보’와 ‘깊은 사람’의 어중간이다.
A는 ‘불씨’이다. 즐겨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말을 한다. 한때 민주투사였다. 단과대 회장으로서 전두환 정권 퇴진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군수, 도의원, 군의원 등 각종 선거에서 연거푸 실패한 후 영락했다. 그래도 입으로는 항상 의기양양하다.
소방서 표어가 아니다. 퇴락한 자신이 언젠가 대형 산불 후의 남은 불씨처럼 다시 피어나 다른 산까지 다 태울 불씨와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꺼져 있지만, 결코 자신은 죽지는 않은 불씨라는 말이다. 비록 낙백했을망정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 일이 더러 있다. 하여 아직도 그에게 술을 사는 선후배가 있다. 나도 제발 불씨이길 바라며 술을 사는 친구 축에 든다. 부채감 때문이다. 지금 촛불 혁명의 밑돌은 저들의 학생 운동이 불씨였다고 판단한다. 나는 어떤 사정에서였건 학생운동을 하지 못했다. 부채감, 깊다.
A가 자기 밭에다 마을 정자를 지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무던히도 얻어먹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을에 적당한 터를 물색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마을과 한참 떨어진 곳의 정자는 숫제 자신만의 쉼터일 뿐이다. 정자를 이용할 마을 어른들은 70대 이상이다. 가풀막은 고사하고 평평한 길도 몇 백보 이상 떨어져 있는 정자는 쉴 곳이 아니라 그냥 그림일 뿐이다.
‘이젠 불씨가 완전히 꺼져 남은 재도 바람에 다 날려 가버렸다’, 는 내 말에 ‘마을에 정자를 내가 유치한 거다. 부지 찾다가 어영부영 세월 보내버리면, 정자 지을 자금은 군청으로 반납해야 한다. 이왕 버릴 돈, 내 밭에라도 지었으니 된 것 아니야. 가끔 놀다 가는 사람도 있어’, 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정자를 못 지더라도 그 자금으로 다른 마을 복지 시설을 지을 수 있잖아. 나라 돈이 공돈은 아닌 걸 네가 더 잘 알 테고. 누가 봐도 마을 정자가 아니고 개인 정자로 보겠다,’는 내 말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먼저 일어서 버렸다.
B는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당원이다. 새누리당일 때는 면 지역 당협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었다. 30대일 때는 농민회 운동도 활발히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데 무슨 영문인지 한나라당 당원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로서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잘 지내는 사이이다. 물론 이 친구는 졸업 후 군 생활을 빼고는 객지 생활을 한 적이 없다.
객지에 있을 때도 고향에 오면 이 친구부터 찾았다. 어쨌거나 줄곧 서로 존중해 주는 터수다. 내가 10여 년 전 내가 막 귀향했을 때는 팔순 노모를 알뜰히 모시고 있었다. 타향살이하는 위로 두 분 형님을 대신해 아무 불평 없이 노모 거두는 모습이 참 믿음직스러웠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줄곧 농사만 지었다. 농사만으로 위로 딸 둘은 지방대를 보냈고, 외동아들은 대학을 서울로 보냈다. 시골서 쉽지 않은 일이다.
달포 전 B의 비닐하우스에 들렀다. 먼 동네이나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면 여러 코스 중 한 코스는 그곳을 지나기도 한다. 비닐하우스 바깥, 비닐하우스 동棟 사이에 새 풀이 파릇파릇 돋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봄이 오려나 보다. 저 풀들 색깔 참 곱다’ 고 그냥 감상을 풀었다.
“날이 풀리면 좋긴 한데, 저런 풀을 보면 난 겁부터 먼저 나. 저걸 처치해야 하는데 좁은 공간이라 기계를 사용할 수도 없어. 또 비닐하우스 작물에 약해藥害가 가지 않아야 하니 제초제를 뿌릴 수도 없거든. 일일이 손으로 제거해야 하는데, 좀 힘든 게 아니야.”
어이쿠, 백수가 신세 좋다는 타령을 한 셈이구나 싶어, 뜨끔했다. 여러 동 중심 비닐하우스에는 20여 평을 할애해 작업 겸 휴게 공간이 있다. 딸기를 선별해 상자에 담기도 하고 옆의 테이블에서는 식사도 할 수 있다. B와 커피믹스를 마셨다. 친구 아내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선별하고 있던 딸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저런 데 쓸 신문지가 널브러져 있다. 주로 농민신문과 군 지역신문지였다. 광고란에 큰 인물사진이 보였다.
“꼴랑 단위농협 상임이사가 그렇게 큰 자리가? 댓 군데나 축하 광고가 실렸던데.” 내가 정말 알고 싶어 B에게 물었다. 나도 군 지역신문 정기구독자다. “크기는. 형식이는 우리 중학교 동기인데, 형식이 친구가 신문사에 있으니 광고 좀 내 주라고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었대. 형식이가 자기 돈으로 하나 내고 우리 동기들이 돈을 거둬 나머지는 내줬어. 다 같이 더불어 먹고 살자는 일이다. 나쁘게 생각 안 해도 돼.”
내가 이런 추렴을 부탁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되잖은 일이라고 타박만 했을 것이다. ‘더불어 먹고 산다고?’ 가슴에 울림이 왔다. 이런 일은 B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동네에서 농로 문제로 옥신각신할 때였다. 이치상 옆집 농토가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옆집은 도통 땅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B가 자기 논을 내놓았다. 하여 지금 그 농로는 좀 굽어 있다. 넓어진 농로로 옆집도 B도 군말 없이 경운기며 트럭을 잘 운행하고 있다.
“마을에서 진보·보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상식과 몰상식이 있을 뿐이다. 마을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고, 자기의 유익만, 마을이야 어찌 되건 자기의 이익만 챙기려는 것이 바로 몰상식이다.”²⁾³⁾
십리벚꽃 길을 걷고 싶다. 화려함이 사나흘을 못 버티더라도 화려함 그 자체로서 생에 충실함이다. 그 길을 걸으며, 친구와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며 ‘와전옥쇄瓦全玉碎’를 곰곰 씹어봄도 살아있음의 보람, 아니겠는가!
B에게 전화를 했다. 비닐하우스 문 닫고 대충 씻고 출발하잔다. 저녁밥은 화개서 먹기로 하고. 나도 양말을 신었다. 모자 챙기고 운동화 신고 삽짝을 나섰다.
※1)조국,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다산북스, 2017), 202~203쪽. 2)남기업, 「마을엔 상식과 몰상식이 있을 뿐」, 『한겨레신문』, 2018년 3월 22일. 3)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수원의 한 아파트 동대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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