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자전거 사고(前篇)
덥다. 온도계를 보니 서재 안이 섭씨 35도다. 얼굴에 배어나오는 땀 닦은 것만으로도 수건이 물기로 추적추적하다. 오후 5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용케 버텼다. 이제 본격적으로 땀을 흘릴 요량이다. 자전거로 시간여 한 바퀴 돌면 제대로 땀투성이가 된다. 돌아와 마당에서 체조 한 번 하고 푸샵(push-up) 100여 회, 그리고 샤워 한 바탕. 그 시원함이란! 아는 사람만 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함을 버는 방법을.
세 갈래 코스 중 면 경계를 넘어 이웃 면 시냇물 가를 반환점으로 정하고 페달을 밟았다. 스치는 바람이 뙤약볕까지 떠안고 가는 듯하다. 러닝셔츠가 등줄기에 찰싹 달라붙고, 시야가 가릴 정도로 이마에서는 땀이 솟아 흘러내리지만 아무튼 시원하다. 물가 나무그늘에는 땀 들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네댓 명씩 평상 세 개를 차지하고 더러는 누워 있다.
“누군가 하고 보니 형님이네. 누가 이 한더위에 무식하게 자전거를 타나 했지. 형님, 이 더위에 자전거 타는 건 땡볕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한 3년 전 대처에서 시내버스 기사 생활을 접고 귀촌한 후배다. 도모하는 일상이 달라 자주 볼 일은 없지만, 만나면 반가운 사이이다. 시시풍덩한 이야기로 둘이 떠들어대자 주위는 쭈뼛쭈뼛해 한다. 남의 동네라 대충 안면은 있지만 대화를 할 터수는 못 된다. 후배가 상황을 파악하고 눈짓을 하며, 볼품은 없어도 집에 상사리(정자)를 하나 지었다며, 거기 가서 소주나 한 잔 하잔다.
작심 삼 일이라 했지. 술 마시지 않은 지 두 삼 일, 6일은 되었다. 도대체가 술이 싫다. 아직 마음은 장골이라 겁 없이 마신다. 두어 병은 기본이다. 이러니 취할 밖에. 그러니 마신 뒷날은 골골거린다. 만사가 귀찮아진다. 결과로 도저히 시간 관리가 안 된다. 그래서 술이 싫다고? 술 제 놈이 스스로 입에 들어오느냐, 아니지. 내 자신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일 뿐이지. 그래놓고 왜 술을 탓하는가! 술을 끊는다. 말을 바로해서 ‘술 마시고 싶은 마음’을 다스린다고 수없이 뇌까렸다. 한데 아직도 술이 일용하는 밥붙이 다음으로 자주 접하는 음식이다. 대체재가 필요하다.
술을 마시는 자 망하고, 차를 마시는 자 흥한다고 했던가. 어디선가 읽은 서산대사의 말이 생각난다. 술을 마시면 나라가 망하고, 차를 마시면 나라가 흥한다(飮酒亡國 飮茶興國)고 다산 선생이 말했다고들 하는데 이건 낭설일 뿐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여유당전서’ 전권을 보아도 이런 구절은 없다고 하니 낭설이라 해도 좋으리라. 더구나 음료 하나로 나라의 흥망을 얘기할 정도로 다산 선생이 어디 간단한 인물인가.
서산대사는 “계율의 그릇이 튼튼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빛난다.”고 하여 계율이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됨을 강조했다.¹⁾ 이뿐 아니라 불교 십계十戒 중 다섯 번째에 불음주계不飮酒戒가 있다. 그러므로 서산대사는 수행자의 청전본분淸淨本分을 잊지 않고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술과 차를 비유한 것이라 짐작한다.
야생차의 본향인 하동이 고향인지라 녹차든 발효차든 가깝다. 간혹 즐기기도 한다. 훌륭한 다인茶人도 몇몇 알고 지낸다. 이름에 값하는 다인들은 범상치 않은 인품을 언뜻 내비쳐 존경의 염까지 갖게 한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차를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부럽다’는 감정만 들게 했다. 좁은 소견으로 적어도 차는 여유란 단어와 짝을 이룬다. 경제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차를 즐긴다는 것은 난망이다. 경제적 여유야 자신의 수고 보람으로 돌릴 수 있다 쳐도, 마음의 여유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하 수상한 세월에 어찌 고즈늑한 다실에서 고고한 다향을 음미할 정도로 다인연茶人然하며 여유작작할 수 있단 말인가. 을들의, 병들의 외침에는 침묵하면서.
오해는 마시라. 차 한 잔의 여유, 얼마나 좋은가. 다만 술을 마시면 망하고, 차를 마시면 흥한다는 말을 체화한 사이비 다인을 경계할 뿐이라오. 그들의 차는 서산대사나 초의선사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다. 프랑스 제과점의 빵을 사서 먹는 것과 프랑스의 똘레랑스(tolérance·관용) 정신과는 아무 상관없듯이 말이다.
“형님, 비린내도 안 나고 안주로서 안 괜찮소? 빠가사리도 몇 마리 들었습니다.” 오전에 냇가에다 투망을 몇 번 던져 피라미며 붕어, 빠가사리(동자개)까지 제법 한 냄비거리를 잡아둔 모양이었다. 후배가 직접 손질하고 텃밭에서 고추, 호박을 따 썰어 넣는 등 부산하게 움직여 매운탕을 끓였다. 염천에 집으로 손님을 모시는 간 큰 남편이 어디 있으랴. 아내는 김치와 수저, 소주잔만 가져다주고 볼 일이 있다며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주 안주로서는 일품이다, 며 듣고 싶어 하는 공치사를 하며 호기 있게 한 잔 쭉 들이켰다. 쓰다. 역시 소주는 이 쓴 맛인가. 마음은 달다. 소싯적부터 이 후배는 날 대함이 남달랐다. 안다. 술이 고픈 게 아니라 친교를 돈독히 하고픈 심정에서 상사리와 매운탕과 소주를 빌미로 둘만의 자리를 만들었음을.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이런 지우知遇를 거절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자리는 다실이 아니라 소주판이 제격이지 않은가!
항상 2차가 문제이다. 둘이서 소주 3병을 비우면서 왁자하게 떠든 탓일까, 비닐하우스 일을 마친 그 동네 내 고등학교 동기가 들렀다. 털고 일어나야 할 자리에서 후래자後來者 덕분에 술자리는 원점에서 재출발을 하게 된 셈이다. 술기운은 평소 버릇을 불러냈다. 두세 번에 베어 먹던 잔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많은 이야기를 떠든 것 같은데 기억은 없다. 생각나는 것은 잡는 손 뿌리치고 휑하니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는 것이다. 그 순간의 작심만 뚜렷하게 기억한다. 차를 태워준다는 것을 거절한 것이다. 남편도 술을 마셔 운전할 수 없다. 천생 아내가 해야 한다. 여름날 손님으로 가뜩이나 폐를 끼쳤는데, 차 운전하게 하는 신세까지는 지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집까지는 10여 리이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른다. 오는 과정은 완전히 먹통이다. 힘들게 대문을 열고 십여 발짝 마당까지 당도해 자전거를 세울 때 비로소 기억은 재생된다. 찜찜하다. 마음이 아니라 얼굴에 끈끈한 액체가 흘러내리며 간질인다. 거울을 봤다. 피 칠갑이다. 마침 상비常備한 머큐로크롬은 있다. 핏물이 약물이 얼굴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흠씬 발랐다. 술김에 땅바닥에다 헤딩해 얼굴 갈아붙인 지가 대충 한 30년 됐나, 하며 잤다.<계속>
※1)김형중, 『詩로 읽는 서산대사』(밀알, 2000),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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