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너무 잦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하루걸러 비가 온다. ‘가을비는 떡비’라고도 하지만, 시기상조다. 논밭의 수확물을 갈무리한 연후에 비가 와야 떡을 해먹어도 해먹을 것 아닌가. 볏잎이 아직 푸르러 볏가을은 추석이 지나고도 한참 있어야 할 것 같고, 노란 물이 든 감도 아직 따가운 햇볕을 더 받아야 제맛이 들겠다. 지난여름은 모진 뙤약볕에다 가물었다. 하여 정작 우산은 양산 대용이었고, 철 어긋나게 가을 초입에 집 나올 때 우산을 받친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시골 노선버스는 느릿느릿, 아직 오지 않는다. 예정 시각을 10여 분이나 넘겼다. 누가 한 보따리를 안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구舊 이장이다. 삼이웃 간이나 데면데면한 사이이다. 수인사를 하고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비를 그으려 좁은 정류장 지붕 아래에 같이 있으니, 외면하고 멀뚱히 먼 산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무슨 보따리입니까?”
“고추, 읍내에 빻으러 간다네.”
“별 바쁜 일도 아닌데 굳이 비 오는 날 고생스럽게 읍내까지 나갑니까?”
“추석이 낼모레 아닌가베. 자식놈들 주려면 진즉에 빻아둬야지.”
늦기는 해도 오마고 한 버스는 기어이 온다. 내가 먼저 탔다. 요량이 있어서다. 3천원을 내고 500원을 거슬러 받았다. 차비가 1인당 1250원. 내가 구 이장 몫까지 지불한 것이다. 구 이장이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려는 것을 마다했다. 허 참, 이건 경우가 아닌데, 하면서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큰 놈, 작은 놈 하면서 자식 이야기를 했다. 70줄 나이의 부모들이 다 그렇듯, 자식들을 끔찍이 위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또 그 연배의 부모들은 마지막 말도 거의 꼭 같다. “자식들이 부모의 이런 공을 아는지 몰라.”
모르면 몰라도 아마 모를 것이다. 잡초 뽑고 갈아 두둑을 만들어 모종을 사다 심는다. 자라면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고추나무 옆에 지주를 박아 묶는다. 몇 번이나 농약을 친다. 모기 물려가며 붉은 고추를 딴다. 며칠이나 말린다. 그리고 이처럼 비 오는 날 읍내까지 나가 빻아 고춧가루로 만든다. 준비해 둔 통에 곱게 넣어 자식들에게 준다. 이런 수고와 정성을 자식들이 알까? 고추 한 근에 얼마인지를 알고, 그러면 부모가 준 고춧가루는 두세 근 분량, 한 오만 원쯤 되겠구나, 정도의 계산만 하지 않을까?
나 또한 몰랐다. 대처 생활을 할 때 어쩌다 들른 고향에서 엄마가 주는 고춧가루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냥 시장에서 기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양념일 뿐, 모친의 수고와 정성에까지 마음이 미친 적이 없었다. 돈은 숫자놀음이다. 숫자는 참 편리하지만 몰인간적沒人間的이다. 하여 숫자는 아주 편리하나 냉정하여, 정성이란 인간성이 스며들 여지를 박멸해 버린다.
너와 나 누구랄 것도 없이 어쩜 사람은 태생이 ‘죽어봐야 저승을 알’도록 생겨먹었는지 모른다. 나는 구 이장이 자식들이 자신의 정성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간곡한 바람을 표정에서 읽으면서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당신도 ‘연탄재를 함부로 찼지 않은가’.
우리는 돈이라는 숫자놀음에는 지극히 몰두하면서도 기본 산수算數에는 정말 취약하다.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는 고급 수학이다. 공자의 ‘내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가 훨씬 더 쉬운 산수이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는 바를 남에게 행하라, 고 중고생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자식도 부모에게 이 산수를 적용하지 못한다. 아마 부모들도 그들의 부모에게 그랬을 것이다.
부자간에 이러한데, 남한테야 오죽하랴. 언젠가 구 이장이 내 스승이다, 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글눈이 없다. 인쇄 매체와는 변소 밑씻개 인연밖에 없다. 그래서 용감하다. 내가 우편함에서 신문을 꺼낼 때 그가 내 집 앞을 지나갈 때가 있다. 텔레비전에 다 나오는데, 돈 들여 신문은 뭐 하러 보노, 하는 혼잣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감을 포장한다든지 택배용 박스 꾸리는 데 필요하다고 종종 신문지는 얻으러 온다. 하여 스승은 스승이되 반면교사인 것이다. 그럴 만한 일화도 있다.
10여 년 전 구 이장은 현직 이장으로서 군 전체 이장들의 모임인 ‘이장단’의 단장이었다. 이장단장으로서 의용소방대장도 겸임한 모양이었다. 한 날은 원고지 한 보따리를 보듬고 내 서재로 왔다. 소방서의 화재예방 행사의 하나로 초중생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그 심사를 부탁한다는 거였다. 새벽녘이었다. 마땅히 부탁할 데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일이 급박하게 되었다고 했다.
300편이 넘었다. 분량과 기한으로 봐 내 일을 제쳐놓고 본격적으로 달라붙어야 할 일감이었다. 이웃 인정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루 꼬박 걸려 초등부 중학생부를 나눠 장원, 차상, 차하를 뽑아 밤이 이슥해서 가져다주었다. 고맙다는 시늉을 했다. 그뿐이었다. 아니, 맨입은 안 되지 하며 보루로 사서 집에 두고 자기가 피는 담배를 두 갑을 건네주었다. 서글펐다. 노동의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다. 적어도 노동의 가치는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더 따져보고 이장의 입장에 서 보니, 내가 생각이 짧았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밑천이 하나도 안 들고, 땀도 안 나는 수월한 일인데 무슨 가치고 자시고가 있겠는가. 이장의 생각에는 말이다.
읍내 터미널에 내리니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구 이장은 고추 보따리를 안고서도 서둘러 빗속을 뚫고 시장통 방앗간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선배와 약속한 찻집으로 갔다.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까지 살갑게 맞았다. 평소 허리가 뻣뻣한 사람인데 왜 이러나, 좀은 의아스러웠다. 선배는 면장으로 정년퇴직했다. 명함을 내밀었다. ‘00 향토사 연구소. 소장 000’. 직함과 선배를 연결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네 한문 번역할 수 있나?”
“한자 몇 자 알 뿐, 한문 번역은 전문가 아니면 못하는 일입니다. 대체 무슨 한문을 번역하려 합니까?”
“『동국여지승람』에서 우리 지역에 관련 있는 것을 경상대학교에 가서 복사해 왔는데, 번역할 사람이 없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지역에 귀촌한 한문을 잘하는 박사가 있다던데, 혹 연결해 줄 수 없나? 서로 교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역에서 여러 면의 면장을 거쳐서인지 지역 정보에는 역시 밝았다. 물론 <한문학>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을 나는 잘 알고 있고, 교분도 두터운 편이다. 선배가 보여주는 복사본이 10여 쪽이나 되었다. 이 정도 분량이면 아무 일 안 하고 이 일에만 작정하고 매달려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다리를 놔 준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한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마음먹음에는 피카소의 에피소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블로 피카소가 해변 가로에서 초상화 데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보석 목걸이를 한 중년 여인이 다가와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피카소가 쓱싹쓱싹 5분 만에 데생을 완성하여 건네주면서 10달러를 요구했다. 그러자 중년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니, 5분에 10달러라니, 너무 많이 받는 것 아니에요?”
그러자 피카소는 정색을 하며 되레 20달러를 안 내면 그림을 안 주겠다고 했다. 중년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며 삿대질 직전이었다. 그러자 피카소는 점잖게 말했다.
“당신은 5분 걸렸다고 하지만, 나는 이 초상화를 그리는 데 50년이 걸렸소.”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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