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에는 인재를 얻으면 나라가 흥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하는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은 황금대¹⁾를 높이 쌓고 천하의 현명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연나라 부흥의 기회를 얻으려 했다. 그는 후한 예물로 재능 있는 이들을 초청하여 복수를 준비하고자 했다. 그래서 곽외郭隗를 찾아가 물었다.
“제나라는 우리 연나라의 내란을 틈타 습격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력이 미약하여 보복할 힘이 없습니다. 현명한 인재를 얻어 국사를 의논하고 장차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가장 큰 바람입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곽외가 대답했다. “황제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스승으로 삼고, 왕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친구로 삼으며, 패자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신하로 삼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망치는 군주는 비천한 소인배를 신하로 삼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방문해야 합니까?” 소왕이 묻자 곽외는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옛날에 금 천 냥을 주고 천리마를 사려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사지 못했지요. 어느 날 궁궐의 시종 한 명이 자신에게 천 냥을 주면 꼭 천리마를 사오겠노라고 아뢰었습니다. 왕은 쾌히 승낙하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돌아온 시종은 살아있는 천리마가 아닌 죽은 천리마를 가져왔습니다. 금 5백 냥을 주고 말뼈를 사온 겁니다. 크게 노한 왕이 시종에게 ‘내가 사오라고 한 건 산 말인데, 어찌 5백 냥이나 주고 죽은 말을 사왔느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에 시종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죽은 말도 기꺼이 5백 냥을 주고 사는데 하물며 산 말은 어떻겠습니까? 천하 사람들은 분명히 대왕이 정말로 좋은 말을 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천리마는 저절로 굴러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라고요.
과연 1년이 채 되지 않아 천리마 3천 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²⁾
(‘중’편에 이어)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당시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新日鐵住金)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하고 임금을 받지 못한 원고 4명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피해자 1인당 1억 원씩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일본 아베 수상은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격렬히 항의했다. 나아가 강제징용 피해자 측 변호인단이 신일철주금의 한국 내 자산 압류 절차에 들어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베 수상이나 고노 외무상이 논거로 삼는 것은 하나같이 ‘한일겠다고 밝힌 데 대해 고노 일본 외무상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준비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보상 전문 변호사 야마모토에 따르면, 일본정부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나 이를 전제로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결코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논박한다. 다만 일본정부는 자신의 편의에 따라 개인청구권을 해석했다. 곧 시베리아 억류피해자들이 일본국에 보상소송을 제기하면, 개인청구권이 살아있으니 해당국의 절차에 따라 개인청구권을 행사하여야 하고, 따라서 일본국은 보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징용피해자가 일본국에 배상소송을 하자, 개인청구권은 있되 재판에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내세워 기각했다.
나아가 고노 외무상에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운운하는데, 이는 애당초 성립되지도 않는다고 야마모토 변호사는 주장한다. 다음은 야마모토 변호사가 일본 진보 성향의 월간지 <세계>에 실은 글을 ‘중’편에 이어 나머지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해석을 전환한 일본정부
그런데 2000년 경, 전후보상재판의 각종 쟁점에서 기업과 국가에 대해 불리한 판단을 하는 재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일본정부는 해석을 돌연 변경하여, 모든 전후보상재판에서 조약(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일한청구권협정, 일중평화조약, 일중공동성명)에 의해 해결이 끝났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피해자로부터 보상청구를 받았을 때에는 ‘조약에 의해 방기放棄한 것은 외교보호권에 지나지 않고, 피해자는 가해국의 국내절차에 의해 청구할 길이 남아 있으므로, 일본국에는 보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외국인 피해자로부터 배상청구를 받자, ‘조약에 의해 일본의 국내절차로 청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본국에 배상책임이 없다’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표변한 것이다.
당초는 ‘조약에 의해 해결이 끝났다’는 결론만을 정한 것일까, 법적인 설명은 소송마다 제 각각이었다. 이윽고 일본 측 주장은 ‘개인의 실체적 권리는 소멸하지 않았지만, 소송에 의해 행사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에 해당)도 인정한 개인청구권
중국인 피해자 사건에 관한 2007년 4월 27일 최고재판소 판결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주장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여, 개인청구권에 있어서 민사재판상의 권리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이라고 기술했다.
다만 최고재판소도 ‘여기서 말하는 청구권의 「방기放棄」라는 것은, 청구권을 실체적으로 소멸시키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당해 청구권에 기초하여 재판상 소구訴求할 권능을 잃게 하는 것에 그친다고 해석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하여, 개인의 실체적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의해 소송에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면, 명백히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전제로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같은 해석을 적용하는 것은 필연이다. 최고재판소 판결 후의 한국인 피해자에 관한 소송에서 일본은 최고재판소 판결의 논리를 채용하여, 개인 청구권이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송으로 청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재판소도 이것을 인정했다(토마야 지방법원 2007년 9월 19일 판결 등).
이렇게 하여 한국 피해자가 일본 재판소에서 배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것은 외교보호권의 방기를 의미하고,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일본정부의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다만, 2000년대에 들어서 ‘피해자는 권리가 있어도 재판에서는 청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추가되어 있다. 이번의 원고들은 그 ‘소멸하지 않은 청구권’을 한국의 재판소에서 행사하고, 인정을 받은 것이 된다.
■타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오만함
일본정부와 매스컴은 판례집과 국회의사록을 보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에 입을 다문 채, 한국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것처럼 비난하며 이웃나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또, ‘노무현 정권은 2005년에 징용공에 대한 보상은 한국정부의 책임인 것을 인정했다’고 하며 그것과 대법원 판결은 어긋난다고 비난하는 언설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방기된 것은 외교보호권이고, 개인의 권리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전제로 하여 강제징용문제가 한일청구권협정의 대상이다고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고, 배상책임을 대신한다고 표명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번 대법원 판결 이유에 있어서 종래의 한국정부의 견해와 다른 부분이 있지만, 사법부가 행정부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상 당연히 인정되는 것이고, 오히려 민주제의 통치구조가 건전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을 비난한다거나, 정부가 대법원에 대하여 ‘대처’할 것을 요구하는 언설은, 타국의 삼권분립제도를 존중하지 않으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정부가 다른 견해를 진술하는 사법부를 억제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독재’로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론’은 국제적으로통용될까
또, 일본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고도 발언하고 있다. 그러나 양 당사국의 합의가 없으면 국제사법재판소가 수리를 하지 않아, 제소는 애당초 현실적이지 않다.
설령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툰다고 하여도, 소송의 결론을 좌우할 한일의 법적 대립점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송에 의한 권리행사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일본 최고재판소 및 정부 견해의 옳고 그름이다.
그러나 일본도 한국도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자유권규약)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인권보장을 위해서는 우선 관계국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능한 한 보장하고, 거기에서 구제받을 수 없을 경우 인권조약기관과 국제재판소에 구제받으러 간다는 것이 국제인권법의 사고방식이다. 그렇다면 ‘권리가 있다고 하여도 재판에서 행사할 수가 없다’는 일본의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단’이고, 국제재판에서 인정받기는 곤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요한 것은 피해자와의 화해
최고재판소 판결의 당사자인 중국인 피해자와 니시마츠(西松)건설은 그 후 화해하여 계속적으로 위령慰靈 행사를 하고 있다. 전쟁 당시 미성년자였던 피해자도 90세 전후가 되고, 이미 때늦었지만 본건의 당사자인 신일철주금도 얼마 안 되는 생존자가 있는 동안에 사죄와 배상을 행하고, 이미 죽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마땅한 배상과 예를 갖춘 위령과 기념을 행하고, 비참한 인권침해의 재발 방지를 맹세해야 마땅하다.
일본 매스컴이 거의 보도하지 않은 일인一人 생존피해자 뒤에, 한을 품고 죽은 수천 명의 피해자가, 또 그 뒤에는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던 수많은 피해자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업은 국가정책에 따라 징용공을 사용한 것이므로 정부는 그러한 화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추진하여야 할 입장이다. 현재의 일본정부에는 그러한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피해자 개인과 민간기업의 소송에 개입하여 미지불 임금 지급과 화해를 방해한다거나, 사실을 은폐한 채로 이웃나라에 증오를 부추기는 일만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끝>
※1)황금대黃金臺. 중국 북경 부근에 있던 높은 대. 전국시대에 연나라 소왕이 구축하여 그 건물 안에 천금千金을 두고, 천하의 현자들 불러들였다. 2)렁청진 편저/김태성 역, 『변경辨經』(더난출판, 2003), 578~582쪽.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