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은 조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자들 중에서 승이 가장 어질고 빈객을 좋아하여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대략 수천 명이나 되었다.
평원군의 집 누각은 민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다. 평원군의 애첩이 누각에서 민가에 사는 절름발이가 절뚝거리며 물을 긷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 다음날 절름발이가 집 문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고 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 다리를 절뚝거리고 등이 굽는 병이 있는데 당신 첩이 저를 내려다보고 비웃었습니다. 원컨대 저를 비웃는 자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평원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소.” 그러나 평원군은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놈 좀 보게.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내 애첩을 죽이라고 하니 너무 하지 않은가?”
평원군은 끝내 첩을 죽이지 않았다. 그 뒤 일 년 남짓한 사이에 빈객과 문하, 사인舍人들이 조금씩 떠나가더니 떠난 자가 절반이 넘었다. 평원군은 이를 이상히 여겨 말했다.
“나는 여러분을 예우하는 데 크게 실수한 적이 없거늘 어째서 떠나는 자가 이렇게 많소?” 문하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당신이 절름발이를 비웃은 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당신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하찮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평원군은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의 목을 베고, 직접 문 앞까지 가서 절름발이에게 그 목을 내 주면서 사과했다. 그 뒤 문하에 다시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제나라에는 맹상군, 위나라에는 신릉군, 초나라에는 춘신군이 있어서 서로 다투어 선비를 정성껏 예우하였다.¹⁾
‘청구권협정에서는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역설해온 것은 일본정부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일본의 양심을 묻는다'(상편)에서는 <문예춘추>를 통해 일본 보수 성향의 시각을 알아보았다. 그들의 주장은 ‘가짜뉴스’라 해도 손색이 없는 내용임을 이미 확인했다. 이번엔 진보 성향의 <세계>의 한국의 징용공²⁾판결, ‘해석’을 바꾼 것은 누구인가?³⁾ 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의 양심을 살펴본다.
필자 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 변호사는 먼저 일본 정부와 매스컴이 강제징용 소송 원고들의 오랜 고난에 대한 위로와 식민지 지배 기간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청구권협정에서는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역설한 것이 바로 일본정부라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 일본 정부와 매스컴이 침묵하고 있다고 정곡을 찔렀다.
다음은 야마모토 변호사의 <세계> 기사 전문 번역이다.
한국 대법원이 전 징용공(강제징용 노동자)의 소송을 인용認容한 판결에 대하여, 일본정부와 매스컴 등의 맹반발이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이 판결의 배경은 무엇일까? 개인청구권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취급되어온 것일까? 우선 필요한 것은 사실관계의 확인이다.
■일본 측의 이상한 한국 비난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고, 전 징용공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확정한 것이다.
원고들 중 2명은 미성년일 때 감언甘言에 속아서 응모하여, 오사카에서 현지 징용되어, 일본제철 오사카 공장에서 목숨이 걸린 위험한 중노동에 종사하게 되었고, 임금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원고들도 도망하려다 잡혀 구타당하는 등, 가혹한 노동과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피해로부터 70여 년, 일본 재판소에 제소한 이래 20여 년, 8회째의 판결에서 겨우 승소를 확정 받은 것이다.
겨우 혼자만 살아서 대법원 판결을 들을 수가 있었던 94세의 원고 이춘식 씨는 판결 당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이 기자회견을 일본에서 보도한 것은 통신사로부터 기사를 받은 몇 개의 지방지뿐이었다. 원고들의 오랜 세월 동안의 고난에 대한 위로의 말과 식민지 지배의 가열한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의 말은 일본 정치가나 매스컴에서 들을 수가 없었다.
이뿐 아니라, 판결에 대하여 아베 수상은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 고노 외무상은 ‘양국 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뒤집는 폭거’라고 비난하고, 대부분의 매스컴과 식자識者도 이것에 추수追隨하여 한국 비난의 대합창을 했다. 이러한 대합창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이래 50여 년에 이르는 양국의 굳은 약속을 한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생각하여 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도 매스컴도 한일청구권협정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事實’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실은 한일청구권협정의 체결 이래 ‘청구권협정에서는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여 온 것은 일본정부이고, 2000년 전후前後에 피해자를 배반하는 해석의 전환을 행한 것도 일본정부이다.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여 온 일본정부
한일청구권협정에 선행하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1956년 일소공동선언에도 ‘그 국민 모두의 청구권을 방기放棄하고······’라는 조항이 있다. 이에 대해 히로시마 원폭原爆피해자와 시베리아억류피해자가 일본국에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폭자被爆者와 시베리아억류피해자가 미국과 소련에 행사할 손해배상청구권을 일본정부가 조약으로 소멸시켰으므로, 일본국은 피해자에 대하여 미국의 배상을 대신하여 보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조약에 의해 방기한 것은 개인의 청구권을 기초로 외국과 교섭할 국가의 권리(외교보호권)만이’고, ‘국민 자신의 청구권은 조약에 의해 소멸하지 않’으므로, 일본국은 피해자에게 보상할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동경지법 1963년 12월 7일 판결 참조).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은 양국과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 및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체결 당시부터 이것도 개인의 권리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고, 외교보호권의 방기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에 자산을 남겨두고 온 일본인이 일본정부에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가 되자 한국은 민주화가 진행되고, 한국인 강제징용피해자들이 피해자단체를 결성하여 일본으로 건너와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되자, 이윽고 이 문제를 일본국회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시베리아억류문제에 대해, 일소공동선언의 ‘방기’는 외교보호권의 방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 청구권을 방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교보호권을 방기한 이상, 국가로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개인이 청구권을 행사하려면 소련의 국내법에 따라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답변이 있다(1991년 3월 26일 참의원내각위원회).
이렇게 시베리아억류피해자를 떼어버린 답변이었지만, 그 후 정말로 일본 국내법 절차에 따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한국인 피해자에 관한 질문을 받자, 이 답변과 모순되는 답변을 할 수가 없으므로, 야나이 슌지(柳井俊二) 외무성 조약국장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양국 간의 청구권 문제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지만······이것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지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서로 방기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시켰다는 것은 아닙니다.” (1991년 8월 27일 참의원예산위원회)
그 후도 유사한 취지의 답변이 되풀이되었고, 외무성 발행의 <외무성조사월보>에도, 국가가 국민의 청구권을 방기한다는 문언文言은, 개인 청구권 방기가 아니고 외교보호권의 방기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일본정부는 이제까지 일관되게 취해 오고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런 해석에 따라 1990년 이래 한국인 피해자가 제소한 수십 건의 전후보상재판에서 1999년까지 10년 간,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 등의 조약에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 적은 없고, 이것이 쟁점이 된 적마저 없었다.
(곧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1)사마천/김원중 옮김, 「평원군·우경 열전」, 『사기열전』(민음사, 2010), 403~404쪽. 2)徵用工. 강제징용 노동자의 일본식 표현. 원문의 취지를 살려, 그대로 번역한다. 3)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변호사), 「韓國·徵用工判決 ‘解釋’を変えたのは誰か?」, 『世界』 2019년 1월호.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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