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80) 즐거운 실연, 전윤호

손현숙 승인 2022.12.17 09:20 | 최종 수정 2023.03.25 17:36 의견 0
전윤호 시인

즐거운 실연
                         
전윤호

 

 

얼마나 고마운지 실연이라니
가슴 아파 숨을 쉴 수 없다니
제발 매정하게 떠나시라
나는 구겨져 실컷 울다가
글자가 번지는 시를 써댈 테니
죽은 화산에 불을 당기듯
다른 사람 사랑한다고
이별을 통보하시라
덕분에 식욕을 잃고
잠이 마르니
밤이 길어 밀린 일도 하겠네
얼마나 고마운지 당신이라니
하루건너 싸우느라 바빴던
우리에게도 이제 평화가 오겠네
얼마나 다행인지 실연이라니
이 별 볼일 없는 행성에서

전윤호 시집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을 읽었다. ‘걷는사람 시인선’. 2022.

연애는 어렵다. 달콤하지만 쌉쌀, 아슬, 불안, 하면서도 충만하다. 더러는 간이 덜컹 내려앉기도 한다. 거기에 왕도나 지름길은 없다. 어려서는 애인을 외면하면서 이기는 연애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에 모서리 깎이면서는 차라리 당하는 쪽이 편안하다. 애인의 어이없는 변심 앞에서도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경험. 상대를 뒤지느라 쫓기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살짝 편안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 화자는 이 모든 실연의 감정을 “밤이 길어 밀린 일도 하겠네”라고 역설의 악착을 떨기도 한다. “하루건너 싸우느라 바빴던/ 우리”에게 드디어 찾아온 평화. 내가 아닌 당신에게 통보받은 이별 앞에서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실은 속수무책.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이 시간. 믿을 수 없는 당신의 변심은 오래, 아주 오래, 화자를 죽음으로 살게 하리라. 그러나 이 얼마나 즐겁고(?) 살만한 일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 “이 별 볼일 없는 행성에서”말이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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