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83) 황도십이궁 너머 은핫물 너머 - 오탁번 선생 영전에 부침, 오태환

〈오탁번 선생 추도시〉

손현숙 승인 2023.03.02 17:04 | 최종 수정 2023.03.25 17:34 의견 0
고 오탁번 시인

황도십이궁 너머 은핫물 너머 
- 오탁번 선생 영전에 부침
                                                 

                                                 오태환

 

 

무슨 어려운 기별 받으셨기에 당신께선
세상의 문지방 슬며시 건너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건너
벼락같은 은핫물 건너
은핫물로 어둡게 무릎을 적신 채
이리 황황한 발길을 재촉하시는지요

무슨 어려운 기별 받으셨기에 당신께선
안암의 하늘과 애련의 하늘을 차마 버려두고
낡고 단정한 구두 한 켤레처럼 버려두고
당신의 육신 전체가 
차라리 희고 야윈 비백(飛白)의 붓자취가 된 채
가장 깊고 먼 하늘로 발길을 옮기시는지요

늬 몇 학번이고?
나? 나 오탁번인데, 어쩔려고!

교실이든 골목길이든 선술집이든 
세태의 아유(阿諛)와 으름장 앞에 선
당신의 순한 익살과 오연(傲然)한 기세가
여전히 귀에 쟁쟁거리는데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다는
한갓 김지이지의 무심한 관용구에서 모국어의
눈물겹게 절실하고 아름다운 속살을 들춰내며 
시치미떼는 당신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한데

데뷔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의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서늘한 공감각의 절경(絶景)을
언어의 찬란한 비의를 구경시키는 당신의 가르침은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데   

IMF 외환 위기의 궁핍한 시절을 무릅쓰고 
당신께서 마침내 창간했던 계간시지 《시안(詩眼)》은 
불초한 꺼병이 후학과 제자들의 품속에서
시와 산문의 
여전히 가슴 부빌 따뜻한 고향언덕으로 남아 있는데

무슨 어려운 기별 받으셨기에 당신께서는
경칩도 우수도 아직 멀리 있을망정
당신의 희고 야윈 육신을 
차라리 배를 바다로 진수(進水)하듯 
저렇게 밝은 하늘로 밀어내시는지요 

황도십이궁 너머 벼락같은 은핫물 너머
가장 깊고 먼 하늘에서 당신께선
이냥저냥 앞마실 뒷마실 가듯 뒷짐지시면서
에헴, 이눔 봐라, 하시면서
눈발 날리는 푸른 절벽 꼭대기의 맹금(猛禽)처럼
날개를 막 펼치는 맹금의 형형한 눈빛처럼 
지상의 일들을 
여전히 지켜보시겠지요 

오태환 시인
선생이 설립한 문학관 원서헌(遠西軒,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을 지난해 2월 14일 방문한 후배 시인들과 함께한 오탁번 시인. 선생 오른쪽으로 필자, 이현정, 최춘희 시인(최영규 시인 촬영)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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