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86) 뒷모습, 김겸
손현숙
승인
2023.03.25 16:52 | 최종 수정 2023.03.31 12:40
의견
0
뒷모습
김겸
앞서 걷는 아들의 모습을 본다
터덜터덜 내딛는 저 팔자걸음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인데
저 속에 틀림없이
내 아버지의 뒷모습이
박혀 있다
저 뒷전으로 이어진
소의 등허리 같이
고집 세면서도 부드러운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
김겸 시집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를 읽었다. ‘여우난골’ 2022.
아버지는 아들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딸은 어머니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 순간, 문득 내가 나의 어머니를 혹은 아버지를 재현하고 있는 모습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 난감함은 때로는 절망이고 한편으로는 안도이기도 하다. 김겸의 시에서는 울음이 차오르는 순간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이상할 정도로 힘이 세지만 연하다. 여리다. 화자는 지금 앞에서 걷는 아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저 모습은 나와 아버지가 고스란히 각인된 따로 또 함께인 우리들이다. 저렇게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모습으로 아들은 이 세상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아스라이 바라보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가 애틋하다.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