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특집
왜 불안한가?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1. 더는 존재 확인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특징을 문화심리학자의 입장에서 진단하라고 한다면, ‘불안 사회’라고 하겠다. 저출산고령사회, 극단적 정치 갈등은 드러난 현상일 뿐이다. 이 현상의 배후에는 집단적 불안이 숨겨져 있다. 불안한 사회는 고립된 개인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을 때, 인간은 가장 불안해한다. 회사나 학교, 혹은 종교단체와 같은 사회적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인간은 아주 쉽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각 개인의 경조사는 자신의 존재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가장 쉽고 정확하게 확인하는 방법이다. 경조사는 기쁨, 슬픔을 공유하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자신의 신분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과시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난 지금 방식의 경조사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내 기쁨,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만의 행사로 바뀌어야 한다. 신분과시나 그동안 투자했던 경조사비를 회수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방식은 너무 천박하다. 내 경조사가 쓸쓸할 것이 두려워, 미리 남의 경조사를 매번 챙기는 것 또한 참으로 진부한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난 자식들에게 내 장례식을 절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죽으면 바로 화장하여, 지금 사는 바닷가 집 바로 앞에 뿌리고, 한 달쯤 지난 후에 죽기 전까지 연락하고 지냈던 이들을 아주 비싼 식당에 초청하여, 돌아가며 내 흉을 보면서 웃고 즐기는 모임을 하라고 당부한다.)
이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되면서 이전의 방식으로 더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은퇴하고 나면 바로 죽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재수 없으면 100세까지 살게 되었다. 더는 이전 방식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 확인 방식이 부재한 이들은 이제 분노와 적개심으로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그 방법이 가장 쉽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활동의 중요성을 요즘 체감한다. 현직에 있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 환갑을 넘으니, 요 몇 년 사이에 죄다 잘렸다. 나름 수재로 인정받으며 숱한 경쟁에서 승리하여, 최고의 직장에서 수십 년 재직한 친구들이다. 한국에서 대기업 임원이었다면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수준이다. 그 엄청난 친구들이 은퇴하고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질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란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그 어떠한 고민 없이, 그저 상대 진영에 강한 적개심을 내뱉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전혀 없는, 더는 구제하기 어려운 존재를 뜻한다.
일정한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 방법 이외에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명함’이라는 존재 확인의 분명한 도구가 있었다. 대기업의 고위 직함이 찍혀 있는 명함처럼 확실한 존재 증명은 없었다. 명함을 내밀기만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확실한 방법이 사라지자, 불안해진 것이다. 진정한 상호작용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상호작용이란 적(敵)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주체적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뜻한다.
젊은이들도 불안하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확인 양상은 ‘성질 고약한 늙은이’들에 비해 상당히 평화롭다. 요즘 유행하는 MBTI 같은 방식이다. 젊은 사람들은 만나면 먼저 MBTI의 분류에 어디에 속하는가부터 확인한다. 이전에는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스스로를 확인하고, 상대방을 파악하려 했다면 요즘은 MBTI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로서 단언컨대 MBTI나 혈액형, 혹은 별자리는 그리 큰 차이 없다. MBTI의 분류가 좀 더 다양할 따름이다. (누가 내 MBTI 유형을 물어오면 난 항상 대답한다; ‘TGIF’!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유형은 없다는 표정이다. 당연하다. 지금은 보기 힘든 패밀리 레스토랑 이름이기 때문이다.) MBTI와는 조금 다른 방식의 ‘명리학’도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똑같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노동이나 생활에서 도무지 확인되지 않으니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이 내 존재를 규정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2. ‘상호작용’이 먼저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은 상호작용에서 먼저 나타난다. 그리고 그 능력은 ‘내면화(Verinnerlichung)’된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비고츠키(Lev Semenovich Vygotsky, 1896~ 1934)의 ‘inter-inner principle’이다. 비고츠키는 같은 해에 태어난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가 심리학계를 뒤흔들던 20세기 후반에는 서구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의 유대인 심리학자다. 소비에트가 해체된 후, 동구권에만 알려졌던 그의 저작들이 서구 세계에 본격 소개되었다. 특히 그의 상호작용론은 피아제의 이론과는 정반대 주장으로 서구 심리학계의 시선을 끌었다.
비고츠키의 ‘inter-inner principle’의 핵심은 ‘상호작용(Interaction)’에서 먼저 나타나고, 그 이후 ‘개인화(individualization)’된다는 것이다. 이는 피아제의 주장과는 정반대다. 피아제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은 보편적이며, 그 방향은 ‘사회화(Socialization)’다. 갓 태어난 인간의 아기는 사회의 보편적 원리를 익혀가며 인지능력이 향상되며, 어느 단계에서는 성숙한 개인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인지적, 정서적 능력을 갖게 된다는 주장이다. 보편적 발달 수준을 전제하는 ‘단선론적 발달론(uni-linear developmental theory)’이다. 그러나 피아제류의 단선론적 발달론의 문제는 모든 존재를 우등과 열등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차이는 곧 수준의 차이를 뜻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논리적 전개다.
비고츠키의 입장은 반대다. 상호작용이 먼저고, 그 경험들이 내면화되어 개인의 발달을 가능케 한다는 주장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기가 엄마와의 상호작용에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경험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아기의 정서적, 인지적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기와 엄마의 상호작용이 처한 문화적, 사회적 맥락이 아기의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비고츠키의 이론은 문화에 따라 인간 발달은 달라진다는 문화상대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비고츠키와 피아제가 부딪힌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자기중심언어(egocentric speech)’와 관련되어서다. ‘자기중심언어’란 한마디로 ‘혼자 중얼거리기’를 뜻한다. 아기가 자라는 과정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피아제는 아기의 인지발달이 아직 성숙하지 못해 생각을 머릿속에서 하지 못하고, 그 흔적이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것으로 해석했다. ‘생각은 남이 듣지 않도록 속으로 해야 한다’는 사회화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고츠키는 다르게 해석한다. 비고츠키에게 아동의 인지능력이란 엄마와의 상호작용이 내면화된 결과다. 이때의 상호작용이란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 ‘사회적 언어(social speech)’를 뜻한다. 이 ‘사회적 언어’가 내면화된 결과가 바로 생각이다. 비고츠키는 인지능력을 ‘사회적 언어’가 내면화된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자기중심언어’란 사회적 언어가 완전히 내면화되지 않은 상태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발달심리학자들은 비고츠키의 이론을 더 선호한다. 문화적 맥락,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고방식을 훨씬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아제의 인지 발달이론은 ‘생각의 차이’를 ‘발달 수준의 차이’로 해석하는 반면, 비고츠키의 이론은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따라서 생각의 차이는 상호 간의 적극적 상호작용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상호작용이 먼저’라는 비고츠키의 주장은 불안한 존재들에게 참고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3. 적극적 상호작용으로 불안을 극복하라!
사진기가 등장하자, 화가들은 불안해졌다. 이제까지 자신들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교회, 왕, 귀족들이 더는 자신들을 찾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진기가 등장할 때까지, 화가들의 임무는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고 할지라도, 사진기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사진기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재현해냈기 때문이다. 더는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불안한 화가들은 적극적 상호작용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인상파의 출현이다.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그림을 포기하고, 관람객들과의 상호작용을 적극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원근법을 해체했다.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로서의 원근법을 포기하고 다양한 관점을 섞어 그림을 그렸다. 단 하나의 관점, 즉 소실점을 축으로 하는 그림에 익숙했던 관람객들은 그림 앞에서 당황했다. 단 하나의 렌즈로 구현하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그림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웅성대며 그림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그림은 일방적이었다. 역사적 사건이나 위인들의 이야기, 혹은 왕과 귀족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계몽적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상파의 그림은 달랐다. 관람객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상호작용의 상대로 초대하는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사람들은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관점을 해체하여 관람객들과의 상호작용에 성공한 화가들은 또 다른 실험을 계속했다. 색깔을 해체했다. 대상의 실제 색깔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칠했다. 예를 들어 사람 얼굴을 파랗게 칠하는 방식이다. 거친 선과 원시의 강력한 색을 칠하는 화가들에게는 ‘야수파(포비즘, fauvism)’라는 이름이 붙었다. 형태를 해체하는 실험도 행해졌다. 실재하는 모양을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원뿔, 원통, 구 따위의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를 ‘입체파(큐비즘, cubism)’라고 했다. 관점, 색채, 형태를 해체하는 실험은 지속되어 마침내 추상회화를 가능케 했다. 추상회화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디자인은 불가능했다. 디자인은 미학적 경험의 대중화를 뜻한다.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미학적 체험이 디자인을 통해 보편화되었다. 사진기의 출현으로 더는 갈 곳이 없어진 불안한 화가들은 관람객들과의 적극적 상호작용을 통해 디자인이라는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불안의 해결책은 적극적 상호작용에 있다. 하지만 결론이 정해져 있는 상호작용은 진정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공의 방향을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정할 수 없는 테니스처럼 상호작용의 결과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상호작용이 흥미로운 것이다. 상호작용에 참여한 누구에게나 방향 전환의 기회가 주어진다.
온종일 좁디좁은 SNS 화면이나 들여다보며 살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면의 불안을 위로받고자 올린 분노의 글에 ‘좋아요’가 몇 개나 붙는가를 확인하는 가짜 위로에 속지 말자는 것이다. 불안은 ‘다양한 정서적 경험을 공유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해소된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래도 적극적 상호작용을 통해 열린다. 불안할수록 즐겁고 흥미로운 주제를 매개로 자주 만나야 한다!
◇ 김정운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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