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9. 임제와 신희⑤

박기철 승인 2024.03.26 08:00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9-5. 희대의 철학자를 울린 여자

그래! 너한테 유혹당한 남자들 이름을 말해야 네가 그들을 유혹한 치명적 요부(Femme fatale)인지 인정할 수 있겠다. 도대체 누구야? 아니 누구들이였어?

근데 뭐 그리 바뻐. 일단 나의 첫 사랑부터 이야기할게. 교회 목사님이었어. 내가 17살 때 목사님은 40대였지. 난 그 목사님한테 신앙 만이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 논리학 등에 대해서도 배웠어. 매우 똑똑한 분이셨지. 그런데 어느 날 늘 점잖았던 목사님은 날 여자로 보기 시작했어. 목사님도 모습을 바꾸며 변태(變態)하더군. 나보다 서른 살 가까이 많은 사람이 구애를 하며 나한테 결혼하자더군. 나는 유달리 얼굴이 아주 예쁜 것도 아니고 몸매가 무척 좋은 것도 아닌데 나한테는 왠지 남자를 유혹하는 선천적 재능이 있었나봐. 어린 나는 그때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차이에 대해 나름 생각했어. 그러다가 다짐 결심했지. 정신적 교감을 나눈 남자와는 육체적 관계를 맺지 말자고. 그렇게 나는 한 남자의 구애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벗어났어. 자기 혼자 나를 사랑하려다 실연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지. 내 팜므 파탈 인생의 시작이었지. 그러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철학자를 만나 사귀게 되었지. 그때 나는 나의 다짐을 실천에 옮겼어. 그냥 만나서 철학에 대해 대화할 뿐 그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지 않았지. 친구관계로 대화만 할 뿐 섹스를 거부하는 여자를 남자들은 어떻게 여길까? 나는 그런 수컷 남자들의 사정을 무시했어. 남녀 관계에서 차 마시고 영화 보고 식사하는 이른바 ‘차영식’ 상태만으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고 보았던 거지. 여자인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보았지. 아니 순수한 사랑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나 혼자 여자로서 생각한 거지. 그런데 남자는 그걸 굉장히 견디기 힘들어 하더군. 집요하게 나의 몸을 요구했지만 나는 강력하게 거부했어. 그러던 와중에 그 남자의 선배를 소개받았지. 나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았는데 굉장히 유식한 남자였어. 아주 탁월한 대학 교수였다고도 들었어. 정말로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수준높게 서로 터놓고 대화하기 딱 좋은 남자였어. 나의 지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남자였지. 그래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역시 그에게도 난 육체적 사랑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어. 사실 그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거의 쑥맥이었어. 아무리 학문적으로 똑똑해도 어린 애처럼 징징대며 순진했어. 좀 바보 같기도 했지. 그렇게 나는 두 명의 철학자들과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지냈어. 내가 강력하게 내건 조건대로 절대 성 관계 없는 한 집에서 세 남녀의 동거생활을 한 거지. 두 남자들은 그냥 나랑 같은 집에서 산다는 거 만으로도 처음엔 만족했어. 그러던 어느 날 셋이서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지. 그 사진은 나의 팜므 파탈 특징을 생생히 나타내는 역사적 기록이 되었어. 내가 마차에서 채찍을 들고 있고 내 앞에 두 남자가 하인처럼 서있는 사진인데… 마치 두 남자는 마부인 내가 부리는 두 말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진이야. 거기서 오른쪽 남자가 바로! 놀라지마. 니체라는 철학자야. 나의 팜므 파탈 매력에 당하며 고통에 시달리던 남자. 니체! 그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엄청난 철학자!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리 똑똑해도 말 잘 듣는 말에 불과했어. 내가 말처럼 부린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니 순위를 정해서 말하자면 ①순위에 오를 만한 남자야. 그 남자의 유명도에 따라서 순위를 꼽자면 그래. 그는 철학자인데 그냥 한 명의 철학자가 아니야. 고대 중세 근대까지의 철학을 망치 도끼로 깨부수듯 와장창 박살내 버리며 현대철학의 문을 연 엄청난 철학자야.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이자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하지. 현대철학은 나체의 아류라고 할 만큼 그는 사후에 그야말로 엄청난 철학자가 되지. 그런 니체가 나로부터 육체적 사랑을 거부당하자 그는 나를 떠났지. 남자들은 육체적 사랑없는 정신적 사랑을 견디지 못해. 사랑없는 섹스는 건조하고 섹스없는 사랑은 공허다는데 남자들은 섹스없는 사랑보다 사랑없는 섹스를 선택하는 동물이야. 사랑없는 섹스는 얼마든지 즐기지만 섹스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엄청 공허하며 허망하다고 생각하나봐. 결국 희대의 철학자가 될 그는 나한테 엄청난 저주를 퍼부으며 떠났어. 난 꿈쩍하지도 않았어. 실연한 그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들었어. 어느 날 어느 마부가 자기 말을 채찍으로 마구 때리는 걸 니체가 보았대. 그때 니체가 말한테 다가가 말 머리를 붙잡고 엉엉 펑펑 울었다고 들었어. 진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아마도 채찍으로 맞는 말이 자기자신처럼 여겨졌었나 봐. 말을 때리는 마부는 바로 나였던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치명적 영향을 준 게 맞아. 내가 끼친 치명적 영향으로 그는 좀 미친 광기(狂氣)에 휩싸이게 되었나봐. 그런 광기에서 쓰여진 창작물이 그 유명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하던데 그럴 만해. 아무튼 나는 동거하던 두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거부하고 어느 남자와 결혼했어. 그 남자와도 성 관계없는 결혼 생활을 조건으로 결혼했지. 나도 참 이해할 수 없는 여자야. 그런데 내가 결혼했다고 하자 나랑 동거하던 두 남자 중 니체 말고 니체의 후배 철학자가 실연을 비관하며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대. 정말로 나는 팜므 파탈보다 심하게 남자를 죽게까지 한 희대의 마녀였지.여기 어디서 날 징하게 원망하거나 저주하고 있을 게 분명해.

아이고! 너 때문에 사람이 죽었네. 신희 니 팜므 파탈 맞네. 근데 도대체 너 뭘 좋다고 남자들이 널 그토록 좋아했지. 아! 근데 어디서 사람 소리가 들리네. 잠깐 바깥 동정 좀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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