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쳉쿵대학교(國立成功大學校)는 대만에서 세 번째로 꼽히는 명문대학교이다. 한데 내년 역사학과에 지원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대학 당국은 충격을 받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동아시아의 광범위한 추세의 일부일 뿐이다.
동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대학은 인구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18세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사립대의 53%가 정원미달이다. 대만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학부생이 4분의 1 이상 감소했다. 한국에서는 2010년 360만 명의 학생이 작년에는 300만 명으로 줄었다. ‘입학 절벽’이라고 아우성이다.
입학생이 줄어듦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학부가 큰 타격을 받았다. 부모보다 더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 직면한 학생들은 고소득 일자리로 이어질 과목을 공부하고 싶어 한다. 이는 대부분 과학, 기술, 공학 및 수학(STEM.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분야이다.
일본, 한국, 대만에서는 사립대학이 대부분이고, 이 사립대학은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학생의 희망에 발맞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2000년 이후로 18개의 사립대학이 문을 닫았다.
다만 싱가포르는 동아시아의 이 추세와는 다르다. 전통적인 대학 연령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나이든 사람들을 대학에 다니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학생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도 STEM 과목을 선호하지만, 정책 수립을 위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하여 해당 학부의 학생 수도 증가하고 있다. (The Economist/Why many young Asians are no longer studying history/Jul 4th 2024)
『논어』 등의 고전과 『성경』에 현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할 어떤 비책이 담겨져 있을까? 인류 대부분의 역사 시기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산업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변화가 눈에 띌 정도였다가 얼마 전까지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했다. 그러나 변화의 가속화로 이제 1년 전은 먼 과거가 되는 분야도 많다.
2000여 년 전의 사회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이 현 시대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또 지금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전이나 성경을 펼쳐드는 사람이 있을까? 마는, 우리의 몸이 1~2만 년 전 수렵채집인의 구조임을 상기하자.
앉아 있는 시간에 비례해 건강에 나빠진다고 한다, 왜 운동, 혹은 움직여야 건강할까? 사냥감을 좇아, 열매를 따기 위해, 항상 움직여야 했던 수렵채집인의 몸 구조를 물려받아, 아직도 온전히 그대로인 탓이다.
마찬가지로 현 시대의 시무(時務)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평온을 유지할 개인의 처신과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단서는 고전에, 성경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에게 좋은 일자리를 붙듦이 삶의 최종목적은 아니다. 그 이후는? 사회에는 좋은 일자리를 못 얻는 구성원이 더 많다. 승자가 이기적 교만에 빠지지 않고, 패자가 굴욕을 느끼지 않도록, 사회의 조화로운 체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답의 단서를 고전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싱가포르는 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투자를 하고 있지 않은가!
『논어』의 내용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다. 수 삼번 읽었고, 손가락으로 다 못 꼽을 정도로 들쳐보며 참고했으니까. 하여 어떤 글이나 강연에서 논어나 공자를 언급하면 ‘긴데 아닌데’ 감(느낌)이 팍 온다. 오독을 바로 잡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이정모 전 관장은 종래의 상식이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그대로 믿고서 꿀꺽 삼키지 말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비판적 사고’가 과학적 태도이며, 이런 태도를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 백번 공감한다.
문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논거로 ‘논어/양화8’을 끌어댄 것이다.
「‘호신불호학(好信不好學) 기폐야적(其蔽也賊)’, 요즘 말로 하면 ‘믿기만 좋아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사회의 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물론 비판적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 두뇌노동을 회피하는 게으른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논거로써 손색이 없을 듯도 하다. 하지만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대수로운 일은 아닐지라도, ‘공부하는’ 인문학도로서 필자는 가벼이 넘길 수만은 없다.
『과학이 가르쳐 준 것들』은 내 지적 재산을 더 부유하게 했고, 이정모 전 관장의 과학적 혜안에 존경심도 갖고 있다. 과학자의 ‘옥에 티’를 버르집어 그의 저작을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옥에 티 없는 저작이 어디 있으랴.
어쨌건 그의 저작은 과학적 태도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는 귀중한 책이다. 다만, 과학자와 인문학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사소한 옥에 티도 인공지능(AI) 시대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기에, 특정인의 비판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로 ‘비판적 사고’를 해 보려 할 뿐이다.
好信不好學의 ‘信’을 이 전 관장은 ‘불신’(不信)의 ‘信’과 같은 뜻으로 해석했다. 곧, ‘믿기를 좋아하다’와 ‘믿지 않다’. 그러나 바른 해석은 朋友有‘信’(붕우유신)의 ‘信’의 뜻이다. 우리말에서는 ‘믿다’가 세분되어 있지 않아 종종 혼란을 일으킨다. 용례를 통해 그 차이를 밝혀보자.
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것을 전술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
내가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것을(信而好古)
남몰래 고사(古事)의 달인 노팽(은나라 현인)과 견주어본다.” -논어/술이1-
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처음에 나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그 사람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의 행실을 믿었다(聽其言而信其行).
지금은 그 사람의 말도 듣지만, 행실까지 관찰하게 되었다.” -논어/공야장9-
3. 자로가 물었다. “선생님의 소망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소원은 늙은이를 편안하게 하고, 벗들과 신의 있고(朋友信之),
어린아이를 품어주는 것이다.” -논어/공야장25-
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신의가 없다면(人而無信), 그가 옳은지 알 수 없다.” -논어/태백22-
‘信’의 대표적인 쓰임 두 가지를 들었다. 1과 2는 ‘~~을 믿다. ~~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3과 4는 ‘신의 혹은 신뢰’로 해석할 예들이다.
‘벗들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의 붕우유신에서 信은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 의 信과는 그 뜻이 다르다.
따라서, ‘好信不好學 其蔽也賊’의 바른 해석은 ‘신의를 좋아하면서도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해침이다.’(기세춘/논어강의)이다. ‘賊’은 도적이 아니다. 묵점 선생은 ‘賊=傷害於物也’(사물에 해를 끼치다)라고 각주를 달아뒀다.
신의를 좋아하면서도, 공부하지 않아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조폭의 의리’만 갖게 되어 결국 사회의 해악이 된다는 말이다. ‘비판적 사고’를 설명하는 논거로서는 부적절하다.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AI)은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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