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물만골의 으뜸 농부(9)
“아이구, 더버라. 교장선생 막에서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하지. 나는 배가 고파 숨을 못 수겠다.”
열찬씨가 영순씨을 바라보는데
“형부, 내가 그럴 줄 알고 양과 빵 사왔는데 먹고 하실랍니까?”
어느 새 나타난 영신씨가 일을 도우려고 토시를 끼고 밭으로 들어서는데
“야야, 니는 밭에 들어오지 말고 원두막에서 라면 끓여라. 우리는 지금 하는 거만 하고 나갈 게.”
“알았어.”
하고 돌아서던 영신씨가
“참, 희정이아빠는?”
“밭에 없더나?”
“안 보이던데?”
“그래 그 시근머리 없는 사람이 저 나무 밑에 자러갔다 아이가?”
너무 힘들어 그런지 눈가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화난 표정으로 아래쪽 소나무그늘을 가리키자
“보소! 희정이아빠!”
벽력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뭔가를 따지고 변명하는 소리가 우렁우렁하더니
“형님, 그래 바쁘면 바쁘다고 이야기를 하든지요?”
황 서방이 볼멘소리를 하는데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척 보면 알아야지, 그 기 사관지 능금인지 꼭 묵어보아야 하나?”
오늘은 순란씨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아이고, 장모님.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그 기 어데 사과하고 능금이야깅교? 된장인지 똥인지 묵어봐야 아는 거지.”
열찬씨가 웃으며 분위기를 맞추는데
“언니이!”
라면이 다 되었다고 영신씨의 연락이 왔다. 원두막에서 라면과 양과자를 먹고 커피를 마신 뒤 동서 간에 막걸리를 한 통 마시는 사이 얼굴이 잘 익은 대추 빛이 된 모녀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혼자 설거지를 한 영신씨가
“좀 쉬었다가 오소. 내 먼저 가께.”
하고 마늘밭을 향하니 모두들 뒤를 따랐다. 아직 일부 뽑지 못한 마늘을 뽑고 묶는 일은 여자 셋이 할 테니 남자 둘은 마늘을 져 내리라면서 열찬씨에게 자동차 키를 건네주었다. 길가에 그냥 두면 혹시 누가 손을 댈까 봐 미리 트렁크에 실어놓으란 말이었다. 하나뿐인 지게에 열찬씨가 다섯 뭉치 두 접반을 지고 경철씨가 양손에 반접씩을 들고 오솔길을 내려가는데
“형님. 내 아까 대파모종 심을라꼬 하던 일 마쳐놓고 갈 게요.”
원두막에 마늘뭉치를 놓은 황서방이 제 밭으로 들어가고 혼자 산복도로까지 내려와 트렁크에 마늘을 싣고 돌아가 다시 두 접반을 지고 왔다 세 번째로 올라가는데
“형부, 우리 희정이아빠는 와 안 보이요?”
“...”
차마 말을 못 하고 아래쪽 밭을 바라보는데
“보소! 희정이아빠, 당신 시방 뭐 하는 거요?”
뽑던 마늘을 내던지고 영신씨가 아래쪽으로 뛰어가더니
“당신이 정신이 있소? 없소? 형부 혼자 힘 든다고 도와주렸더니 시방 뭐 하는 거요?”
“아, 내가 오전에 하던 일 잠시 마쳐놓고 도와주면 되지.”
“보소! 지금 형부는 힘들어서 숨도 잘 못 쉬는 판인데 당신은 당신 일 다 하고 형부가 지쳐 쓰러지면 도와줄 거요?”
“아따, 내 하던 일 잠깐 하고 도와주면 되지. 그럼 내일 놔두고 남의 일 하란 말이가?”
“아이고 이 답답한 사람아, 그러고도 동서간이라 카나? 인자 형부보고 형님이라 부르지도 말고 언니 집에 가지도 마소.”
오지게 한판 붙는 판이라 열찬씨는 못 들은 척 오솔길을 내려갔다. 한참 뒤 마늘을 실어놓고 올라오는 열찬씨와 마늘을 양손에 한 뭉치 씩 든 영신씨 내외가 마주치자
“아이구, 우리 형부 얼굴 좀 봐라. 환갑진갑 다 지낸 양반이 숨이 들 숨 날 숨 하네. 우리가 올라갈 때까지 지게 벗어놓고 숨 좀 돌리고 쉬소. 우리 황서방이 지게를 지든지.”
하고 반대로 헤어져 밭에 와서
“전부 몇 접이나 되능고?”
“허드레 마늘 빼고 열네 접반. 허드레가 한두 접 넘어 되고.”
“우리 홍여사 기분이 좋나?”
“좋다, 마다! 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사람들이 이 기분으로 농사를 짓는 모양이지.”
“그래. 누구라도 이 정도면 밥 안 묵어도 배부르겠제?.”
모녀가 신이 나서
“당신, 존경스럽네. 이런 재주가 다 있는 줄 몰랐네.”
“소발에 쥐 잡는다고. 우짜다가 보이 그렇지. 사실은 정병진씨가 고흥에서 좋은 마늘 종자를 줘서 그렇기도 하고.”
“그래. 정병진씨도 참 고맙제? 마늘이라도 한 접 조야되는 것 아이가?”
“준다고 받겠나?”
“하긴. 당신은 그러고 보면 직원 복도 많아.”
하는 사이에 영신씨 내외가 올라와서 이제 남은 마늘을 정리하는데
“자, 엄마 한 접. 희정이네 반 접, 영아네 반 접, 남동생 갑린이네 반 접.”
친정 몫 석 접 반을 챙기고
“슬비는 딸이니까 한 접 반. 정석이는 나중에 꼭지로 한 접쯤 주고 그라고 울산에 시동생 반접.”
손가락을 꼽으며 친가 쪽 석 접을 젖히고
“보자아, 아까 교장선생님 하고 위에 밭에 두 접에 10개. 그라면 총 여덟 접반이 나가는데 우리는 다섯 접이 처지는데 종자를 두 접반 빼면 열한 접이 나가고 석 접반이 남는데 아파트에 호영이할매하고 진철이엄마 한 서른 개씩 주면 석접도 안 남네.”
하고 다섯이 남은 마늘을 이고 지고 차에 싣고 황서방더러 지게를 도로 밭에 갖다놓고 오라며 숨을 돌리는데
“언니야, 형부 힘 드는데 엄마하고 우리 형제들 주는 마늘은 우리 차에 싣고 배달할 테니 바로 집에 가서 씻고 쉬소. 형부 욕받심더.”
하고 두 접반을 실을 때
“엄마는 제사도 있고 하니 허드레 마늘이라도 좀 더 가져가소.”
하고 한 뭉치를 더 주는데
“야야, 슬비애미야!”
순란씨가 간곡한 눈빛으로 영순씨를 바라보더니
“암만 봐도 마늘이 너무 좋다. 내 한 접에 5만원 쳐 주께. 마늘 한 접 더 주면 안 되나?”
“예에?”
기가 찬 듯 바라보던 영순씨가
“욕심이 나면 그냥 달라하지. 부모자식간에 장사를 하란 말이요?”
열찬씨 보기가 민망한지 혀를 끌끌 차며 한 접을 더 실어주었다.
보름쯤 지나 양파를 뽑는데 한겨울 추위에 더러 얼어 죽는 바람에 이게 제대로 양파가 되려나 싶었던 우려와 달리 양파 역시 대풍이라 위 밭의 이호열씨가
“가국장 밭농사는 잘 안 되는 것이 없네. 심었다하면 풍년인 것이 아마도 우리 사모님 손이 걸어서 그런가 봐.”
사람 눈은 다 비슷한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어온 이야기를 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쳐간 지긋이 나이든 노인네나 사주팔자, 관상을 좀 보거나 보살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아이아빠는 머리도 좋고 열심히는 하지만 돈복도 출세복도 없는 그저 책상물림선비야. 그래도 제대로 밥이라도 먹고 살고 남에게 안 뒤지고 사는 것은 모두 아이엄마의 복이야. 심성도 좋고 손도 걸고 대범하고. 그러니까 아이아빠의 유일한 복이 딱하나 처복이지. 그러니까 평생 마누라를 공경하고 마누라 말을 잘 들어야할 상이야.”
강해순 여사를 비롯한 친구들과 유명하다는 스님이나 점쟁이를 만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열찬씨가 물으면 영순씨는 그냥 웃고 넘기는데 박여사 같은 친구가
“제부는 우짜든동 정석이엄마한테 잘 하이소. 인덕이 없는 본인은 암만 노력해도 자꾸 배신을 당해 아무 것도 이루는 것이 없는데 그나마 마누라 덕으로 먹고산다니 말입니다.”
여럿이 있는데서 일부러 크게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영순씨의 손이 걸어서 그런지 그해의 양파는 아기주먹 만한 것으로 부터 어른주먹만한 것은 물론 무슨 대포알처럼 장정의 두 손으로 감싸도 다 쥐지 못할 정도로 큰 것도 있었다. 거기다 양파의 생김새가 원래 동글동글하고 반들반들하니 그 당당함이 대단해 장모 순란씨가
“아이구, 양파도 참 실하구나. 내 나고 이래 오당진 양파는 첨 보네.”
감탄을 했는데 열찬씨가 보기에 아이 주먹만 한 크기로 길쭉하게 골은 양파는 추위에 얼었다 겨우 살아남아 성장이 부실한 것이고 어른주먹만 한 것은 정상적으로 자란 것, 대포알만 한 것은 주변의 양파가 죽어 네다섯 포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햇빛과 영양을 독점한 양파인 것이었다. 혼자 사는 장모나 열찬씨처럼 홑진 가족은 한번 먹고 치울 작은 양파가 알맞고 주먹만 한 양파는 반찬에 쓰거나 대가족에 맞고 한번 쪼개 놓으면 수십 명이 먹을 양파는 중국집이나 식당에 쓰면 알맞을 것이었다. 지난 번 마늘수확 때 고생한 일이 생각나 양파를 캐기는 다 캐되 장모님이 가져갈 것과 열찬씨네와 딸네 집에 줄 것만 들고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처제 영신씨등 나머지는 필요할 때 가져다 먹기로 하고 교장선생의 원두막뒤에 마대를 깔고 쟁였다. 막상 일을 마치고 내려오려는데 순란씨가
“가서방, 저 대포알만한 양파 몇 개만 가져가면 안 될까? 친구들한테 자랑도 할 겸.”
하고 하나에 1킬로도 넘는 것이 다섯 개나 붙은 한 다발을 기어이 더 들고 나서자
“그럼 나도 호영이할매한테 자랑이나 좀 할까?”
영순씨도 한 다발을 더 드니 남이 장에 가니 자기는 거름지고 장에 간다고 열찬씨도 한 다발을 들고 내려와서 큰 것 한 다발은 14층의 이웃들에게 자랑하면서 주고 하나는 슬비네에게 주었다. 이어 첫물 오이와 가지가 나오고 애호박이 열리기 시작하고 열무도 물물이 잘 되어 오각정의 술안주는 물론 영순씨와 슬비네 모녀간의 식탁이 다 푸짐해졌다. 이제 발갛게 익어가지 시작하는 김장용고추밭의 풋고추는 물론 반찬용으로 심은 꽈리고추와 청양고추 땡초까지 제철을 맞고 호박잎을 쪄도 멋진 반찬이 되는 지라 지나가던 강인수교수나 옛동료 황성호씨가 오면 검은 비닐봉지에 이것, 저것 한 봉지씩 넣어주는 나눔의 맛도 좋았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