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아세보' 마을의 전형적인 돌집. 사진=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15일 금요일이다. ‘엘 아세보 데 산 미구엘’ 마을의 알베르게에서 아침 8시 30분에 출발했다. 이 알베르게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밖으로 나왔다. 산골 마을이어서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오늘은 고도 1,136m에서 522m인 아름다운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로 내려간다. 물론 몰리나세카에서 종착지인 폰페라다까지 더 간다.
'엘 아세보' 마을에도 사람이 살지 않아 허물어진 집들이 있다. 사진= 조해훈
‘엘 아세보’ 마을은 그야말로 산속에 고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에 있다. 그제 하루 묵었던 바나발 마을처럼 돌과 흙으로 지은 집들이 몇 채 있다. 아침이기도 하지만 마을을 내려오면서 주민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자그마한 예배당 수준의 교회 역시 돌을 쌓아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교회의 기능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필자의 추측으로는 교회가 문을 닫은 지 제법 된 것 같다. 마을에 주민이 없는데 어떻게 교회 운영이 되겠는가? 역시 사람이 살지 않아 완전히 무너진 집도 있다.
'엘 아세보'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가는 산길에 비가 내려 젖어있다. 사진= 조해훈
마을 길을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돌집들을 구경하면서 손으로 집의 벽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마음이 애잔하면서 이 마을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 이제부터 길은 내리막일 것이다.
또 비가 쏟아질 듯이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8시 47분,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니 도로 옆에 ‘엘 아세보’ 마을이 끝난다는 표지판이 있다. 표지석을 보고 도로 옆 흙길인 산티아고 길로 접어들었다. 도시에서 하루 묵고 출발할 때는 단 하루지만 그 도시에 정이 들어 서운한 마음이 있고, ‘엘 아세보’ 같은 산촌에서 하루 묵고 출발할 때는 마음이 더 짠하다. 그게 사람의 마음인 모양이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 마을의 한 집 2층 베란다에 꽃이 장식돼 있다. 사진= 조해훈
이 지역은 산악지역이어서 바로 산길이다. 아쉬움에 뒤돌아서서 ‘엘 아세보’ 마을을 바라보았다. 알베르게가 카페를 겸하고 있어 다음에 다시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저 마을에서 연박(連泊)을 하리라 생각하였다.
길 양옆 저 멀리 보이는 건 이어진 산들뿐이다. 날씨가 우중충하다. 밤에 비가 내렸을까? 흙길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어 질척거린다. 산 아래에서 찬 바람이 올라온다. 어제 털모자 산 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다. 풀은 아직 초록색을 띤 게 많고 나무들도 키가 그다지 크지는 자연스럽게 자란 게 제법 있어 시야가 밋밋하지는 않다. 그런데 흙길 바로 옆에 멧돼지가 그랬을까? 뭘 캐 먹으려고 그랬는지 땅이 여러 군데 헤집어져 있다.
비가 내려 '라에고 데 암브로스'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가는 산길이 미끄러워 조심조심 걸었다. 사진= 조해훈
오전 9시 28분, 그러니까 알베르게를 출발한 지 거의 1시간 무렵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 마을 입간판이 서 있다. 산맥 정상 능선에서 내려간다고는 해도 완만하다. 우리나라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만큼 급경사는 잘 없을 것이다.
'몰리나세카' 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에 암반이 많아 걷기에 만만치 않다. 셀카로 필자의 모습을 촬영했다.
오전 9시 51분, 갑자기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온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퍼부을 것만 같다. 정말 비가 퍼붓는다. 우산도 없고 거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우의를 꺼낼 겨를도 없이 그대로 맞고 걷는다.
'몰리나세카' 마을 초입에 있는 '퀸타 안구스티아' 경당이다. 사진= 조해훈
‘리에고 데 암브로스’ 마을 초입에 산티아고까지 223.6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비가 쫙 퍼붓다가 금방 그쳤다. 마을의 집들이 비를 쫄딱 맞아 젖어 있고 길에도 빗물이 고여 있다. 이 마을 역시 산골 마을이다. 그런데 한 집을 정비를 해놓고 순례객들을 위해 2층 베란다에 꽃이 핀 화분을 많이 매달아 놓았다. 바닥에도 꽃 핀 화분이 여러 개 있다. 밝은 꽃들을 보니 마음이 환해진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몰리나세카'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사진= 조해훈
마을 한 가운데를 걸어 통과한다. 카페나 알베르게는 보이지 않는다. 오전 10시 2분, 마을을 벗어나 순례길로 접어드는 왼편에 수국꽃이 조금 시들었지만 피어 있다. ‘이 수국꽃 역시 관청에서 배려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흙길은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길이 좁은 데다 돌길이다. 게다가 미끄럽기까지 했다. 바닥에 암반까지 계속돼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었다. 특이한 것은 흙길 옆의 풀은 초록색이지만 억새와 잡풀들은 누렇게 쇠했다.
몰리나세카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14세기 건축물인 '산 니콜라스 성당'이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0시 30분, 하늘의 먹장구름이 새카매진다. 또 비가 내리려나? 산길은 비슷한 형상으로 이어졌다. 오전 10시 48분, 이제부터는 다시 오르막인데 바닥이 미끄러운 암반이다. 그러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오전 11시 19분, 도로로 내려섰는데, ‘몰리나세카’ 마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2분가량 걸어 내려가니 도로 오른쪽에 교회가 있다. 퀸타 안구스티아 성모 경당이다. 여기서 도로를 따라 3분 더 내려갔다. 왼쪽 메루엘로(Meruelo) 강 건너편에 마을이 있고, 매우 견고하게 쌓은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니 왼쪽에 14세기의 건축물인 산 니콜라스 성당(Lglesia de San Nicolas de Bari)이 산 능선을 배경으로 우뚝하게 서 있다. 몰리나세카 마을은 아름다워 일부러 이 마을에서 묵는 순례자들도 제법 있다. ‘메손 로마 다리(Meson Puente Romano)’라는 이름의 식당이 눈에 뜨인다. 건물벽이 노란색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예쁘다. 오전 11시 37분, 자전거로 산티아고 길을 순례하는 두 사람이 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분 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몰리나세카' 마을 길에 자전거 순례자들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조해훈
그 옆에 고전적인 분위기의 ‘에스파냐’(Espana)라는 이름을 가진 바(Bar)가 있어 들어갔다. 오전 11시 39분이었다. 점심시간도 됐다. 카페에 어젯밤 ‘엘 사에보’의 같은 알베르게에서 잤던 이태리 젊은 부부와 젊은 이태리 남자가 앉아 있었다. 뭘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메뉴를 보니 샌드위치가 있어 추가로 주문했다. 주인아저씨 혼자 커피와 주문한 메뉴를 준비했다. 이태리 사람들에게 나온 걸 보니 그들은 맥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먹고 바로 일어섰다. 필자는 오랜만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어 기분이 좋았다. 다 먹고 다른 손님도 없고 해서 그냥 앉아 있기가 뭣해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해 천천히 마셨다.
필자가 점심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은 'ESPANA' 바(Bar) 내부. 사진= 조해훈
제법 앉아 있다 일어서는데 이태리 젊은 남자가 앉았던 테이블에 큰 물병이 놓여 있었다. 주인아저씨에게 “이 물병 여기 것입니까?” 물으니 “아닙니다. 손님이 두고 간 모양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리하여 그들도 아마 폰페라다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숙박할 것이라 짐작하고, 그 물병을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낮 12시 23분이었다. 대략 45분 동안 바에 앉아 있었다.
'몰리나세카' 마을 모습. 사진= 조해훈
길에 주민과 순례자가 걸어가고 있다. 5분 정도 걸으니 돌 십자가가 길 한 가운데 세워져 있다. 그 십자가를 지나 2분 더 걸어가니 아주 오래된 듯해 보이는 파란 승용차가 한 대 서 있다. 운행하는 것인지, 순례자들이 보라고 장식용으로 세워 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다. 승용차 앞과 뒤, 옆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다시 길을 걸었다.
몰리나세카' 마을 끝부분에 있는 오래된 승용차. 사진= 조해훈
승용차 인근에 일본인들이 만든 쌈지공원 같은 게 있고, 석상이 세워져 있다. 석상의 주인공이 이곳 산티아고 길을 지나갔다는 내용이 비석에 적혀 있다. 거기를 지나니 어르신 두 분이 버스 정류소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도로를 따라 걸었다.
'몰리나세카' 마을 끝 부분에 있는 버스 정류소에서 어르신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53분, 순례길은 도로에서 아래 흙길로 연결됐다. 오후 1시 8분, 다시 도로로 올라섰다. 이 부분부터 오늘의 종착지인 폰페라다까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도로를 따라 걷는 길과 흙길이다. 선택해서 걸으면 된다. 필자는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두 길은 서로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폰페라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지역에 있는 아파트와 건물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39분, 폰페라다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부터 폰페라다 도시 영역이라는 뜻이다. 도시를 향해 쭉 걸어 들어갔다. 오후 1시 58분, 마침내 폰페라다 공립 알베르게 입구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방과 침대를 배정받았다. 작은 방이 몇 개 있었다. 옆 방에 이태리 젊은 부부와 이태리 젊은 남자가 있었다. 가지고 온 물병을 이태리 남자에게 주니 무척 고마워했다. 필자가 쓰는 방에 대구에서 두 번째 산티아고 길을 걷는 부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폰페라다'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 필자는 여기서 1박했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엘 아세보 데 산 미구엘’에서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15.5km를 걸었다. 고도는 1146~506m였다. 생장에서 폰페라다까지 총 563.8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