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증호 시인의 「시조, 사랑을 노래하다」(98) 미투리 신고 박물관에 오다 - 김정
손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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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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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리 신고 박물관에 오다
김정
어찌 날 혼자 두고 그리 멀리 가셨나요
지금껏 내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해마다 봄풀은 돋아 설움으로 번져요
어린 것 철이 들면 무어라 말할까요
저 앞집 대감댁엔 담을 넘는 웃음소리
차라리 눈 귀 멀다면 가슴 반쪽 남을 텐데
산 넘고 물을 건너 어린 원이 보고파서
미투리 꺼내 신고 월영교 밟는 당신
에움길 물어 물어서 박물관에 오셨네요
1998년 4월 안동시 정상동 일대 2기의 무덤에서 미라와 함께 100여 점의 복식이 출토되었습니다. 시신은 모두 두 겹으로 된 목관에 들어 있었고 석회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습니다. 나무의 결이 생생한 하나의 관을 열자, 망자의 가슴을 덮고 있는 ‘원이 아버지께’로 보내는 초서체 한글 편지가 나왔습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세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는 ‘여보,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으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살아서는 올 수 없으니 꿈에라도 다녀가라는 말을 통해 먼저 저승으로 떠난 지아비에 대한 지어미의 그리움을 사무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원이 엄마가 환생한 듯 원이 아버지께 편지를 쓰는 시인이 있습니다. 시인은 ‘어찌 날 혼자 두고 그리 멀리 가셨나요.’ 원망하듯 애원하듯 망자를 부릅니다. 대답이 없자 ‘차라리 눈 귀 멀다면 가슴 반쪽 남을 텐데’라며 다 녹아버린 가슴으로 슬픔을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눌러 400여 년 전의 사랑을 불러옵니다. ‘에움길 물어 물어서 박물관에’ 온 편지와 미투리를 보며 시인은 원이 엄마가 된 듯 구구절절 서럽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노래합니다.
◇손증호 시인
▷2002년 시조문학 신인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부산시조 작품상, 성파시조문학상, 전영택 문학상, 나래시조문학상 등
▷시조집 《침 발라 쓰는 시》 《불쑥》, 현대시조 100인 선집 《달빛의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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