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디케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안대로 눈을 가리고, 왼손엔 저울을,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어떠한 편견도 없이 오직 사실에 근거해 판단한다는 의미로 눈을 가렸다. 저울은 공평하고 엄정한 법의 기준을 상징하고, 칼은 강력한 법의 집행력을 나타낸다.

그리스 신화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에 형성되었다.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문명과 문화가 확립되고 발전하던 때이다. 한데 왜 ‘정의의 여신’ 디케가 필요했을까?

이미 발전한 마을에서 ‘새마을 운동’은 필요가 없다. ‘금연 캠페인’은 이미 흡연율이 낮은 사회에서는 별무효용이다. 자연이 잘 보존되고 있는 지역에서는 ‘환경 보호 캠페인’을 하지 않는다. 선진국인 우리나라에서도 불평등 문제는 제기되나 ‘빈곤 퇴치 운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사회적 운동(캠페인)은 그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낸다. 그리스 신화에 ‘정의의 여신’ 디케가 등장한 사회적 맥락은 그 시대에 ‘법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강력한 표지(標識)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和平)을 주려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劍)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칼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가 나타나고, 그 600~800년 이후 나사렛 예수도 칼(劍)을 들고 역사에 등장한다. 디케가 ‘정의의 칼’로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했다면, 예수가 굳이 다시 칼을 들고 나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칼을 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不和)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怨讐)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合當)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10:35~38-

예수는 당시에도 만연했던 가족이기주의를 단칼에 부정하고, 진리(정의, 의로운 삶)를 따르라고 설파한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가족 간의 불화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화를 넘어 가족 간에 원수가 될지언정 진리를 따라야 한다고 설파한다. 가족 이기적 전통을 혁파하려 했다는 점에서 예수는 그 시대의 혁명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가족 간에 불화를 겪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되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대가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실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결국 ‘자유’가 목적이다.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뉜다. ‘~~로부터의 자유’, 곧 빈곤, 억압, 차별 등의 외부 요인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는 소극적 자유이다. 반면에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자아를 실현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유는 적극적 자유이다. 교육· 창작· 직업 선택·참여의 자유 등이다.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예수의 자유는 아마 소극적 자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설파한 자유에서 소극적 자유도 적극적 자유도 아닌, 아주 중요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곧, ‘미혹에서 벗어나는 자유’이다.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순간이고, 고통과 슬픔은 세월인 인생살이에서 과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까?

능동적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데 급급했던, 삶에 지친 고대인들에 예수가 짜잔 등장하여 삶의 의미를 제시한 것이다. 곧, 내가 (삶의) 진리를 알려 주겠다. 그 진리를 알면 자유케 된다. 곧,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유케 된다거나 삶의 의미 알게 된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쳐 준 진리, 그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점이다.

예수는 앞 절(8:31)에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했다. ‘거’는 머무를 거(居)일 것이다. 이 ‘거’는 무슨 뜻인가? ‘The Bible’에는 “If you continue in my word, ,...‘로 되어있다.

이 구절은 ‘예수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분명 부자인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고 가르쳤다. 그렇지 않으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입으로 머리로 ‘예수를 믿는 것’과 손발로 가슴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땅과 하늘만큼 차이가 나는 일이다.

불교와 유교에서의 ‘부자와 빈자’ 문제를 다루려 하는데, 길어졌다. 다음 편으로 넘긴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