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기적 동물이어서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자기중심 세계를 구축한다. 적어도 본능적으로는 그렇다. 우리들의 이기성, 혹은 자기중심성의 좋은 예가 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자신도 끼어있는 단체 사진을 발견했을 때, 맨 먼저 누구를 찾는지 상기해 보자. 목숨을 바쳐 사랑한다는 애인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도 자신을 먼저 찾는다.

이런 인간의 이기적 심리구조는 언어 표현에도 반영된다. 언어학에 “나 먼저” 원리(“me first” principle)라는 게 있다. 시간이나 공간에 관한 한 쌍의 단어를 열거할 때, 화자에게 가까운 것을 먼저 들고, 먼 것을 나중에 든다는 것이다. 여기저기(here and there), 이것저것(this and that), 조만간(早晩間, sooner or later), 국내외(國內外, home and abroad), 차일피일(此日彼日), 금명간(今明間) 등.

뜻은 비슷하더라도 ‘저기여기’, ‘만조간’, ‘국외내’, ‘피일차일’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예외처럼 보이는 구절이 있다. ‘너와 나’(you and I)이다. 이는 상대방을 앞세우려는 경어법 또는 공손어법에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 언어습득 과정 중의 어린아이는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늘 ‘나와 너’(me and I)라고 말한다.

“나 먼저”는 개인주의적 상대주의 진리관으로 이어지는 듯이 보인다. 일찍이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90년경~기원전 420년경)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신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있는지도, 있지 않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앎을 가로막는 것이 여럿이기 때문이니, 불분명함과 인생의 짧음이 그것이다”고 설파했다.

모든 진리와 가치 판단은 인간 개개인의 인식과 경험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이어서, ‘콩깍지가 씌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제 눈에 안경’이라고 인정도 한다. 어차피 인생사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인 것이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무지함을 비난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다’거나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며 무지와 무관심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실이라는 것은 관점의 문제일 뿐(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고, “진실은 사람마다 다르다.”(안톤 체호프)

인간 본성의 스펙트럼은 넓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도 할 수 있다. 역사가 증명한다. 현 대한민국의 정치현실도 이를 방증한다. 보통 우리들은 스펙트럼의 양끝인 최선과 최악 사이의 어딘가의 행동을 한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환경에 따라 지금 그 어딘가에서 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행동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사회적 압력으로 본성을 제어하거나 교육으로 순치(馴致)하지 않으면, 보통 더 나쁜 쪽의 행동으로 기운다는 사실이다. ‘말할까 말까’, ‘먹을까 말까’, ‘참을까 말까’, ‘지금 할까 말까’에서 본능에 맡겨 놓으면,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할까?

우리는 ‘말하고, 먹고, 참지 않고, 미룬다.’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이익이다. 그러나 어려운 쪽을 선택할수록 장기적으로 더 이익임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말하지 않고, 먹지 않고, 참고, 지금 바로 했으면’ 더 좋은 결과와 만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이기적 본성과 상대주의적 진리관은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주의적 진리관은 이기적 본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철학적 접근이다. 이기적인 자들이 자기 편의대로 ‘내로남불’과 같은 이중 잣대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악용할 뿐인 것이다.

상대주의적 진리관은 단순히 진리를 상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고,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거나 도달하기 어려움을 드러내는 철학적 관점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시각과 배경을 통해 진리를 다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상대주의적 진리관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관점, 사회적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기심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내로남불’과는 달리,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인정하고, 더 나은 이해를 위해 겸손과 협력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 본성에 지배를 받는 자들은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내로남불’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급기야 ‘정치적 부족주의’로 나타난다. 서부지법 습격사건, ‘탄핵 반대’ 시위 등으로 대한민국에서 현재화하고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우리 대 그들”로 나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중심으로, 자신의 집단에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고, 타 집단을 배척하는 현상이다. 이는 감정적 충성심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며, 논리와 합리적인 논의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옳고 선하며, ‘그들’은 틀리고 악하니, ‘그들’을 배제하고 처단해야 한다는 극단적 논리까지 나온다.

4대 문명을 이룩하고 3,000여 년이 지난 축의 시대에도 정치적 부족주의의 횡행으로 폭력과 혼란으로 민중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아야했다. 축의 시대에서 2,500여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대한민국은 물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정치적 부족주의가 창궐하고 있다.

축의 시대 모든 문명권의 현인들이 ‘인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일치된 견해, 혹은 지혜는 ‘황금률’이었다. 지금 역시 정치적 부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도 ‘황금률’이지 않을까?

과학·기술과 윤리·지혜는 비례하여 발달하지 않았다. 가히 하나는 기하급수적이고 다른 하나는 산술급수적이다. 이 괴리는 무슨 함의를 지닐까? 신의 계시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추론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지 않는가?

누군가, 아니 경제 논리적으로 필연인 소수가 AGI를 독점하여 초인적 능력을 가질 때, 그 독점한 소수가 “우리 대 그들”로 나누는 정치적 부족주의에 갇혀 있다고 치자. 아니, 2,500여 년 전의 황금률도 체화하지 못한 인류는 앞으로 겨우 10여 년 후에 닥칠 AGI 시대에도 여전히 ‘정치적 부족주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하자. “우리 대 그들”에서 ‘우리’는 인류의 10% 이내이다. 인류 대부분은 ‘그들’로서 배척의 대상이라는 것을. AGI가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더라도, 인류 대부분, 너와 나는 배척당해 절멸하거나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