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한글판 표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혹은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로 풀 수 있는 황금률, 이는 초등학생들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머리 희끗한 교장 선생님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인간은 동굴에서 산 이후로 동물이나 인간 약탈자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아왔다. 우리 자신의 공동체와 가족 내에서도 다른 사람이 우리의 이익을 해치고 자존감을 파괴하기도 한다. 하여 우리는 지속적으로 언어, 정신, 신체를 이용한 반격과 선제공격을 준비한다. 곧 이기적인 마음가짐은 살아남기 위한 삶의 조건으로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자비(황금률, 공감)는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달갑지 않은 덕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와 동일시하는 에고(ego, 자기중심적 자아)를 옆으로 밀어놓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곧, 가장 강력한 본능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적 수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고는 이 수고를 감내하기는 어렵다.
중세와 근·현대의 종교적 갈등과 전쟁의 원인은 대부분 종교적 자기중심주의 때문이었다. ‘나의 신앙이 너의 신앙보다 낫다’ 사람들은 신앙에 자신을 던져 넣으면, 시비를 걸고, 간섭을 하고, 심지어 불친절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자비를 보이기보다는 ‘옳은 쪽’이 되는 것을 선호한다. 하여 초기 조로아스터 교도처럼 인류를 두 적대적 진영으로 나누고, 신자들의 진영이 서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대가를 치르며 목격했듯이, 이런 태도는 곧바로 잔혹행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것은 또한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폭력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보통 폭력을 휘두른 자에게 되돌아간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법이다. 실제로 강제 수단은 사람들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축의 시대의 모든 종교에서 사람들은 배타성, 잔혹성, 미신 심지어는 잔혹 행위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축의 시대 현인들의 가르침에는 자비, 존중, 보편적 관심이라는 이상을 공유했다.
현인들은 야만적이고 압제적인 행동을 막으려 할 때, 단지 외적인 명령만 내려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안회가 유가의 고상한 원리를 설파하여, 위나라의 제후를 개혁하려고 시도하려 한 것을 공자는 쓸모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고상한 원리 설파가 통치자의 잔혹을 행동을 낳는 마음속의 무의식적 경향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축의 시대 현인들은 동시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서로 다른 문명권에서 교류가 없었지만, 서로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은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방증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재교육하려고 교육을 받고 노력을 기울이면, 인간성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각자의 신학적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의 가르침은 폭력의 주원인인 자기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바로 황금률의 감정이입적 영성을 장려하는 것이다. 현인들은 이것이 사람들을 다른 수준의 인간 경험으로 안내한다는 것을 알았다.
곧, 사람들은 ‘엑스타시스’(ecstasis, 자아를 초월함), 즉 습관적이고 자신에게 얽매인 의식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기’ 경험하며, 이때 흔히 하느님, 니르바나, 브라만, 아트만, 도(道)라고 부르는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발견한 다음, 자비로는 삶을 사는 게 아니다. 훈련된 자비의 실천 자체만으로 초월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료, 형제나 자매, 적국(敵國)에 관하여 뭔가 적대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유혹을 느낄 때마다, 만일 남이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떨지 생각하고 참는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선 것이다. 바로 초월의 순간이다.
이런 태도가 습관이 되면, 사람들은 항상적인 엑스타시스의 상태에서 살 수 있다. 오묘한 황홀경에 빠지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살기 때문이다.
랍비 힐렐은 이것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유가의 ‘양보’ 제의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고안된 것이다. 수행자는 요가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힘사(비폭력)에 숙달되어야 했으며, 단 하나의 말이나 행동으로도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축의 시대 현인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을 그들의 의제의 맨 위에 두었다. 그들에게 종교란 곧 황금률이었다. 현인들은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과 자기중심주의와 증오와 폭력에 집중했다. 이것을 초월하면, 여전히 에고 원리의 함정에 갇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지복(至福)의 상태’에 이른다고 설파했다. <계속>
*이 글은 카렌 암스트롱(1944~)의 『축의 시대』(정영목 옮김/교양인/2010)에 크게 기대었음을 밝힙니다.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