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소크라테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기원전 5~6세기에 동양은 서양의 존재를, 서양은 동양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만남이나 교류를 통한 사상의 영향을 주고받을 턱이 없다.
한데도 당대에도 현인으로 인정받았고, 그 가르침이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류의 두 스승의 사상이 큰 틀에서 보면 거의 같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자각’, ‘지행일치’(知行一致), ‘다이모니온’(daimonion)에 해당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1.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논어/위정17-
이는 결국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같은 뜻이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에 방점을 두었고, 공자는 ‘지적 정직함’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는 두 현인의 사회적 배경이 다른 탓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치가 발달한 도시국가 고대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아테네에서는 소피스트(Sophist)들이 등장해 웅변술과 논변술을 가르치며 지식을 팔았다. 소피스트들은 정의와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기에, 아테네 사회에 도덕적 혼란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의와 진리를 찾고자 했다. 그래야 도덕적 행동의 기준이 확립되어 혼란을 종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먼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와 진리를 찾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채 확립되지 않은 혼란기인 춘추시대에 활동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자는 무너져가는 주례(周禮)를 회복해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덕치(德治)를 시행하고자 했다.
덕치에서 군왕을 보좌하고 실무자인 지식인(儒士)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여 지식인들에게 학문을 통한 올바른 지식 습득과 도덕적 삶을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 속에서 활동하며, 철학적 사상도 이에 따라 형성되었다. 결국 사회적 배경에 따라 접근 방식만 다를 뿐, 진정한 지식과 도덕적 삶을 중시한 점에서는 같다.
#2. “오직 인자(仁者)여야 사람을 제대로 좋아하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논어/이인3-
소크라테스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주장했다. 지식과 그 지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진정으로 알면, 당연히 그 앎대로 행동한다는 주장이다. 선과 정의와 용기가 무엇인지 알면, 인간은 선하고 정의롭고 용감해진다는 것이다.
위 ‘논어/위인3’도 같은 뜻이다. 설명은 『논어집주』(성백효 역주)의 해설로 갈음한다.
「惟란 말은 홀로라는 뜻이다. 사심(私心)이 없는 뒤에 좋아하고 미워함이 이치에 맞을 수 있으니, 정자(程子.伊川)가 말씀하신 ‘그 공정함을 얻었다’는 것이 이것이다.
○유씨(游氏)가 말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천하의 똑같은 심정이다. 그러나 사람이 매양 그 올바름을 잃는 것은 마음이 매여 있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인자(仁者)는 사심(私心)이 없으니, 이 때문에 제대로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3. “민중의 뜻을 이루고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가히 지혜롭다 할 것이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논어/옹야20-
“공자는 괴이한 힘이나 어지러운 귀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다.”(子不語怪力亂神) -논어/술이20-
“국가가 흥하려 할 때에는 백성의 말을 듣고, 망하려 할 때는 신의 말을 듣는다.”(國將興 聽於人 將亡 聽於神) -『춘추좌씨전』/장공 32년(기원전 662년)-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 ‘다이모니온’(Daimonion)에 귀 기울였다. 이를 통해 인간 자신이 진리를 발견하고, 보편타당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공자 또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여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곧,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현인은 모두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외부의 권위나 신의 명령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간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고대 동·서양의 두 현인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말년은 결코 평온하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무시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배심원 재판에서 유죄 280명과 무죄 220명으로 유죄 평결을 받았다. 형량을 결정하는 투표에서는 360명 사형과 140명 벌금형으로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공자는 병석에서 제자 자공에게,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며 서글픈 속내를 풀어놓았다. 그 후 7일 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소크라테스는 향년 70세였고, 공자는 72세였다.
현인이 왜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까? 간단히 말하면, 대체로 그들의 사상은 당대로 봐서는 혁신적이어서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직면한다. 그리고 대중이 그들의 사상을 성숙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쨌건 고대 어느 한 시기에 동·서양에서 현인이 출현하여 거의 비슷한 사상을 설파했다. 단순한 우연일까? 부족,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인류에 대한 어떤 함의를 갖는 것은 아닐까?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축의 시대(Axial Ag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에 영감을 받아 영국의 비교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1944~)은 『축의 시대』란 책을 썼다.
인류의 정신사에 자양분이 된 위대한 철학적·종교적 전통이 태어난 ‘축의 시대’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살펴보자.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