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2010년에 라스즐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샀다. 그것은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적인 상거래였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였다.

2021년 11월에 1비트코인 가치는 6만9,000달러가 넘었다. 따라서 핸예츠가 피자 두 판 값으로 지불한 비트코인의 가치는 6억9,000만 달러였다. 피자 몇 백만 판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피자의 열량은 2010년에나 2021년에나 변함없는 객관적 현실이지만, 비트코인의 금전적 가치는 같은 기간 동안 비트코인에 대한 사람들이 말하고 믿는 이야기에 따라 극적으로 변한 상호주관적 현실이다. -유발 하라리(김명주 옮김)/『넥서스』(2024)-

# 2. 자기 재산을 아끼고 남의 재산을 탐내는 사람은 (慳貪於物)
마귀와 한식구요 (是魔眷屬)
자비로 보시하는 사람은 (慈悲布施)
부처의 자식이다 (是法王子)

높은 산 큰 바위는 (高嶽峩巖)
지혜 닦는 사람이 거처할 곳이요 (智人所居)
푸른 소나무 깊은 골짜기는 (碧松深谷)
수행자가 깃들일 곳이다 (行者所棲)

주리면 나무열매 먹어 (飢飧木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慰其飢腸)
목마르면 흘러가는 물 마시어 (渴飮流水)
그 갈증을 식힐지니라. (息其渴情)
-원효/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라스즐로 핸예츠가 비트코인을 ‘엿 바꿔 먹지 않고’, 10년 정도만 잊은 듯 처박아두었다면, 그는 오늘 1조원대의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핸예츠의 사례에서 ‘부의 축적’(부자)에 대한 2가지 통찰을 할 수 있다.

첫째, 부의 축적은 행운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핸예츠와 달리 비트코인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수많은 억만장자를 상기해 보자.

둘째, 부 자체는 그 효용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인적이 없는 오지에서 5만원권 지폐는 빵 하나의 쓸모에도 못 미친다. 유발 하라리는 ‘상호주관적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것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부에 대한 관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넥서스』의 다른 부분을 또 인용한다.

“한 억만장자가 전세기가 추락하여 지폐와 채권으로 가득 찬 슈트 케이스와 함께 무인도에 달랑 혼자 남겨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상파울루나 뭄바이에 있었을 때는 이 종이들만 주면 다른 사람들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보호해주고, 전세기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정보 네트워크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단절되는 즉시 지폐와 채권은 무용지물이 된다. 무인도의 원숭이들에게 그 종이들을 주면서 음식을 달라거나 뗏목을 만들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앞의 책, pp.70~71-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 인간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부의 축적에 작용하는 결정적인 요소 세 가지는 ‘상속과 가족 배경’, ‘행운과 기회’, ‘능력과 노력’이다. 물론 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이 중층적으로 작용하나, 거칠게 요약하면 이 세 가지라는 말이다.

앞의 두 가지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다. ‘주어질 뿐’이다. 이뿐 아니라 개인이 ‘능력과 노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부의 축적을 이룰 수 없다. 신분사회에서 능력 있는 하층민이 ‘노오~력’한다 해도, 상층민만 부유하게 할 뿐이다.

원효(617~686)는 인류 역사의 모든 현인들이 품어온 영원한 숙제 ‘진리(법)는 내 밖의 세상에 있는가, 내 안(마음)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그 유명한 ‘해골 물’ 사건을 통해서이다.

45세 때인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날이 어두워져서 당항진 근처의 한 동굴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더듬어 자리끼를 달게 마셨다. 아침에 깨어 보니, 동굴은 파묘된 무덤이었고, 그 자리끼는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욕지기가 솟고 급기야 토했다. 토하다가 문득, 한 깨침을 얻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구나!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며, 또한 이 세상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온갖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인 것을.’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거늘 어찌 밖에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 하고는, 보따리를 챙겨 신라로 되돌아갔다. -『송고승전』/의상전-

원효는 이 깨달음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는 끝을 냈다. 상구보리의 짝인 ‘하화중생’(下化衆生), 곧 중생을 도와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자족하면, 재물에 인색한 부자와 다를 바 없다.

원효는 하화중생의 방법으로 ‘초발심수행장’에서 ‘자비(慈悲)로 보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보시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