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25년경)의 『역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궁전에 머물던 그리스인들을 불러, 부모의 시신을 먹는다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후 왕은 부모의 시신을 먹는 풍습을 가진 칼라티아이 인디언들과 그들의 말을 통역해줄 그리스인을 부른 뒤, 부모의 시신을 화장한다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치를 떨며 그런 불경한 행위는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으며, 개인적으로 “관습은 모든 것의 왕”이라고 말한 핀다로스(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가 옳았다고 본다.」
그리스인들은 고대 사회의 지식인들임에 분명했으나, 다리우스 왕은 그들의 현학적인 수사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러했을지 모른다.
“모두가 유식하다고 칭송하는 너희 그리스인들이라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너희만 옳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도, 너희만 옳은 이유를 잘도 찾아내는구나.” -윌리엄 번스타인(노윤기 옮김)/『군중의 망상』(pp.16~17)-
부모의 시신을 먹다니! 현대인들은 진저리쳐지는 야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야만과 문명의 확실한 기준이 있을까? 본시 인류는 자신이 처한 자연환경에 적응함으로써 생존과 번영을 도모했다. 전 세계에 분포한 각 부족이 처한 자연환경은 다르다. 따라서 각기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인생사에서 탄생과 죽음은 가장 중요한 이대사(二大事)이다. 이 죽음에 대한 사회적 처리 방식이 장례 풍습이다. 이 장례 풍습은 자연환경과의 대화, 타협, 적응의 산물이다. 여기에 더해 당대 사회적 가치와 종교적 믿음이 더해지면, 그 사회의 관습, 곧 문화로 굳어진다.
칼라티아이 인디언들은 현재의 파키스탄과 인도 북서부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지역은 척박한 땅이어서 숲이 드물었다. 하여 매장과 화장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자연환경에다 부모의 시신을 먹음으로써 부모의 영혼이 자손에게 이어짐과 동시에 부모의 지혜와 힘을 물려받는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시신을 먹는 장례 풍습이 관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 믿음이 발명된 것이리라.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지역에서는 수장(水葬)이 행해졌다. 풍부한 물이라는 자연환경에, 물이 시신을 정화하고 물에 떠내려감은 저승으로 인도된다는 종교적 믿음에 덧붙여진 결과이다.
인도와 같이 나무가 풍부한 지역에서는 화장(火葬)이 일반적이었다. 불은 정화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혼이 불을 통해 정화되고 해방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옥한 땅이 많은 지역에서는 토장(土葬)이 흔했다. 이 풍습은 땅이 시신을 받아들여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믿음과 연결된다.
티베트와 같은 고산 지역에서는 나무가 부족하고, 땅이 얼어서 시신을 매장하기 어려운 자연환경이기 때문에 조장(鳥葬) 풍습이 발달했다. 시신을 바위나 산중턱에 두고 독수리나 까마귀, 매 같은 조류가 뜯어먹게 하는 장례이다. 새가 시신을 쪼아 먹으면, 고인의 영혼이 시신을 먹은 새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는 믿음을 가졌다.
풍습과 관습과 문화에 야만/문명의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연환경과 사회적·종교적 믿음이 다를 뿐이다. 지금 우리는 대부분 화장을 하고, 화장 후 유골을 수목장과 해양장을 처리한다. 삶과 자연환경과 사회적 믿음에 적응한 장례일 뿐이다. 수목장과 해양장이 매장(토장)보다 고급한 문화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작은 차이에 의한 도취”(narcissism of small differences)하는 동물임을 프로이트는 예리하게 지적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운동화와 운동복의 유명한 브랜드이다. 각 브랜드의 팬들은 자신이 선택한 브랜드가 서 낫다며 상대 팬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자기가 태어난 고장,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맹목적으로 애향심, 애국심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를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남의 문화를 저급 혹은 야만이라고 여기는 반지성주의가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있다.
하여 전 세계적인 갈등과 우리 사회 내의 불화는 정의론이나 인권 등의 거대 담론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작은 차이에 의한 도취’에서 비롯된 게 주를 이루지는 않는가 하는 서글픈 우려를 하게 된다.
‘작은 차이에 의한 도취’하는 유아적 지성으로 AGI 시대를 맞는다면, ‘인간의 지능을 갖춘 기계’인 AI 시스템을 과연 인간이 통제할 수 있을까?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