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미혜 씨 집을 팔고(8)
스카이라이프 회사에 연락하니 지금 계약을 해지하면 5년 계약의 위약금을 30만 원이나 내야 된다고 했다. 언제 내가 5년 예약을 했느냐 이건 배보다 배꼽이 큰 것이 아니냐고 따지자 보통 처음에 신청할 땐 텔레비전화면이 잘 나오는가에만 신경을 쓰지 계약기간은 근성으로 듣고 사인을 하는 편이라면서 위약금이 힘들면 다시 스카이라이프를 신청하되 이전하는 것으로 하면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영순씨와 함께 월내의 오리 농장으로 가서 부스터와 리모컨을 가져오니 다행히 큰돈이 들지 않고 종결되었다.
연제문인회에서 동인지원고제출을 종용해 이메일로 부치려니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서부리에 있는 K.T저점을 찾아가 신청하니 거기엔 전파가 사각지대라면서 통신주를 몇 개나 세워야하는데 사유지라 어렵다고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지금은 전기나 수도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이 필수인 시절에 당연히 정부에서 해줘야 되지 않느냐고 따지니 무려 사오백 만원이 되는 공사를 한집 보고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이 국민의 기본권 행복추구권인 인터넷을 통신공사가 아닌 박근혜정부의 일이라 생각하고 청와대로 가서 신청해야 되냐고 따지니 한참이나 고민하던 직원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지사장실로 들어가서 한참 후에 나와
“지금 그 곳에 건축허가가 세 곳이 나서 한 동이 준공된 것으로 되어있네요. 앞으로 계속 집이 늘어나 잠재수요가 늘 것으로 보고 공사비의 60%를 지원하고 나머지 180만 원을 세 집에서 60만 원씩 나누어서 내면 되겠습니다.”
해서 현주씨에게 연락하니 김기연씨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서 금방 해결이 되었다. 마침내 인터넷이 소통되어 우선 메일의 편지함을 열어보던 열찬씨가 대부분이 연금공단에서 통보되는 연금입금과 홍보목록 사이에서
- 이승암 국장 별세 통보. 발신자 이청희 -
하는 제목을 보고 흠칫 놀라 내용을 켜보니 벌써 두 달 전에 사망해 빈소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아이구야!”
월남참전용사인 그가 제초제후유증인지는 몰라도 평생을 간이 나빠 맥을 못 쓰고 살고 심지어 서울법학원으로 사무관시험공부를 하러가서도 도로 돌아올 정도로 건강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이승암, 아, 이승암 국장...”
참으로 착하고 성실하며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좁은 서구청이란 조직속의 경쟁자라는 점에서 참으로 많은 갈등 속에서 청춘을 소진시킨 사람이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긍정적이며 조직에 충실하고 상관을 잘 모시며 눈치가 빨라 동료와 부하들에게도 늘 신임을 받고 인기가 많던 사람, 예향 통영사람답게 축구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하다못해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사람, 서글서글한 눈빛과 다정한 목소리, 그러나 단 한 번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다가가보지 못한 사람, 하나는 김모청장의 심복으로, 하나는 눈 밖에 난 사람으로 가장 빛나야 할 사무관시절을 하나는 연민의 눈빛으로, 하나는 원망마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했던 사이,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참으로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인식하며 되도록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은연중에 배려하여 마음을 상하게 하려 않으려고 하던 마치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처럼 서로의 마음과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서로 두려워하면서도 살가워하던 지음(知音)의 사이, 비록 열찬씨 자신이 한 수 아래의 사마의처럼 늘 상대를 선망하고 두려워하며 주춤주춤 따라가던 사이였지만 그래도 마주하면 늘 예의를 다 하던 다정한 사이...
1994년 열찬씨가 사무관시험을 치던 해 열찬씨는 기획감사실기획계장에 이승암씨는 감사계장으로 또 이청희씨는 예산계장으로 같은 방에 근무하고 있었다. 2년 전 감사계장으로 근무하다 교통사고로 입원해 한 해를 쉬고 기획계장으로 복직했을 때
“가형, 마땅히 복직을 축하해주어야 함에도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경쟁자로서 차마 축하를 드리지 못 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묘한 인사를 했다. 열찬씨보다 3살이 많고 시청의 시정과라는 핵심부서에서 당시 시정과장이던 김모청장 밑에서 신임을 받아 김모청장이 서구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데리고 온 사람으로 서구의 터줏대감으로 지내온 다른 계장들 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판에 서구출신도 아닌 동래구출신, 그것도 단 한번 구청에서 근무한 일도 없는 동직원출신 열찬씨에게 서구청 서열1번에다 고과점수 1등을 받는 기획계장자리를 빼앗긴 섭섭함 때문이었다.
열찬씨는 서구청에 전입 온 후 젊은 부하직원들과 격의 없이 지내며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사고무친의 자기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몇 가지 혁신적인 제안과 아이디어를 내어 구청장의 관심을 얻어 동사무소사무장에서 구청계장의 진입, 구청의 말단 계장에서 감사계장으로 영전하는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입원했다 복직할 때 전임 변모 구청장은 자신의 재직 중에 다친 사람이라고 아직 제대로 걸을 수 없으니 앉아서 기획만 하면 되는 기획계장으로 발령 내면 당사자도 편하고 구청 측에서도 내재된 아이디어와 문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명희기획감사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기획감사실의 계장으로 같이 근무하면서 이청희 예산계장이 고등학교동문인 정모 법무계장과 의기투합 끊임없이 열찬씨와 주무계인 기획계직원들을 괴롭히는 동안 모든 걸 꾹 참고 지나가는 말 한마디일망정 좋게 하고 늘 열찬씨를 걱정하고 배려하던 신사였다.
같은 방에서 승진시험자격을 얻은 셋과 또 한사람 사회과 김길택계장의 넷이 서울대학교 앞 서울법학원에 등록하고 강의를 들었지만 몸이 약한 이승암국장은 객지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부산 집으로 내려갔는데 시험결과 이청희, 김길택계장은 과목탈락으로 불합격하고 이승암계장은 15명 응시자중에 6등이 되어 3배수의 합격자인 5등에 들지 못했고 몸도 아프고 준비기간도 짧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열찬씨가 단 70일간 벼락치기공부에도 불구하고 고른 득점분포를 보여 3등으로 합격한 것이었다.
그 후 열찬씨가 남부민1동장이 되어 사상초유의 첫 단체장선거에서 공천탈락한 김모청장을 끝까지 미는 바람에 선거후 당선자가 된 변모청장의 눈 밖에 나서 중구청까지 쫓겨나 3년 뒤 두 번 째 선거로 권토중래 김모구청장의 품인 서구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한해 늦게 사무관이 되어 첫 번 째 선거에서 가만히 엎드려있던 이승암국장은 김모청장의 발탁인사의 혜택으로 무려 기획감사실장이 되어있어 부민동장으로 발령이 난 열찬씨보다 다음 서기관승진목표의 레이스에 있어 마치 하나는 이제 출발선상에 서고 하나는 골인지점에 선 것 같은 천양지차를 보였다.
동장으로 또 문화관광과장으로 열심히 일해서 서구청의 어려운 일, 중요한 일은 모두 가열찬문화관광 과장이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열찬씨도 세무과장으로 영전 이제 본격적 승진레이스에 끼어들 때쯤 환경이 급변했다. 김길택과장등 업무보다는 동료나 윗사람의 눈치를 잘 보고 언제나 체제의 동조자가 되어 권력자의 측근에 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임 변모청장의 측근이나 심복으로 알려졌음에도 김모청장의 첫번째 임기 4년 동안에 끊임없이 충성을 바쳐 어느 새 새로운 측근으로 변신했는데 구청장 또는 조직의 입장에 입각해서 열심히 일하고 많은 성과를 올려 신문방송에 호의적인 기사가 많이 날 정도로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업무가 끝나면 달리 구청장의 일정을 알아 기회가 있을 때마자 접근하여 술자리를 가지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슬쩍슬쩍 라이벌에 대한 흠집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주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과 어울리는 열찬씨는 김모청장이 다음 선거에서 상대자도 없이 무투표로 당선이 되자 차츰 입지가 고약해졌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김모청장의 눈길이 싸늘해지며 둘 사이가 뜨악해진 것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 간의 정의, 첫 번째 선거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마지막 3명의 사무관중 하나, 자기 때문에 중구청까지 갔다 온 자신을 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그저 담담하게 기다린 열찬씨는 기획감사실장으로 영전까지는 했으나 이미 미운털이 박혀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감보다는 늘 망설임이 많아 평소에 네 것, 내 것 없이 지내던 친구도 그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했다고 소문이 나면 그를 가까이 하는 것만 해도 왠지 세상의 작은 부귀나 권력에 빌붙는 것 같아 다시는 개별적으로 만나기조차 싫어하는 열찬씨로서는 차마 직접 김모청장을 찾아가 그간의 오해가 무엇인지 물어 해명을 하고 다시 충성을 다짐할 용기도 없었고 이미 그 주변에는 시청에서 같이 근무하던 두 심복들이 국장으로 철옹성을 짜고 있어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내 아무리 힘들어도 명색 글을 쓰는 시인으로서 한갓 승진에 대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맘에 없는 아부나 충성은 하지 않으리란 참으로 비현실적인 자부심도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신문이나 방송에 열찬씨의 작품이나 기사가 게재되고 주변사람들이 열찬씨의 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도 문학도를 자처하는 김모청장의 얼굴빛이 점점 싸늘해지면서 기획계장이나 문화관광과장시절 그렇게 찬탄하고 만족해하던 열찬씨의 인사문이나 권두사를 이제 슬슬 붉은 사인펜으로 고치며 퇴짜를 놓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사석도 아닌 정례조례시간에
“요즘 시도 시 같잖은 시로 시집을 내서 괜히 종이 값만 낭비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 구정에는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
라는 전혀 상식 밖의 훈시를 하며 열찬씨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기관승진기회가 왔을 때 비록 열찬씨보다 사무관승진이 1년 늦기는 했지만 쭈욱 총무과장으로 있어 고과점수가 높은데다 나이도 세 살이나 많은 이승암총무과장이 승진을 하는 것 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인사 그 총무과장 자리에는 당연히 가야할 다음 서열의 열찬씨가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 가고 열찬씨는 신설부서인 지치생활과장으로 보기 좋게 좌천된 것이었다. 민선시대가 아무리 구청장마음대로라지만 그건 좀 심했다, 한때 자신을 위하여 모진 핍박을 견디며 충성을 다하여 귀양살이까지 하고 온 사람을 그렇게 마땅한 이유도 없이 내칠 수가 있느냐는 수근그림이 있고 부산시공무원문인회장으로 이미 시 산하에 널리 알려진 열찬씨가 여기저기 화제에 오르내리고 열찬씨와 시를 잘 아는 고위직으로 퇴직한 몇 몇 김모청장의 동료들이 사석에서 왜 그랬냐고 좀 잘 챙겨주라는 이야기를 해 더욱 김모청장의 분노를 유발했다. 다음 인사에선 또 하나의 신설부서인 방재안전과장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그 혼란의 기간, 열찬씨는 지옥을 걷고 자신은 꽃길을 걷는 동안 이승암국장은 늘 한 때의 경쟁자이던 열찬씨를 늘 걱정하고 배려하며 조금만 어려운 일이나 그건 기미가 보이면 슬쩍슬쩍 귀띔을 하거나 구청장측근 실세과장들이 따로 저녁을 먹고 고스톱을 치는 자리에 일부러 열찬씨를 불러 동석을 시키며 예향 통영에서 자란 인정과 의리를 갖춘 신사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김모청장이 3선을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선거사무를 돕기 위해 이승암국장이 사표를 내고 명예퇴임을 하면서 두 사람의 공식적인 동료관계, 은원관계는 끝이 났다. 그 선거에서 김모청장이 패하자 열찬씨는 동갑이자 전부터 친면이 있는 새 구청장 박모청장으로 부터 부산시 최고참사무관이라는 배려로 생활지원과장, 총무과장으로 영전을 하고 마침내 마치 남들이 다 골인하고 난 뒤 혼자 한참 뒤에 골인하는 선수처럼 멋쩍게 서기관으로 승진한 것이었다.
그렇게 김모청장과 이승암 국장과의 인연이 끊어졌는데 열찬씨가 퇴직한지 3,4년쯤 지난 어느 날 이승암 국장의 전화가 와서 서로 안부를 물은 뒤
“이 국장님, 제 사무실로 놀러 한 번 오시지요.”
“이 국장님, 사무실이라니요?”
“모르셨어요? 김모청장님이 시우회회장으로 계신다는 걸.”
“아, 그랬어요?”
시우회는 부산시의 퇴직공무원, 주로 사무관이상의 간부들이 모이는 모임이었다. 회원각자가 약간의 회비를 내기도 하지만 시청에서 사무실을 제공하고 해마다 상당한 운영비를 지원하는 관변단체였다.
“그 시우회에 제가 사무국장으로 청장님을 모시고 있어요.”
“저런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라더니 퇴직 후에도 곁을 지키는군요.”
하마터면 ‘한번 졸병은 영원한 졸병, 여태 그 그늘을 못 벗어났어요?’ 소리가 튀어나오는 걸 간신히 참는데
“제 방에 바둑판이 있습니다. 이국장하고 저하고 참으로 좋은 적수가 아닙니까?”
“예. 그러지요. 시간 봐서 한번 갈게요.”
그랬다. 침착하고 유연한 스타일의 이승암국장의 바둑과 무모할 정도의 공격일변도인 열찬씨의 바둑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적수였다. 차분하게 판세를 분석하고 집 바둑을 두는 이승암국장을 미처 포석을 할 틈도 없이 밀어붙이는 열찬씨의 그물이 터지지만 않으면 직감이 좋은 속기바둑인 열찬씨가 승리했지만 무리한 공격으로 그물이 터지면 허무하게도 완패하기가 일쑤라 승률도 늘 반반에 가까웠다. 대답은 가마고 했지만 거기 가면 김모청장을 만날 것 같아서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낙선 후 퇴임식을 하고 김모청장이 떠나던 날 청사 앞뜰에 도열해서 송별을 하는데 얼찬씨의 차례가 되어 악수를 하며 김모청장이 뭐라고 입을 달싹거릴 때
“몸이나 건강하이소.”
열찬씨가 한 마디 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그 후 김웅렬동장의 모친상을 문상 가서 같은 자리에 있게 되자 몇 명의 옛동료들이 일부러 열찬씨를 김모청장이 있는 자리로 안내해 얼굴이 마주치자
“잘 살았습니까?”
묘한 인사말을 던지고 맞은편에 앉자
“잘, 잘 지냈나?”
손을 달달 떨며 맞은 편 열찬씨 앞의 술 상위를 물수건으로 한참이나 닦아주며
“한 잔 하지.”
잔을 채워주었다.
“청장님도 한 잔 드십시오.”
잔을 부어 서로 마주 부딪친 후
“얼굴은 좋으시네요. 하긴 할 말 다 하고 성질 다 부리고 사니 늙을 일도 없지.”
하고 잔을 비운 뒤
“청장님, 죄송합니다. 전 다른 상가를 또 가야해서...”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선 것이었다. 그 뒤 구청장실비서와 열찬씨가 생활지원과장 때 주무계장을 지내 두 사람과 다 가까운 황원우계장의 모친상이 났을 때 한낮의 지열이 푹푹 풍기는 늪의 도시 창녕의 장례식장에서 마치 몇 명의 조문객도 없는 텅 빈 식당의 한 구석에서 저녁에 단체로 문상 올 옛 부하직원들의 얼굴을 보려고 기다리는 김모청장과 말동무, 술동무도 할 겸 열찬씨를 동석시켜 함께 머물기를 종용하는 상주에게
“내가 여기 같이 머물며 화해를 한답시고 옛날이야기를 하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내게 조용히 마음을 풀 시간을 주고 저 양반도 조용히 지난날을 되돌아볼 시간을 주게.”
하고 딱 술 한 잔씩만 주고받고 헤어졌던 것이었다.
이승암국장의 낯을 봐서라도 마침 김모청장이 없는 날 한번 간다, 간다 하면서 열찬씨가 망설이는 사이 한번은 이승암씨의 전화가 와서
“이형, 많이 바쁘십니까? 영감님이 꼭 한번 보고 싶다고 기다리시는데요.”
하고 간곡히 초청했지만 대답만 찰떡 같이 하고는 또 한동안을 망설이자
“영감님께서 전화라도 한번 꼭 해달랍니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전화는 꼭 좀 해주십시오.”
극히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김모청장으로 부터 그것하나도 성사를 못 시킨다고 닦달을 받는 것이 눈데 선한 지라
“알겠습니다.”
하고 곧장 전화를 걸어
“이열찬입니다. 영감님 잘 계셨어요?”
“그래. 이 국장, 인자사 전화를 다 하네.”
“와요? 영감님 무슨 일 있능교?”
“무슨 일은 그냥 보고 싶어서.”
“거짓말 아잉교? 제가 보고 싶다는 거.”
“아이다. 그럴 리가 있나?”
어느새 동향 언양사투리가 나왔다. 말만 동향이지 부려먹는 건 끝까지 부려먹고 챙기주는 건 눈곱만큼도 없다고 늘 불만이던 초등학교 후배 이청희 계장을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는데
“요새 글 많이 쓰데? 아직도 녹 쓸지 않았던데?”
“예? 무얼 읽어보셨어요?”
“지난해 시우회문인모임 <나루터>에 실린 글말이야.”
“아, <시인, 그는 누구인가?>라는 글말입니까?”
“그렇지. 아주 속이 후련한 정도로 명쾌한 글이야. 그래서.”
“예.”
“내 나이가 내년이면 77세 그 희수(喜壽)란 말이야.”
“예.”
“그래서 자서전 비슷한 작은 문집을 냈으면 싶은데 그 중심부분이 아무래도 서구청장재직시절 아니겠나? 관선, 민선 포함해서 10년 가까이 되고 또 송도연안개발 등 업적도 많고.”
“예. 그렇지요.”
“그래서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이 국장만큼 그 내용을 잘 알고 또 그만한 문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단 말이야.”
“예에?”
“물론 내가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할 체면은 좀 안서지. 그렇지만 다 지나간 일 아닌가?”
“예. 그, 그렇긴 하지만...”
순간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
(다 지나간 일이라고. 장난삼아 돌을 던지 사람이야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 돌을 맞고 하마터면 죽을 번한 개구리는 아직도 외상후유증에 시달리는 줄도 모르고...)
금방 목구멍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청장님 행정적 업적이야 대단하지요. 그렇지만 77세의 회고록이라면 인간적인 면모와 삶의 여정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제 입장에서 좀 그렇긴 하네요. 그렇지만 청장님이 이렇게 어렵게 부탁을 하시는데 한 글쟁이의 임무로 알고 쓰긴 써드려야지요.”
“그래. 고맙네.”
“예. 그런데 청장님께서 무얼 꼭 쓰고 싶고 어떤 방향으로 쓰고 싶은지 이승암 국장을 통해서 메모라도 해 주십시오. 만약에 제 입장으로 쓰면 청문회 비슷하게 좀 이상한 글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 그래?”
“예, 죄송합니다.”
“내가 한번 생각해볼 게.”
“알겠습니다. 몸이나 건강하십시오.”
“...”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