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에는 무씨를 뿌리고, 9월 초에 배추 모종을 심었다. 9월 중순인 오늘은 월동용 시금치 씨를 파종했다. 땀도 많이 흘리고 공력을 꽤나 들였다. 30여 평 텃밭을 가꾸는 일도 예삿일이 아님을 실체험한다. 누가 그랬던가. 텃밭이 50평이 넘으면, 농사일이 취미생활이 아니고 고된 노동이 된다고.
유난히 땡볕이 따가웠던 8월이었다. 예년 같으면 묵혔을 텃밭에 올해는 무·배추를 심기로 마음먹었다. 시골 출신이라 소싯적부터 낫질을 하고 지게를 지고,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농사일을 안다. 작물을 키우려면 먼저 작물을 심을 수 있게 ‘밭 만들기’를 해야 한다.
8월 초부터 일을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나기 전이나 땡볕에서나 해거름이나 가리지 않고, 마음이 내킬 때 텃밭에 나갔다. 이른 아침이나 해거름이 일하기 좋을 성 싶어도 그렇지만은 않다. 모기가 달려든다. 땡볕에서는 모기가 없다. 어느 때든 피장파장이다. 어차피 1시간여 하는 일이다.
쪼끄만 농사이기에 농기계 힘을 빌릴 수 없다. 모두 원시적으로 손발로만 해야 한다. 먼저 낫으로 잡초를 베어낸다. 잡초가 제거된 텃밭은 훤해지고 맨살을 드러낸다. 마음도 환해지고 일을 한 보람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맨살에 퇴비를 골고루 흩뿌린다. 요즘은 퇴비를 농부가 직접 만들지 않는다. 20kg들이 비닐포대로 파는 것을 사서 땅힘(地力)을 북돋운다. 그러고 나서 복합비료를 뿌린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토양 살충제도 뿌려줘야 한다.
다음으로는 한 삽 한 삽 떠서 흙은 뒤집고 흙덩이를 잘게 부순다. 가장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마지막으로 개량괭이(왜괭이)로 40cm 간격으로 고랑을 내고 두둑을 짓는다.
시나브로 한 일에도 끝이 있다. 열흘쯤 걸려 밭 만들기를 완성했다. 무씨와 시금치씨는 농협자재센터에서 이미 사뒀다. 배추는 모종을 심어야 하고 농사 관련 가게에서 판다. 심기 전날 사오면 될 일이다.
농사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이다. 제때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내어야 한다. 이 ‘제때’가 작황을 좌우하는 큰 요인이다. 올해는 무더위가 심하고 더 오래 지속되었으므로 무턱대고 달력의 절기를 따를 수 없다. 하여 ‘제때’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작물에 따라 올해 기후를 감안해 파종 적기를 알려줬다. 그에 따라 무와 배추를 밭에 내고, 오늘 시금치 씨를 뿌린 것이다.
삶의 기본이나 인간의 본질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일일이 이 친구한테 물어서 텃밭 가꾸기를 하게 되면서 드는 생각이다.
“사람의 천성은 비슷하나, 익힘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 논어/양화2)
천성이라 하면 ‘타고난 성품’이 사전적 의미이나, 공자 사상의 전체적 맥락에서 현대적 의미는 ‘타고난 두뇌’ 곧 머리가 좋고 나쁨을 뜻한다. 익힘은 요샛말로는 공부다. 따라서 사람은 타고난 머리가 좋고 나쁨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공부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친구 집 가세는 넉넉한 편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초등생 때부터 땔나무하러 지게를 졌고, 소꼴을 베는 등 모든 농사일을 거들었다. 친구는 낫질을 하지도 지게도 지지 않았다. 중3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대학 때 부산서 친구를 다시 만났다.
나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는 농사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학생 때까지 익힌 농사일이라 성인이 되어서도 한 장정의 몫을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십 수삼 년 전 비슷한 시기에 부산서 고향으로 귀촌했다. 귀촌 당시 농사일은 단연 내가 그보다 잘 알았다.
이제는 농사일은 전적으로 그에게 물어서 한다. 익힘의 종류가 달라서이다. 친구는 감농사와 밤농사를 짓고, 가정용 밭농사를 한다. 생활비 때문이 아니라 여유롭게 은퇴 후의 일거리로서 농사일을 즐기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오로지 글농사만 지었다.
나이 든 요즘 친구들이나 선후배를 몇 년 혹은 몇 십 년 만에 만날 때마다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 놀라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한둘은 경탄해서, 여덟아홉은 세월이 머물러 있어서.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