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문학관 뜰에 있는 구상 시인의 시 '그리스도 폴의 강 24'. [사진= 조해훈]
그리스도 폴의 강·24
구상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
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
내일 맞이할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 사람을 만나면서
옛 강과 옛사람을 만나는
착각을 한다
위 시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구상길에 있는 구상문학관 뜰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구상(具常·1919~2004) 시인의 작품이다.
필자는 9월 20일 구상문학관을 찾아 오랜만에 시의 바다에 푹 빠지는 기쁨을 누렸다. 우리나라 시단의 거목인 구상 시인에 대해 일반인들의 경우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시인 중에서도 늦게 등단하신 분들이나 다른 시인의 글과 문학지 등을 잘 읽지 않은 분들도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필자는 대학 시절 문학회 친구들과 그의 시를 두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필자는 구상 시인의 시를 많이 읽은 편이다.
그리하여 구상 시인의 문학관이 왜관에 있는 까닭에 그를 이 지역 출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면 벽면에 구상 시인의 연보가 시대별로 정리된 ' 구상의 삶'을 만난다. [사진= 조해훈]
구상(본명 구상준·具常浚) 시인은 1919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나, 1923년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원산시 인근인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리로 이주했다.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했고,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시인은 가톨릭신자(세례명 요한)이며, 그의 형 구대준은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함흥의 북선 매일신문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1946년 원산 문학가동맹이 펴낸 해방 기념시집 『응향』에 실은 「여명도」·「길」·「밤」 등 세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필화를 겪었다. 그리하여 1947년 2월 월남하였다.
구상 시인의 가족 사진 역시 문학관 내부 벽체에 부착돼 있다. [사진= 조해훈]
6·25전쟁 때 구상은 종군기자로 활약하였으며, 그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분을 맺었다. 그는 화가 이중섭과도 친했다. 영남일보사와 경향신문 등에서도 활동했으며, 1952년부터 1999년까지 효성여대·하와이대 등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구상문학관이 왜관에 있을까? 구상 시인은 1953년부터 구상문학관이 있는 자리에서 20여 년 거주하였다. 시인은 젊을 때부터 폐결핵을 앓았다. 6·25전쟁 이후 대구 피난처에서 각혈하고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부인은 의사였다. 부인이 남편인 시인의 정양처(靜養處)를 구한 곳이 구상문학관 자리였다. 부인은 이곳에 건물을 지어 순심의원을 개업하고 생활하면서 남편을 보살폈다. 시인은 왜관에서 약 22년간 거주하며 활동하다가 서울로 이거하여 2004년 5월 11일에 여의도시범아파트에서 영면에 들었다. 구상문학관은 시인이 작고하기 2년 전인 2002년 10월 4일 개관했다.
왜관과 구상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놓은 패널. [사진= 조해훈]
구상문학관은 700㎡ 규모의 1·2층 건물로, 1층에는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문우와 주고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7,000여 권의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집필실이자 문화예술인들이 들렀던 관수재 건물이 문학관 옆에 있다.
시인의 첫 시집은 『詩集具常』(시집구상)이다. 앞의 ‘시집’자를 빼고 흔히 『具常』으로 불린다. 자신의 이름을 딴 시집으로 월남한 후 1951년 서울에서 출간하였다. 그가 발간한 시집을 보면 『시집구상』(1951)·『초토의 시』(1956)·『까마귀』(1981)·『구상 연작 시집』(1985)· 『유치찬란』(1989) 등과 자선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984)를 냈으며 『구상 시 전집』(1986)을 간행했다. 문학관에는 현재 구상 시인의 시집과 사회평론집 등 그의 작품집 51권이 전시돼 있다.
원광 스님이 구상 시인을 글자와 그림으로 그려 선물한 액자도 문학관 내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조해훈]
시인의 전시된 작품집을 보면 화가 이중섭이 표지화를 그린 게 몇 권 보인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나 이중섭이 세상을 뜰 때까지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시인이 받은 편지를 전시한 것들에도 이중섭이 원고지에 써 시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具常兄’(구상형)이라 호칭하며 시인에게 안부를 물으며 보낸 편지가 전시돼 있다.
필자가 문학관을 관람할 때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필자는 혼자 천천히 전시품들과 벽면에 부착된 안내문 등을 읽으며 여러 상념에 잠겼다. 2년 후면 필자는 등단(1987년)한 지 만 40년이다. 어릴 적부터 시를 쓰고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을 읽고 있지만 항상 부족한 마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상 시인에게 보낸 편지(가운데)와 화가 이중섭 씨가 보낸 편지(오른쪽)도 전시돼 있다. [사진= 조해훈]
1층 문학관을 모두 관람한 후 바로 나오기가 아쉬워 1층 입구 쪽에 있는 카페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늘 ‘좀 더 좋은 시를 지어야지’라고 생각하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좋은 시를 규정하는 건 좀 애매하지만 오래 썼다고 잘 쓰는 것도 아니다. 필자에게는 언론인·고전인문학자·(고전)문학평론가 등의 여러 수식어가 붙지만 가장 기본적인 호칭은 ‘시인’이다. 자칭 타칭 그렇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