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위로 보이는 정자가 소쇄원 광풍각 사진= 조해훈

대숲 너머로 부는 바람이 귀를 맑게 해주고(竹外風淸耳·죽청외풍청이)
시냇가 밝은 달은 마음을 비추어주네.(溪邊月照心·계변월조심)
깊은 숲에서 시원한 바람을 보내고(深林傳爽氣·심림전상기)
높은 나무에선 엷은 그늘이 흩어지는구나.(喬木散輕陰·교목산경음)
술이 익으니 가볍게 취기가 오르고(酒熟乘微醉·주속승미취)
시 완성하자 흥얼 노래 자주 나오네.(詩成費短吟·시성비단음)
한밤중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 있으니(數聲聞半夜·수성문반야)
피눈물 자아내는 두견새가 있다네.(啼血有山禽·제형유산금)

위 시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소쇄원에서 즉흥적으로 읊다〉(瀟灑亭卽事·소쇄정즉사)로, 그의 문집인 『하서집(河西集)』 권 8에 수록돼 있다. 29세 때인 1538년(무술년)에 지었다.

그러면 김인후가 어떤 인물인지 그의 생애를 먼저 간략하게 알아보자.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출생한 김인후는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0세 때 그는 전라도 관찰사로 와 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찾아뵙고 그의 문하가 되어 『소학』을 배웠다. 17세 때는 담양의 면앙정 송순(宋純)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18세 때는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를 찾아가 공부하였다. 또한 이 무렵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산 서창에 들어와 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김인후는 31세 때인 1540년(중종 35)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고 홍문관정자와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중종 35) 4월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었다. 즉 중종이 세자인 인종의 스승으로 김인후를 앉힌 것이다. 인종은 스승 김인후에게 묵죽(墨竹) 한 첩을 하사하고, 김인후에게 화축(畵軸)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하였다. 그 묵죽도는 현재 필암서원에 수장돼 있다.

그는 이어 여러 벼슬을 지내다 1543년 8월에 부모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신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1월에 중종이 죽고 1545년 음력 1월 1일 인종이 30세에 즉위하였다. 이어 김인후는 제술관에 임명되어 입경하였으나 음력 7월 1일 인종이 7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이에 김인후는 벼슬을 접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위의 시는 김인후가 담양에 있는 소쇄원(瀟灑圓)에 들러 읊은 작품이다. 조광조의 문인인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환로의 꿈을 접고 고향인 담양에 소쇄원이라는 정원을 지어 은거하였다. 김인후가 약관의 나이 때부터 이곳을 출입하였다. 그가 소쇄원을 배경으로 지은 작품은 80수가 넘는다. 김인후는 양산보의 아들인 양자징(梁子徵·1523~1594)을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어 사위로 맞아들였다. 양자징은 1786년(정조 10) 장성 유림의 주청으로 스승이자 장인인 김인후 곁에 배향되었다.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정면 모습. 정문 위 누각인 '확연루' 현판 글씨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진= 조해훈

지난 9월 12일 필자는 필암서원과 소쇄원 등을 답사하였다. 홍살문을 지나 서원의 정문에 들어서자 정문 위의 ‘확연루(廓然樓)’라는 누각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씨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필암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큰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안쪽에 ‘청절당(淸節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필암서원 현판은 윤봉구(尹鳳九·1681~1767)가 썼고, 청절당 글씨는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다. 이 건물은 필암서원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선비들이 모여 학문하던 공간이다. 즉 필암서원은 조선 후기 노론의 세력권 안에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청절당' 앞에 경남 밀양에서 답사온 사람들이 앉아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조해훈

청절당에 앉아 보면 왼쪽 건물이 ‘숭의재(崇義齋)’로, 현판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오른쪽 건물은 ‘진덕재(進德齋)’로, 현판 글씨는 역시 송준길이 썼다. 숭의재와 진덕재는 원생들이 생활하던 건물이다. 숭의재는 현재 ‘하서 작은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필자가 필암서원 원생들이 생활하던 '진덕재' 마루에 앉아 있다. 사진= 장성문화해설사 김미경 씨

청절당과 마주해 있는 자그마한 건물이 눈에 뜨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경장각(敬藏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런데 글자를 천으로 가려놓았다. 이유인즉슨 정조 임금의 친필이기 때문이다.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인 김인후에게 내려준 「어제묵죽도(御製墨竹圖)」와 김인후의 문집을 찍기 위해 각인한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인조가 세자 시절 스승인 김인후에게 하사한 ' 어제묵죽도'가 보관된 '경장각'. 정조 임금의 친필이어서 천으로 가려져 있다. 사진= 조해훈

경장각의 뒤편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제향공간이 있다. 즉 이 담장은 교육공간과 제향공간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담장 옆의 작은 건물은 ‘장판각(藏板閣)’이다. 장판각은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제작된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이 장판각에는 『하서전집』·『초서천자문』·『해자무이구곡』·『백련초해』 등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필암서원의 기타 시설로는 계생비·한장사·관세위·망례위·석등 등이 있다. 필암서원은 유네스코에 등록된 우리나라 9개 서원 중 하나이다.

소쇄원 제월당에 걸려있는 소쇄원 관련 시판들. 김인후, 기대승, 송순, 고경명 등의 시편들이다. 사진= 조해훈

필암서원을 다 둘러본 후 담양의 소쇄원으로 향했다. 정자 ‘제월당(霽月堂)’에 올라서 앉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필암서원의 김인후가 이곳에 와 읊은 「訪梁兄彦鎭林亭 四十八詠」을 판각해 걸어놓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소쇄원 처사 양언진 형을 방문하여 임정(林亭)을 제목으로 지은 시다. 그 옆으로는 송순·기대승·고경명 등의 시가 걸려 있다. 제월당에서 그 아래로 천천히 내려와 ‘광풍당(光風堂)’을 둘러본 후 소쇄원 바깥으로 나왔다. 이어 송순이 지은 정자인 ‘면앙정(俛仰亭)’에 들렀다가 하동 화개 목압서사로 돌아왔다. 적어도 한해에 한두 차례 이 코스를 방문한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