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미혜 씨 집을 팔고(13)
농막의 살림살이도 대충 정리된 데다 슬비네의 가게가 바빠 영순씨가 며칠 부산에서 지내기로 하고 떠난 뒤 성해씨의 전화가 와서
“친구야, 내일 비번이라서 경제하고 둘이서 너거 농장에 구경갈까 하는데.”
“그래 오너라. 그런데 우리 마누라가 없어서 우짜꼬? 너거 형수가 있어야 시동생 왔다고 찌짐 꿉어 대접도 할 건데.”
“아이다. 제수씨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더 좋다.”
“우째서?”
“있으면 잘 얻어먹지만 없으면 우리끼리 편안하게 고스톱도 치고 말이야.”
“그래?”
“응. 친구야, 뭐 쫌 사가꼬?”
“사기는 그냥 온나.”
하고 이튿날 역시 두루마리 화장지를 하나씩 들고 두 친구가 들어서는데
“야, 집 좋다! 농막이 아니라 별장이네.”
성해씨가 탄복을 하자
“돈 많이 들었겠네. 우째 다 우봤노?”
“뭐. 은행대출도 좀 받고 아이들도 좀 보태고...”
“친구 니는 참 복도 많다. 미꾸라지 용 됐다.”
“씰데 없는 소리!”
하는데 이제 제법 뽈뽈해진 마초가 낯선 두 사람을 한참이나 쳐다보니
“강아지 예쁘네. 이름이 뭐고?”
“마초?”
평소 개를 좋아하는 성해씨가 덥석 끌어안고 쓰다듬는데
“그래 삼국지에 장군이름이다.”
“장군이고 뭐고 요거 된장 발라도 한 접시도 안 되겠네.”
경제씨가 벌쭉 웃었다.
“야, 너거 온 김에 저게 무거운 돌 좀 같이 하나 옮기까?”
열찬씨가 화단머리를 가리키는데
“낸주게 내 혼자서 해주께. 우선 한판 붙자!”
경제씨의 채근에 방에 들어온 성해씨가
“친구야, 삼겹살 사왔는데 꿉어서 소주 한 잔 할까?”
하는데
“벌써 배고프나? 우리 삼총사가 이래 만난 지가 얼매나 오랜 만인데 우선 한 판 붙자.”
경제씨가 재촉해 담요와 화투를 들고 오자
“너거 둘이는 오늘 다 죽었다.”
경제씨가 호주머니에서 드르륵 동전을 쏟아내었다.
“동전은 우리 집에도 있는데.”
열찬씨가 동전이 든 깡통을 가져오자
“야, 최고의 환경이다. 친구 좋고 동전 많고 간섭할 사람 없고. 고스톱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경제씨가 신이 나는데
“어이, 친구들아. 한잔 하자. 고기 익었다.”
해서 식탁에서 소주 몇 잔씩을 마시는데
“짜린 밤에 미영만 잦나? 어서 붙자!”
술을 안 즐기는 경제씨가 재촉을 하자
“알았심더. 호구님!”
성해씨가 오봉에 삽겹살과 김치, 술병과 잔을 얹어 화투판 옆에 놓고 본격적으로 게임에 들어갔다.
동전포함 기본 5만원씩을 밑천으로 앞에 놓고 한 사람이 돈이 떨어지면 딴 사람이 절반을 돌려주는 별로 부담이 없는 게임이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승부자체를 즐기는 셋은 금방 게임에 푹 빠졌다. 단번에 전세가 역전되는 변화와 새로운 일에 늘 관심이 많은 경제씨가
“자, 피박, 광박, 띠박, 열박에 <흔들고>와 두 번 흔들고도 있고 넉 장짜리 두 배에 쪽에 따닥과 귀신도 있다. 또 쌍피 석장 부이아이피도 있고 그리고 고돌이는 비열가지 쳐주는 6고돌이다.”
48장 화투짝으로 지어낼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다 만들어내는데
“친구야, 귀신은 뭐고?”
“아, 그건 묵을 기 없어 한 장 내놓고 쳤는데 하필 그걸 뜨면 피 한 장 주기다.”
“그러면 쪽에다가 청소까지 두 장씩 주나?”
“그래야 점수가 크게 나지. 역전승의 재미도 좋고.”
“아이구, 정신없어라.”
“그런데 지난 번 우리 동창들 계에서 또 새로운 것 하나 배워왔다.”
“뭔데? 무작빼기 전두환고스톱이가?”
“아이다. 쪼다라고 광 2점에 피 아홉 장에 띠 넉 장, 열각 넉 장으로 앞은 그득하지만 암만 봐도 3점이 안 되면 그걸 불쌍한 쪼다라고 해서 상대가 꿀밤 한 대씩 먹이고 5점으로 쳐 주는 거다.”
“별 구신 씨나락 까묵는 법을 다 맹그네?”
“그래도 일단 한번 해보자.”
“알았다.”
하며 부지런히 화투장을 돌렸다. 60년 고추친구에 고스톱 친구만 40년이 넘는 셋이 하하호호 웃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이나 열중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가 넘었다.
“이 판 끝나면 고기 구워 밥 묵고 하자.”
“밥은 무슨 밥? 한 판이 급한데.”
경제씨의 말에
“그람 라면이나 끓일까?”
솜씨 좋은 성해씨가 라면을 끓여 소주를 곁들여 마시며
“야, 제수씨 김치는 언제나 일품이야!”
성해씨가 신이 나는데
“야, 짜린 밤에 미영만 잣을 기가?”
경제씨가 독촉을 하자
“가만 오줌이라도 누고 하자.”
성해씨가 화장실로 달려가는데
“참, 가부리회 냉장고에 넣어놓고 갔는데. 우리 회하고 소주 한잔 하고 하자.”
“가부리 지읒자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금방 라면 먹어놓고.”
하도 경제씨가 서둘러 믹스커피 한잔씩만 먹고 다시 둘러 앉았는데 술을 거의 먹지 않는 경제씨를 빼고 둘이서 벌써 소주 세 병을 비워 네 번째 병과 가오리회무침을 챙겨와 또 둘이서 한 잔씩을 비웠다. 그렇게 한참이나 열중하던 열찬씨가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암만 그래도 밥은 묵고하자.”
열찬씨가 화투패를 던지고 식탁에 반찬을 꺼내는데
“야, 간단하게 뜨신 밥에 가부리회 비비 묵자!”
경제씨의 말대로 솜씨 좋은 성해씨가 커다란 양푼에 밥과 가오리회를 넣고 쓱쓱 비벼 그릇에 덜려는데
“친구끼리 그럴 거 있나? 그냥 먹자!”
해서 셋이 나란히 숟가락을 집어넣어 소주를 반주로 금방 양푼을 비우고 다시 판을 벌렸다. 한참을 더 놀다 시계를 보니 이미 열한 시가 넘었다.
“인자 안 된다. 경제야. 어서 집에 가자. 내일 새벽 여섯이 교대다.”
“아이구, 참 인자 한창 끗발이 나는데.”
성해씨의 근무처인 아파트와 집이 있는 덕계까지 들리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였다.
“나는 만원만 따고 다 내어놓을 께.”
“나는 2천원 밖에 안 땄다.”
두 친구가 담요위에 수북하게 돈을 내어놓고 일어서는데
“잃지도 따지도 않은 이 노름에 하루가 지나갔구나.”
하고 문을 나서는데
“열찬아, 내 운동화가 없는데...”
경제씨가 현관은 물론 데크까지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아 허둥거리자
“가만 있자아...”
자자 일어난 마초를 집적거리며
“임마, 아저씨 신발 우쨌노?”
요즘 한창 뭘 물고 오거나 숨기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마초를 흘겨보다 손전등을 찾아든 열찬씨가 한참이나 밭을 가로 질러 마초가 제일 자주 들리는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가니 신발 두 짝이 나뒹굴고 있었다.
“열찬아, 잘 놀았다. 간데이.”
마초의 옆구리를 한번 지른 경제씨가 재빨리 운전석에 올랐다.
이튿날은 몸이 찌뿌듯해 느지막이 일어나 펜스를 따라 한 바퀴를 빙 돌다 연신 꼬리를 살랑대며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마초를 이마를 쓸어주며
“경제아저씨 신발은 왜 그랬어?”
하자 사정없이 손을 핥으려는 강아지를 떼 내려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이제 엄마생각은 안 나? 언제 안산동네 고향집에 다니러 갈레?”
하고 안아 올려 한참이나 눈을 들여다보다
“뭐, 할아버지가 종일 놀아주지 않아 심심해서 그랬어? 아니, 짜증이 나서 그랬다고?”
하며 물기가 촉촉한 유난히 검은 주둥이를 만져보며
“노란 강아지는 입구 항문이 검고 촉촉해야 건강하다는데 이 녀석 건강하나는 타고 났네.”
하며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한참이나 들여다보는데
“잘 한다. 그렇게 좋은데 방에 요 깔고 이불 펴서 같이 자지?”
금찬씨가 빙글빙글 웃으며 나타나면서
“그래 손님은 잘 보냈나?”
“야. 손님 온 건 우째 알았소?”
“내가 하는 일이 뭐 있노? 너거 집에 월깨 차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커피하고 밥을 얻어먹고 또 월깨가 없을 때는 누가 동생을 찾아왔는지 낯신 차는 있는지 없는지 쳐다보는 기 일이지.”
“그랬구나. 고무재에 조경제라는 친구하고 송대에 김성해라는 친구라고 국민학교동창 꼬치친구들 아잉교?”
“그래 송대사람은 몰라도 고무재사람은 알지. 진장에 과수원하던 조부잣집 일가아이가.”
“예. 그렇지요.”
“그래. 손님은 뭐를 해서 믹있노? 내가 보이 삼겹살 사온 것 같던데?”
“야. 그런데 우째 알았는데?”
“집 앞에 차가 있길래 누가 왔는지 궁금해 와 보니 삽겹살 냄새가 진동하는데 너거 서이는 화토 친다고 정신이 없더라고. 그래 방문이나 좀 열고 놀든지 안 하고.”
“그랬구나.”
“나중에 저녁이나 먹었는가 싶어 와봤더니 또 꼼짝 않고 화토만 치던데.”
“예. 뭐 그렇지요.”
하며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여덟 시가 넘었다. 오늘은 작품을 하루 쉬지 싶어
“누님 아침은?”
“며느리가 가게에서 팔던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개를 해다 놨던데 내가 네 발 달린 짐승고기를 먹으면 탈도 나고 해서 국물만 쪼깨 뜨서 밥을 말아묵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없어서 찬물에 밥을 말아 김치하고 몇 숟가락 뜨다가...”
“방에 갑시더. 밥은 둘이 묵을 양이 될 긴데.”
하고 들어오며
“며느리 음식솜씨 타박할 기 뭐 있노? 누님도 여잔데 입맛대로 해묵으면 되지.”
가끔 조카며느리 천집사의 음식을 접할 기회가 있으면 모양은 그럴 듯한데 맛은 먹을 만 한 날도 있고 도무지 두 번 젓가락이 가지 않을 경우도 있어
“희한하다. 그 식당 손님들은 식성이 무던한 사람들만 오는가?”
열찬씨가 빙그레 웃으니
“주로 공사장 노동자나 식당도 없는 작은 공장사람들의 아침점심을 해 먹이는데 맛은 큰 문제가 아니고 양만 푸짐하면 된답디다.”
“그 참 희한한 식당도 다 있네.”
한 적도 있었다. 인사성이 밝아 “외삼촌 안녕하세요?”를 입에 달고 살며 생글생글 잘 웃고 가족모임 같은데서 자리가 파랄 때쯤 되면 “외삼촌 사랑합니다.” 하면서 뒤에서 포옹을 해주곤 하는 그 친절한 질부에게 하느님아버지는 왜 음식솜씨를 베풀지 않았는지 한번은 열찬씨네 집에 와서 밥을 먹다
“와아, 김치가 꿀맛이네. 외숙모 이건 어떻게 담는 건데요?”
“그냥 남 담듯이 담지.”
“그런데 어떻게 이런 깊은 맛이 나지요?”
“세월 탓이겠지. 수십 년 담았으니까.”
하는데 마주 앉은 남편 일식씨가 숨도 한 번 안 쉬고 선지국에 밥을 말아 김치를 넣어 아구아구 먹어대는 것을 보고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먹어보고
“아이구, 이건 음식이 아니고 예술이다.”
하고 탄복을 했다. 그리고 추석날에는 외삼촌을 들여다본다고 아들 둘까지 넷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밥을 차려주자
“야, 예술이다!”
“이 갈비찜이 죽이는데!”
울산의 경양식집에서 스테이크를 전담하는 요리사인 장남까지 탄복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큰맘 먹고 준비한 LA갈비찜을 더 덥혀다 주고 나중에 영서네 식구가 오자
“아이구, 백년손님이 왔는데 우짜꼬?”
하다 냉동실의 삼겹살을 찾아 구운 일도 있었다.
“아침부터 삼겹살도 구울 수도 없고 뭐로 우리 누님 상을 차릴꼬?”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던 열찬씨가 비닐포장이 된 풀무원 두부 한 모를 발견하고 도마에 썰어 커다란 쟁반을 찾아 펼쳐놓고 한 옆에는 묵은 배추김치를 얹어 전자레인지를 돌려
“자 우선 두부김치 하고 한 술 뜨소.”
하고 식탁에 얹어주고 달걀 두 개를 꺼내 프라이팬에 구우려다 기름이 튀는 것도 싫고 해서 그냥 작은 접시에 하나씩 터뜨리고 소금을 조금 뿌려 전자레인지에 넣는 걸 보며
“내 대가리 털 나고 계란후라이 저래 하는 사람은 첨보네. 칠십 하고도 이년 만에 말이다.”
하고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는데 마침내 엉터리 달걀프라이를 완성한 열찬씨가 상에 하나씩 놓고 수저를 찾아 들다가
“이런! 두부는?”
망연자실하는데
“야야, 그 기 묵다보이 하도 맛이 좋아서. 나도 몰래 다 먹었네.”
“아이고, 누님. 그 풀무원두부가 값이 얼마나 비싼데?”
“야야, 값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맛있는 두부 놔두고 군동내 나는 묵은 김치 묵겠나?”
“암만 묵어도 동생 묵을 거는...”
“너거는 돈이 많으니 날수금 묵는다 아이가?”
“...”
묵묵히 김치와 계란프라이로 밥을 먹다 목이 꺽꺽 막혀 열무김치의 국물을 떠 밥을 말면서 남은 프라이 하나는 문을 열고 나가 마초에게 주고 오니
“아이구, 개도 참 더럽게도 키운다. 나는 외동아들 우분다고 더럽게 키우는 거는 봐도 강생이를 니맨시로 키우는 거는 대가리 털 나고 첨 본다.”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우쨌기나 밥은 잘 묵었고 동생, 커피는 한잔 안 주나?”
순간
(와? 누님은 손 없능교?)
하려다가 꾹 참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컵에다 물을 타고 다시 밥을 먹는데
“야야, 포트에 물 끓는다.”
해서 물을 부어 건네주는데
“월깨가 있을 때는 과일이 안 떨어지는데 동생 니는 당뇨가 있어 과일을 안 좋아하이 말이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이라 냉장고를 열고 밀감을 댓 개 꺼내오자
“그 때 부산서 올캐친구들 올 때 사온 한라봉이 있을 긴데?”
해서 냉장고를 뒤져 찾아내고 접시와 칼을 갖다 주고
“깎아 잡수소. 공주누님 모시다가 나는 아침도 못 묵겠소.”
저도 몰래 입술이 뾰로통한데
“보기보다 별 맛이 없네. 나는 간데이.”
한라봉 한 쪽을 입에 물고 나가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려고 그릇을 치우는데 휴대폰이 울리더니 영순씨가
“어제 친구들은 잘 놀다가 갔능교?”
“잘 놀았지.”
“밥은 잘 챙기 먹이고? 가오리회는 다 묵었고?”
“응. 잘 묵었지. 저거가 삼겹살을 사 왔는데 고스톱이 급해 굽지도 못 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형님은 왔다갔능교?”
“그래 좀 전에 와서 아침 차려드렸다.”
“잘 했네. 커피랑 과일은?”
“그것도 다 드렸다.”
“그래 지금 옆에 있능교?”
“아이다. 갔다.”
“그래서 혼자 설거지하능교?”
“그렇지 뭐.”
“아, 알았심더.”
하고 전화를 끊는데
“아이고 여자가 되서 설거지는 좀 해주고 가지.”
영순씨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