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금어동천의 옛길의 비석골. 사진=박창희
#역사의 풍운아 정현덕
정현덕(1810~1883)은 구한말의 풍문아였다. 그는 고종 초에 서장관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흥선 대원군 집권 후 심복으로서 1867년(고종 4) 동래 부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임기가 끝났음에도 계속 자리를 지켜 1874년(고종 11) 정월까지 약 7년 동안 동래 부사를 지내 최장 기록을 세웠다.
정현덕은 동래 부사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외교 일선을 담당했다. 흥선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국교 재개 교섭을 서계(書契, 일본 정부와 주고받던 문서) 문제를 이유로 끝까지 거부하였고, 동래읍성을 개축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썼다. 특히 그는 동래의 인심을 바꿔 놓을 정도로 교학을 진흥시켰다. 동래 땅을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맹자의 고향)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오는 가풍을 잇게 하는 등 나름의 선정도 베풀었다. 그래선지 그를 기리는 선정비가 금정산성 내의 국청사 경내와 범어사 옛길의 비석골, 양산 물금의 황산도 길에 세워져 있고, 동래향교에 흥학비, 동래 금강공원에 시비가 놓여 있다.
국청사의 정현덕 선정비는 명신(明信), 평윤(平允) 두 승려가 1872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은 건립 이후 무슨 연유에선지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중에 향토사학자 주영택 선생에 의해 발견되었고, 다시 제 자리에 복원되었다. 비석의 높이는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비석 전면에는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적혔고 좌우편에 4언시가 적혀 있다.
相鄕趾美(상향지미)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重建佛宇(중건불우) 국청사 건물들을 중건하고
逢海宣恩(봉해선은) 동래 고을 백성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廣置寺屯(광치사둔) 국청사에도 많은 땅을 희사하였네.
선정비란 게 으레 그렇고 그런 정치적 목적 하에 세워지는 것이지만, 정현덕 선정비는 실제 그의 선정(善政)과 연관된 일화를 남기고 있다. 국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청사는 임진왜란 때 산성을 방어한 호국사찰로서 승병들의 주둔지였다.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는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승영으로 기능하였고,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 승장인(僧長印)’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호국의 얼이 서린 국청사를 남달리 보고 중창을 지원하고 땅을 희사한 것은 정현덕의 정책 의지였을 것이다.
정현덕은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가 동래를 전역을 둘러보고 쓴 ‘봉래별곡(蓬萊別曲)’은 19세기 후반 동래부 상황와 당시 정세를 보여주는 시가다. 총 4단으로 구성되었으며 2단에 ‘범어사’를 읊은 시가 나온다.
장부 강개(慷慨) 못 이겨서 다유(多遊)하여 살펴보니,
금정산성 대배포(大排布)에 범어사가 더욱 좋다.
소하정(蘇蝦亭) 들어가니 처사는 간 곳 없고
유선대(遊仙臺) 올라가니 도사는 어데 간고?
온정약수(溫井藥水) 신효하니 병인(病人) 치료 근심 없다.
배산(盃山)이 안산 되고 슈무막(온천천)이 되였도다.
금정산성 등 동래의 산천이 선연히 그려진다. 범어사 소하정 유선대 온정약수 등은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를 표현한 것으로, 신선세계를 꿈꾼 정현덕의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부산에 그가 좇으려 한 유토피아가 있었음인가.
이 대목에서 박 선달은 강한 궁금증이 하나 돋아났다. 여기에 금어동천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박 선달은 고개를 갸웃하며 정현덕의 뜻을 헤아려본다. 금어동천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새겨 놓고 시가에는 언급을 하지 않은 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금어동천 바위를 숨겨 놓으려고?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이 적어? 박 선달은 특유의 쓴웃음을 짓고는 무덤덤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 대로 놔두자는 심산이다. 길이라고 다 길을 일러주는 건 아니지….
정현덕은 말로가 비참했다. 동래 부사에 이어 승지,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이 임금의 외척인 민 씨 일파에 쫓겨나자 정현덕도 파직당해 귀양을 갔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발발과 더불어 대원군이 재집권한 뒤 복귀하여 다시 형조 참판에 올랐으나, 얼마 후 대원군이 다시 쫓겨나고 정현덕은 원악도(遠惡島, 사람이 살기 힘든 외딴 섬)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로부터 정현덕은 잊혀져갔다.
#조엄과 낭백스님 이야기
동래 부사는 1546년 초대 부사 이윤탁으로부터 시작해 1895년 사임한 정인학에 이르기까지 349년 간 모두 255명이 거쳐 갔다.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부산은 작은 포구에 불과했고, 동래가 중심이었다. 동래 부사는 국방과 대일 외교, 지역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로,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강명한 인사들이 많이 발탁되었다.
금어동천 옛길 개요.
금어동천을 지나 범어사 매표소 쪽으로 비스듬이 난 옛길을 따라 오르자 비석골이 나온다. 길 옆에 5기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마에 땀을 훔친 박 선달이 다가서 비석을 골똘히 살핀다. 오른쪽부터 정현덕, 홍길우, 조엄, 정헌교, 장호진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현덕과 조엄, 정헌교는 동래 부사 출신이고, 홍우길은 경상도 관찰사, 장호진은 대한제국 참서관을 지냈다. 모두 피폐한 사찰 구제와 보시로 은덕을 베풀었던 인물들이다. 범어사는 그 마음씀에 대한 고마움을 불망비로 대신했다.
임진왜란 뒤 각종 잡역에 따른 부담이 늘고 사찰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범어사 승려들은 사찰계를 결성해 한 푼 두 푼 모아 촛대를 사고 불화를 조성하고 법당도 수리하며 사찰을 지켰다. 사찰계는 사찰에서 이루어진 계(契)로, 승려와 신도가 함께 참여했다. 범어사 사찰계는 1722년에서 1947년 사이 63개에 이른다. 특히 동갑 승려들이 결성한 ‘갑계’가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 같은 사찰계로 축적한 사찰의 재정은 근대기 고승을 많이 배출한 바탕이 됐고, 선찰대본산 범어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 이를 동래 부사나 지역 유지들이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잊지 않겠노라’는 불망비의 뜻이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으니 불망비는 시대를 넘어 제 소임을 다하는 모습이다. 이 비석들은 ‘금어동천 옛길’이 이곳임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범어사로 가는 어떤 길도 없었을 때, 금어동천 옛길은 사람들의 발길에 눌려 길을 열어 주었고, 시대를 건너는 석각과 비석, 서낭당 등의 표식을 남겨 옛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비석골의 비석 중 조선 영조 때 동래 부사를 지낸 조엄(趙曮, 1719~1777)의 불망비는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비문은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비(巡相國趙公曮革祛寺幣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조엄이 사찰의 폐단을 없애준 것에 대한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내용이며, 조선 순조 8년(1908) 조엄의 후손인 조중려가 범어사의 요청으로 썼다고 한다. ‘순상국’은 왕명을 받아 군무를 통찰하던 순찰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관리다. 동래 부사와 통신사 정사를 지낸 조엄을 높인 칭호다. 이에 대한 ‘거짓말 같은’ 전설이 범어사에 전해진다.
조선 중기 동래 범어사에 낭백(浪伯)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범어사에 입산해 수도했으며 보시행을 발원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타인을 위해 바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어 보시를 완성한다. 그리고 커다란 원력을 세워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염원을 이뤄냈다. 이른바 조엄 환생설화인데, 그게 불망비로 우뚝 서 있으니 거짓말이라 눙치기도 어렵다.
“누가 꿰맞췄는지 참으로 절묘한 설화야. 귀신이 곡할 얼개야.”
박 선달이 감동한 듯 연신 무릎을 친다. 이 설화는 환생과 윤회, 인과응보, 원력과 보시, 그리고 후세의 평가 등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길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한 줌의 설화가 나그네의 심사를 흔든다.
#금어를 찾아서
‘금어동천’의 금어는 어떤 의미일까? ‘금빛 물고기’로 봐야 할까, ‘금정산의 신어’로 봐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금붕어’일 뿐일 텐가?
불가에서 ‘금어(金魚)’는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승려를 뜻한다. 불화를 제작하는 이들을 흔히 불모(佛母), 화사(畵師), 화승(畵僧), 화원(畵員), 양공(良工), 편수(片手)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데, 이 중 으뜸이 금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닐듯, 중생들이 용기 있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용된다. 그런가하면, 시공을 초월해 전해지는 부처님의 고귀한 말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좋은 의미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금어를 찾을 수 있다. 신라 말기·고려 시대에 공신 등 특별히 하사받은 사람이 관복을 입을 때에 차던 붕어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금어(金魚) 또는 어대(魚袋), 금어대(金魚袋)라 했다. 보통은 3품 이상이 금어대를 찼다고 하니 금어는 곧 고관대작을 뜻한다. 금어가 요술을 부리듯 신통방통하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자신의 책 ‘생명이 자본이다’(마로니에북스, 2014)에서 금어(金魚)의 원형을 ‘금붕어’에서 찾고 원초적 생명의 가치를 부여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모두 금어(금물고기)라 하는 것을 우리만 왜 금붕어라고 하는가. 이어령의 해석은 이렇다. “한국은 금붕어라는 말 속에 붕어라는 이름을 살렸다. 금붕어 조상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생명이란, 잘 길들여진 인공의 공예품 같은 금붕어에서 그 야성을 보는 것이다. 가축, 애완물, 문명인 모두에게는 배꼽의 추억과 같은 생명의 신비함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흔들어 깨워라.”
이어령의 생명 강의 중 ‘콩 세 알의 조화’는 과연 그다운 탁견이다. “콩 세 알을 심어서 하나는 새가, 하나는 벌레가, 하나는 인간이 먹는 따뜻한 마음, 자연과 인간이 손잡고 사는 조화로운 세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하늘을 나는 새는 쫓아버리고, 땅속의 벌레는 농약과 제초제로 죽인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콩 세 알을 모두 차지할 수 있을까.”
박 선달은 ‘이어령식 해석’에 그저 고개만 주억거린다. 탁월한 해석이지만 억지춘향식 논리도 보이지 때문이다. 가령 금어를 금붕어의 틀로 읽는 것은 의미 축소라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금어와 금어동천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2017 온천천 금어 빛 축제. 출처: 금정문화재단 홈페이지.
시월의 어느 멋진 날, 부산도시철도 1호선 장전역~부산대 역 아래의 온천천에 대규모 금어떼가 나타났다. 제법 장한 물살을 형성한 온천천의 하천 공간에 빛의 터널이 만들어졌다. 부산 금정문화재단이 주최한 ‘2017 금어 빛 축제’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제작한 2000여 마리의 오색 빛깔 금어 조형물이었다. 온천천을 가득 채운 춤추는 금어떼는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밤하늘의 은하수 아래에 ‘빛을 품은 금어’들이 도시민들에게 무슨 밀어를 나누는 것 같았다.
박 선달은 그때 축제 장면을 ‘금어의 환생’으로 이해했다. 산에서 잠자던 금어가 비로소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과 호흡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금어의 상징성을 보다 넓게 풀어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금어는 단순한 금빛 물고기가 아니다. 한갓 금붕어는 더욱 아니다. 금어는 하늘이 금정산에 내려준 선물이자 신기한 요술 물고기다. 금어는 상황에 따라 날치가 되고, 목어가 되고, 고래가 된다. 펄쩍 뛰어오르는 금어는, 비상한 도약의 힘, 초월의 힘, 상상의 힘이 되고, 급기야 생태적 삶의 바탕, 희망 세상의 메시지가 된다. 더 나아가 해양도시의 탯줄로서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금샘은 금정산의 원천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하늘의 오색 물고기, 즉 금어가 산다. 금어가 사는 금샘의 물은 범어천을 거쳐 온천천, 수영강에 이르고 다시 부산 앞바다로 흘러든다. 이렇게 보면 금샘은 해양도시의 원천이요, 금어동천은 해양도시 부산의 금빛 브랜드가 아닌가!
박 선달의 가슴에서 ‘잠자던 금어’가 일어나 펄떡 펄떡 뛰기 시작했다.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2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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