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소쉬르의 기호학으로 본 ‘야생화’ 감상(2)

창이 승인 2019.04.21 13:25 | 최종 수정 2019.04.23 09:34 의견 0

소쉬르의 기호학으로 본 ‘야생화’ 감상(2)

머리말

김춘수의 ‘꽃’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고 많은 애독자를 가진 시이다. 문학도들에게는 연구대상이 될 만큼의 문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쉬르와 라깡 연구자들은 김춘수의 시를 혹평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름이 마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 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감상자는 이러한 평에 동의하면서 박미서의 ‘야생화’와의 비교를 통해 문제점들을 들어낼 것이다. 소쉬르의 기호학으로 야생화를 읽는 과정에서 시가 어떻게 시 자체에 관하여 말해질 수 있는가를 분석한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야생화 / 박미서

하얀 두건의 둑길에
눈 멀어도 좋을 이름,
엷은 연록 눈매의 백리향

한 송이 구름 노니는 호숫가에
밝은 인정의 별들,
반복하는 소리의 꽃

은은히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모래들의 밀물

서사시의 나뭇가지 뻗어
별자리 변화들을 적듯이
폭풍우 이름없이 스쳐가고

이미 피어난 하늘빛
잠잠히 일렁이다가
사잇줄에 번지는 향기

조약돌에서
진흙바위까지
저마다 닿을 강인한 곳

분홍볕 읊조리는 꽃
닳지 않을 길잡이 눈
펼치는 사이에.

‘꽃’과 ‘야생화’

박미서의 시 ‘야생화’는 김춘수의 ‘꽃’을 자연스럽게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김춘수는 꽃에게 이름을 주는 순간 존재에 의미가 생긴다고 한다. 김춘수 시의 주제는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이고, 꽃의 상징적 의미는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 명명 행위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시속의 '이름 부르기'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사물에 처음 의미를 부여하는 것, 즉 존재의 근거를 얻게 되는 것과, 두 번째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이자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박미서 시인은 좀 다르다. 박시인은 꽃에 이름을 이중적으로 주고 있다. ‘야생화’ 그리고 ‘백리향’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백리향에는 시의 연들마다 하나씩 이름에 귀속하는 속성들을 부여한다. 이름과 꽃 사이의 간격을 읊조림으로 메우려 한다. 이 점이 김춘수와 박미서가 다른 점이다. 존재(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태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 다른 점을 소쉬르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소쉬르는 기호와 그 기호가 지시하는 사물로 구별한다. 이를 야생화의 1연에 적용을 해보면 아래와 같다.

‘백리향’을 기호(S)라 하고, ‘엷은 연록 눈매의 꽃’을 지시물이라고 한다. 소쉬르의 기표(SA)와 기의(SE)를 각각 기호와 지시물에 일치시켜면,

이는 소쉬르의 기호학에 의한 도식이다.

위 김춘수 시를 평하는 평자는 기호와 지시물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백리향은 엷은 연록 눈매를 가진 꽃이다”라고 할 때에 기호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지시의미론’이라고 할 때에 이런 의미론은 타당성을 갖기 힘들다. 위 김춘수 꽃에 대한 평자들은 김춘수의 시의 표현 중에 ‘~다오’ ‘~이 되고 싶다’ 같은 소망을 나타내는 말들이 반복적으로 들어 있는 데 주목한다. 김춘수 자신은 그렇게 강하게 기표와 기의를 연결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평자들은 이 점을 간과한다.

김춘수는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욕구하고 있는가? 꽃에 대해 말을 해 놓고 나니 성이 안 찬다는 것이다. 기호가 지시물을 그 반대로 지시물이 기호를 다 표현 내지 표시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깡은 뒤집는다.

와 같이 사람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마치 해변가 모래 발자국과 같이 말이다. ‘그림자’는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백마’는 백마가 아니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와 같이. 아래 그림에서 파이프란 말은 그림으로서 파이프를 지시하고 있는가, 아닌가?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가 바탕, 그리고 그림의 윤곽인 프레임, 그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파이프’라는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는 달라진다. 심지어는 ‘이것은 파이프이다’와 ‘이것을 파이프가 아니다’가 다 가능해 진다.

우리가 자연언어를 사용할 때에 이런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소쉬르의 기호학이다. 소쉬르는 기의를 상위에 기표를 하위에 둔다. 기의가 ‘갑’이고 기표가 ‘을’이란 뜻이다. 소쉬르의 도식은,

와 같다. 능기와 소기 등은 모두 일본학자들이 지어낸 용어들이다. 우리 말로 기표는 ‘말’과 ‘눈’이고 기의는 ‘말귀’로 ‘눈치’라고 번역해 본다.

소쉬르 기호학의 쟁점은 갑이 을을 억압한다는 데 있다. 이를 뒤집는 것이 라깡이다. 라깡이 뒤집는 이유도 바로 이런 억압 구조 때문이다. 박미서 시 ‘야생화’를 감상하는 관점도 바로 소쉬르와 라깡 사이의 갑과 을의 관계에 서 있다 할 수 있다. 위계적으로 보면 꽃-야생화-백리향의 순서로 상하가 결정될 것이다. 위의 것이 갑이고 아래 것이 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위계질서는 바벨탑 같이 기초가 흔들림 속에 있다.

소쉬르에게서 갑과 을은 평등하지 않다. 그가 기의를 상위를 둔 것은 물질에 대해 정신과 관념을 우위에 둔 경향이 있다. 현상학자 후설의 영향이다. 플라톤주의를 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표와 기의 간에 1. 기의 지향적, 2. 기표 지향적, 3. 상호작용 이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이승훈, 라깡으로 시 읽기, 21쪽). 박미서 시에서도 물론 이들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인지 아니면 다른 선택이 있는지가 관심의 적이 되다.

야생화에서 기표와 기의의 문제

라고 할 때에 기표와 기의는 아무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마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라고 하듯이. 시인이 자의적으로 가져다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춘수는, 시에서 본 바와 같이 이름을 명명하는 순간 그 기표에 의해 존재의 의미가 부여되고, 나아가 세계 질서에 공헌한다는 것이다. 김춘수의 의도가 이와 같다면 휴지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라깡 학자들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감상문(3)에서 상론될 것이다.

소쉬르는 기의가 기표에게 의미를 준다고 한다. 이름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유용useful’하다는 견해가 있다. ‘flower’ 나 ‘꽃’이나 모두 그 말이 통하는 사회 속에는 하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학설이다. 그러나 라깡은 이러한 견해마저 일축할 것이다. 시어는 자기 지시성에 의하여 시어 자체가 시를 말하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시어는 그 어떤 대상과도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사회적 약속이 파기된다.

기표와 기의 간의 이러한 대 혼란 때문에 현대시는 읽는 독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 “현대시는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죠. 그런데 위대한 소음이죠.”(25) 그러면 시를 어떻게 써야 ‘위대한 소음’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인데 어떻게 위대한 소음을 만들 수 있을까?

방법은 혼동을 더 혼동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기표의 기표’ 그리고 ‘기의의 기의’를 중층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기표1은 (두건을 쓰고 ) ‘기표의 기표’를 중층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기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바벨탑은 더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이러한 ‘기표의 기표’와 ‘기의의 기의’같은 것을 두고 자기 지시적이라 하고 과학적 언어를 구사면 ‘프랙털fractal’이라고 하다. 박미서 시인은 이러한 기법을 도입한다. ‘기표의 기표’란 ‘백리향의 야생화’와 같은 것이다. 시제를 중층화 하는 것이다.

현대시가 되기 위해서 ‘위대한 소음’을 시인들이 만드는 기법이다. 그런 점에서 김춘수는 이 점에서 실패했다. 위대한 소음은 ‘자기언급 self-reference’ 혹은 ‘자기 지시성’이다. 이 말은 현대시란 서정주의도 자연주의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니고 초현실주의도 아닌, 시어들은 시어 자체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언급이란 어린 아이들의 ‘옹알이’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대 시인들이 미쳤다고 하는 것은 자기나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옹알이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지시성을 ‘미적 자율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가 사실주의와 같이 현실에 대한 어떤 의도적인 것을 가져서도 안 되고, 심지어는 자연을 탐닉하는 서정적인 것이 되어서도 안 되는, 어떤 목적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가 자기 자신을 지시한다고 할 때에 남는 것은 시 자체의 체계성이다. 구조란 말 대신에 소쉬르는 ‘체계’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시에 대한 평가는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체계성이란 말이다. 체계성에는 주로 시어들의 대칭적 구조나 시제와 시어들 간의 내적 관계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시의 의미는 체계 내에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야생화에서 소쉬르의 체계성을 찾을 차례이다.

소쉬르의 체계성으로 본 ‘야생화’

소쉬르가 말하는 ‘체계’란 ‘구조’의 다른 말이다. 체계성은 우선적으로 대칭성을 전제한다. 남/여, 양/음, 낮/밤 같은 것이 모두 대칭성이다. 다시 체계성은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로 나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본 체계성을 다음과 같다.(이승훈, 27)

이를 시 ‘야생화’에서 그대로 가져와 대입하면 아래와 같다.

내적 관계란 낱말 내부의 관계로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이다. 외적 관계는 낱말과 낱말의 관계이다. 3연의 경우 ‘은은히 들렸다’와 ‘안 들렸다 하는’ ‘모래들의 밀물’과 같은 경우를 두고 낱말과 낱말 간의 관계라 한다. 다른 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관계를 발견한다.

소쉬르는 낱말과 낱말의 관계는 유사성과 상이성을 근거로 하여 서로 결합된다고 한다. 각 연마다 유사성과 상이성은 반복된다. 이를 ‘은은히 들렸다’ ‘안 들렸다’라고 상이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상이성을 ‘모래들의 밀물’로서 유사성을 고조시킨다. ‘한송이 구름 노니는’과 ‘호수가에’는 상이성이지만 ‘반복하는 소리의 꽃’으로 유사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상이성과 유사성은 연마다 반복된다.

다음 시의 내적 관계를 보자. 내적 관계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로서 수직 관계이다. 각 연마다 백리향의 내적 관계를 맺어 나가면 별들-소리의 꽃-밀물-별자리-번지는 향기-조약돌 등과 같다. 이런 내적인 것들은 모두 야생화와 백리향의 의미들이다. 그러나 이들 내적 관계를 아무리 채우더라도 의미들을 다 채우려 하지만 백리향과 야생화의 간격을 다 매우지는 못한다. 즉,

의미 ≒ 가치 → 체계 내적 관계

와 같다. 여기서 교환과 비교의 문제가 대두된다.

와 같다. 야생화와 백리향은 서로 교환된 것이다. 그런데 백리향과 야생화는 서로 상이성에 근거하여 서로 교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100원이란 지폐로 사과를 산다고 할 때에 이 둘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는 종이이고 하나는 식물성 열매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자 카드로 사과를 산다고 할 때에 이런 교환은 완전히 전기회로가 식물 열매와 교환하는 것이다. 자고로 기표와 기의는 이런 관계이다. 이런 교환 관계를 파고들어 자본주의의 맹점과 붕괴를 예언한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이에 근거하여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라는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만년의 그의 사상의 정리한다.

이렇게 1연의 ‘두건’이 갖는 양가적 의미가 비로소 선명해 진다. 그런데 우측의 비교 관계로 눈길을 돌리면 두건은 예모를 갖춘 모자로 변한다. “백리향은 소리의 꽃”이라고 하는 순간 상이성이 유사성으로 변해버린다. 즉,

로 변해버리는 것과 같다. 상이성이 교환이고 유사성이 비교인 것이 분명해졌다. 박미서의 시 ‘야생화’은 이러한 교환과 비교 그리고 상이성과 유사성을 구사한 체계성을 지니고 있다.

백리향과 ‘소리의 꽃’과 ‘밀물’과 ‘향기’ 등은 비교가 되는 것이지 교환이 되는 것이 아니다. 100원을 주고 사과를 사 와서 먹을 때 ‘단맛’ ‘시원한 맛’ ‘사각사각 감촉’ 등은 사과와 비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00원으로 사과를 샀다고 할 때에 그것을 교환을 한 것이다. 지폐 100원과 식물성 과일 사과는 교환이 된 것이다.

종이 지폐가 거기에 교환되는 금이 있을 때에 이를 태환지폐라고 한다. 그러나 1971년 이런 태환지폐의 위기가 온다. 미국은 태환지폐를 포기하고 금융으로 경제를 대신한다. 교환 관계가 메타화 하면서 사람들이 사과 맛을 직접 즐기는 실물경제가 무너진다.

이것은 경제의 위기로서 IMF란 지폐 보유고가 모자랄 때에 발생한다. 온 국민들이 두건을 쓴 경험이 있었다. 사과는 배와 비교를 해야지 사과를 집과 비교를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한글 ‘파이프’와 영어 ‘pipe’는 모두 같은 의미를 지향하는 바, 다시 말해서 같은 기의를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100원 짜리 종이 돈 만큼의 금이 은행에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야생화와 백리향의 교환을 통해 상이성이 있어야 하고, 백리향은 ‘향기’와 유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원을 주고 사과를 샀을 때에(상이성) 그것이 그 만큼의 상큼한 맛이 있어야 한다(유사성)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백리향은 야생화와 상이성을 통해 교환이 되며, 백리향은 유사성을 통해 비교(‘향기’나 ‘밀물’)가 된다. 그 때에 백리향의 가치가 만들어진다. 상이성과 유사성을 절묘하게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분홍볕 ‘읊조림’이 있어야 한다. 읊조림이란 상이성과 유사성 사이에서 그것이 조화되도록 비[祈禱]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닳지 않을 길잡이의 눈’이란 교환에서 비교로 그리고 상이성에서 유사성에로의 이행 과정을 제대로 되도록 읊조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상은 내적 관계로 시를 본 것이다. 다음은 외적 관계로 볼 차례이다. 외적 관계란 낱말과 낱말 간의 관계라고 했다. 백리향은 (↑)로 본 수직 관계는 유사성 비교이고, 눈 +멀어도= 수평관계(+)는 상이성 비교이다. 예를 들어서 (1연)에서 ‘백리향’과 ‘눈’과 ‘멀게’ 하다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상이성 같이 보이지만, 수직방향에서 보면 유사성을 보인다. 인정의별들은 +소리를+ 반복한다(2연), 하늘빛꽃은+ 향기를 +번진다(5연) 그러나 “은은히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모래들의 밀물”(3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평관계에서는 상이성으로 교환되고 있다.

시적 문장이 의미성을 갖자면 이러한 양가성으로만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박미서 시인은 ‘야생화’에서 이런 양가성을 최대한 발휘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라깡은 소쉬르의 교환을 ‘치환’이라고 했다. 그래서 소쉬르와 라깡 사상은 쉽게 서로 바꾸어 이해될 수 있다. 야생화와 백리향이 소쉬르와는 서로 반대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시 ‘야생화’는 용어의 상이성에 상관없이 수평축과 수직축을 잘 조화시켜 작시된 시라고 보인다.

김춘수 ‘꽃’ 다시 써야하지 않을까

김춘수의 ‘꽃’을 두고 평자들이 사물에는 이름이 주어질 때에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소쉬르는 말한다. 언어는 존재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고. 시는 다만 시 자체의 체제성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기호학은 말한다. 한계전은 김춘수의 ‘꽃’에 대해 “‘꽃’이 존재의 발견에 대한 절망을 토로하고 있다”고도 한다(한계전의 명시 읽기, 179쪽). “이름 부르기는 빛깔과 향기, 즉 고유성을 알아차리는 행위이다. 그를 통해서만 익명성에 묻혀 있던 대상은 ’존재‘로 피어나게 된다.”(같은책)

화자와 꽃 사이에 상호 주관적으로만 이름붙이기를 할 수 있고 그 때에 존재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소쉬르는 어떤 주관성도 배제하면서 시는 시가 갖는 체제성 자체 안에서 교환과 비교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체제성뿐이다.

그래서 ‘야생화’ 시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체제성만으로 감상하는 것으로 가름하려고 한다.

<창이/북미 오렌지카운티 거주>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