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라깡 심리학으로 본 ‘야생화’ 감상문(3)

창이 승인 2019.04.30 00:25 | 최종 수정 2019.08.10 14:02 의견 0
by Yvonne Coomber

소쉬르와 라깡의 비교

박미서 시인이 시 ‘야생화’에서 시제 ‘야생화’와 ‘백리향’을 분리한 것은 일파만파란 말 그대로다. 감상문2에서는 소쉬르의 기호학에 근거하여

로 기의에 기표를 넣고 화살표로 표시 했었다. 그러나 라깡은 뒤집어서 기표를 위에 그리고 기의를 아래에 두었으며, 기표는 대문자이고 기의는 소문자이다. 기표와 기의를 둘러싸고 있는 화살표도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야생화와 백리향의 상하 구조도 완전히 바뀌었다.

라깡에서 대문자 갑은 야생화이고 소문자 을은 백리향이다. 그리고 가운데 분리선은 금단의 그래서 시인은 백리향을 향해 ‘두건’을 쓰고 있다. 기호로서 기표와 기의가 그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지 못하고 현실과 관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인은 각 연마다 현실적 시어들로 백리향과 야생화를 연관시킨다.

두 화살표가 없어진 것은 기표와 기의 간의 상호 관계보다는 양자를 나누는 금줄(禁绳)에 의하여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문자와 대문자는 을과 갑으로 억압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야생화’와 ‘백리향’은 이렇게 그 관계가 변해 버렸다. 소쉬르에 비해 라깡은 훨씬 전투적이 되었다. 그래서 같은 시를 두고 소쉬르와 라깡이 이해하고 감상하는 방법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시에서 ‘두건’(1연)이란 소쉬르에게서는 기표와 기의를 두르는 것으로 예의의 표식이다. 그리고 화살표는 ‘읊조림’(7연)이다. 그러나 라깡은 이 둘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그것은 라깡이 언어란 무엇을 대신하는 기호도 아니고 무엇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 ‘꽃’을 평하는 평자들의 말을 모두 무효로 돌리고 만다.

그러면 라깡에서 언어란 무엇인가? 그의 언어관은 불교적인 언어관과 매우 가깝다. 다시 말해서 ‘不立文字’ 그대로 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신하지도 지시하지도 못한다. 언어가 지시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絶對無 뿐이다. 없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언어이란 말이다.

“야생화 백리향은 한 송이 구름 노니는 호숫가에 밝은 인정의 별들, 반복하는 소리의 꽃”(2연)이라고 할 때에 ‘야생화 백리향’은 기표로서 기의는 ‘호숫가의 밝은 인정의 별’이지만, 이런 기의로는 기표를 읊조리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다시 다시 진술을 해야 한다.

이렇게 기의는 기표의 강요에 못 이겨서 읊조려 나간다. 두건을 쓰고서. 기의는 아무리 읊조려도 기표는 모자란다고. 말을 해놓고 후회하는 일상적인 경험들은 모두 말이 사물 말이 사건과 일치하지 않는 그 사이의 결핍 때문이고, 그래서 그 사이를 채우려는 혹은 메우려는 욕망이 생기게 된다.

바로 여기서 저 유명한 라깡의 ‘욕망desire’ 이론이 나온다. 즉, 언어=결핍=욕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이승훈, 33) 이러한 라깡의 이론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노자의 ‘도덕경’이다. 1장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妙 故 常無欲而 觀其妙 常有欲而 觀其邀 此兩者 同出而 異名 玄之又玄

라고 한다. 이름을 불러 놓고 보니 이름과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 불립문자 언어도단이어야 하는가? 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말은 두 곳에서 유래하는 데 하나는 ‘무’이고 다른 하나는 ‘유’이다. 무인 경우는 만물의 시작이고 유인 경우는 만물을 낳은 어머니와 같다. 그래서 무를 욕망하게 되면 그 경지가 ‘오묘’하고, 유를 욕망하면 그 경지가 ‘요요’하다. 그런데 이 욕망은 같은 현묘한 근원에서 유래한다. 공자는 유욕만을 보아 말과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데서 울었다고 한다. 붓다는 연꽃을 드니 미소로 답한다.

시인이 ‘읊조린다’고 할 때에 노자는 매우 설득력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불교는 ‘무욕’을 유가는 ‘유욕’을 강조한다. 그래서 불교는 말없는 이심전심을 강조하고 유가는 적극적으로 이름 짓기를(유욕)을 강조한다.

라깡은 한 기표가 다른 기표로 변하는 것을 ‘치환’이라고 한다. 소쉬르는 이르 ‘교환’이라고 했다. 시인은 시에서 연을 이어 가면서 치환을 한다. 기의의 연쇄 고리가 꽃’(2연), ‘밀물’(3연), ‘폭풍우’(4연), ‘향기’(5연), ‘강인한’(6연), ‘분홍볕’(7연) 와 같다.

그러나 기의들이 아무리 읊조려도 완벽할 수가 없다. 기표는 기의에 채찍으로 친다. 야생화 기표와 이런 기의들 사이에서 기의들을 대변해 주는 것이 백리향이다. 백리향은 화자 자신이다. 화자는 백리향에게 사전을 찾아 가며 야생화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야생화는 제 자신도 벌써 이름이기 때문에 야생화 위의 기표인 ‘꽃’에게 읊조려야 한다.

기의가 유라면 기표는 무이기 때문에 기의의 의미를 초월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으로 변해버린다. 화자가 시어들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고 화자도 모르는 화자의 무의식이 욕망을 결합해 나간다. 이를 노자는 무욕과 유욕이라고 한다. 무욕과 유욕이, 다시 말해서 무의식과 의식이 결합하여 시어를 만들어 나간다.

최초의 기표는 무욕과 결합된다는 것을 정신분석학은 알고 있었다. 정신분석의사들이 환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 환자의 무욕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분석의의 두건에는 무욕(조의)과 유욕(예의)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어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무욕으로 결혼을 했지만 살면 살수록 결핍이 욕망으로 변한다. 유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혼을 요구한다. 욕망이 클수록 말을 많이 하게 되고, 말은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낀다. 기표의 욕망을 기의가 다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혼이란 대략 이런 것이란 것이 라깡의 주장이다. 소쉬르 같이 적극적으로 연결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시인은 야생화에서 연마다 기표와 기의를 연결시키려 한다. 백리향이 가운데서 8개 이상의 기의들을 기표 야생화에 가져다 보여주지만(읊조려 가며) 야생화는 고개를 흔든다. 그러면 무한대의 기의를 만들어 그 무한대 자체까지 괄호 속에 넣으면 유한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시어들은 체계 아닌 체계가 구조화된다.

라깡에 의하면 기표 안에는 ‘대타자(o)’라는 것이 좌정하고 있다. 라깡 사상에서 ‘대타자’란 개념만 파악하면 그의 사상 전모를 소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타자를 일명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한다. 한 집안 안에서 아버지는 다른 식솔들에게 금지어와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다. 사회에서는 도덕과 율법 같은 것이다. ‘하지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주체가 대타자이다.

야생화는 ‘꽃’이란 상위 개념 즉,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꽃’은 기의가 이러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름 짓기의 안내서를 이미 제시해 놓았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신이 인간에게 그러했듯이. 그리고 이러한 대타자가 욕망을 자아내게 한다. 드디어 실과에도 이름을 붙이게 하고는 금지어를 내린다. 그러나 금지어 자체가 욕망을 자아낸다. 이름 짓기 자체가 벌써 욕망을 불렀다. 소월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할 때에, 1연에서 두건과 이름이 연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라깡의 경우는

무의식→욕망→기표→기호→언어→구조

로 그 면모가 드러난다. 이 도식에 의하면 기표는 욕망을 생산 하고, 욕망은 기호와 언어를 재생산한다. 욕망은 무의식인데 이런 무의식이 언어로 재생산된 것이 시적 언어들이다. 이런 라깡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에 김춘수의 꽃‘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언어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평자들도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승훈교수가 인용한 ’꽃‘에 대한 비판을 들어 보자.

“...임진수 교수도 지적한 것처럼 김춘수의 ‘꽃’도 비판의 대상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즉 언어로 불러주었을 때에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진술함으로서 욕망이 충족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잘못이에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부재가 되었다. 결핍이 되었다, 욕망이 되었다’고 해야 맞습니다.”(이승훈, 46)

김춘수 시에 대한 라깡의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박미서 시인은 시의 첫 연에서는 이름 부르기의 순간 두건을 쓴다고 했고 마지막 연에서는 읊조린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라깡 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춘수 역시 ‘꽃’ 속의 표현 중에 "~다오" "~이 되고싶다"란 말들이 반복되면서 소망을 드러내는 간절한 어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박미서 시 만큼 구조적이고 체제적이지 못하다. 이 점은 라깡을 통해 볼 때에 두 시인이 첨예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는 젖을 충분히 먹고 요구(need)는 충족이 되는데 그런데도 계속해서 칭얼거릴 때에 이 후자에 해당하는 ‘칭얼거림’을 욕구(demand)라 한다. ‘칭얼거림’은 어린 아이의 언어로서 부단히 무엇을 욕구하는 것이다. 물질적 요구(젖)은 충족되었으나 무슨 결핍이 있는지 칭얼거린다. 어린 아이 뿐만 아니라 젖이란 물질적인 요구와 언어 사이에는 어떤 채워질 수 없는 중간적인 것이 있는 데 그것을 라깡은 ‘잉여’라 한다. 이 틈과 같은 잉여가 욕망이다. 라깡은 잉여를 기호 ◇로 나타낸다. 즉,

와 같다. 젖은 요구(need)라면 칭얼거림(언어)dms 욕구(demand)이다. 그 사이에서 생기는 잉여가 욕망(desire)이다.

마르크스의 잉여론도 화폐와 물건 사이에서 생기듯이 언어와 대상, 언어와 물질, 언어와 사물 사이에 반드시 잉여가 생긴다. 바로 이점을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道’와 ‘常道’ 그리고 ‘名’과 ‘常名’ 사이에 잉여가 있어서 유욕과 무욕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감히 “내가 꽃을 보고 꽃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잉여의 존재를 안다면. 두건의 관觀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김춘수에 대해 박미서 시인은 ‘야생화’라는 이름을 부르기 전에 두건을 먼저 쓴 후 기표 야생화의 기의들 8개들을 부르기 전에 ‘백리향’을 중간 매개체로 불러 온다. 젖과 칭얼거림 사이에 장난감 같은 도구를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다. 야생화가 백리향을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야생화는 백리향의 대리 기표로 삼아(기의이지만), 즉 기의를 기표로 대리 삼아 잉여물로 만든 다음 이 백리향에 8개의 기의들을 귀속시킨다. 라깡의 표현대로 하면 기표 속에 욕망이 있고, 기표가 욕망을 낳고(야생화가 백리향을 낳고), 욕망이 기표를 이끌고간다.

이는 정확하게 현대과학의 3대 과학혁명 가운데 하나인 프랙털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표 속에 기표를 만들어 자기 사상적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춘수는 이런 기법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이를 두고 “구조주의 언어학을 극복하는 것이고, 정신분석과 언어학이 결합된다”(이승훈, 48)고 한다. 무의식은 의식 속에 의식은 무의식 속에 자기 상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꿈이란 모두 언어의 소산이지 무의식의 소산이 아닌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꿈 역시 의식의 소산 즉 언어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야생화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야생화 / 박미서

하얀 두건의 둑길에
눈멀어도 좋을 이름,
엷은 연록 눈매의 백리향

한 송이 구름 노니는 호숫가에
밝은 인정의 별들,
반복하는 소리의 꽃

은은히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모래들의 밀물

서사시의 나뭇가지 뻗어
별자리 변화들을 적듯이
폭풍우 이름없이 스쳐가네.

이미 피어난 하늘빛
잠잠히 일렁이다가
사잇줄에 번지는 향기

조약돌에서
진흙바위까지
저마다 닿을 강인한 곳

백리향은 모래들의 밀물이다(3연)
백리향은 번지는 향기이다(5연)
............

이라고 할 때에 아무리 연을 계속하여도 백리향에 대한 상상력의 소산 혹은 은유이다. 아무리 연계 고리를 만들어나가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기표 야생화는 욕망이고 그것은 무의식이다. 시 쓰기란 언어를 매개로 욕망과 함께, 욕망 속에서 욕망을 찾기이다. 그리고 욕망은 억압된 무의식이다. 시에서 ‘야생화는 야생화라 하는 순간 야생화가 아니다’. 무의식을 찾는 것 자체는 의식이다. 그래서 노자는 무욕에 대해 유욕을 말하고 있다. 시 쓰기란 언어 속에서 언어와 함께 욕망을 찾기다. 무욕이면 ‘기묘’함을 볼 수 있고, 유욕이면 ‘요요’함을 본다.- ‘닳지 않을 길잡이 눈’(7연)으로만 此兩者는 同出而異名하니, 同謂之玄이니라.玄之又玄 ...(차양자는 동출이이명하니, 동위지현이니라. 현지우현하니 ...)로 향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작이란 화자 내면에서 시어가 산출되는 구조이기도 한다. 결국 시적 모험은 시인의 무의식과 욕망, 그 욕망과 언어의 관계를 안 다음에 대타자인 아버지의 이름인 법률과 질서 같은 것에서 무의식을 해방시켜 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란 욕망을 해방시키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야생화’는 자아 해방을 통해 무의식에서도 해방되려는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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