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론·이집트 신화로 박미서의 시 ‘은빛 우산’ 읽기
시인 문태준은 “내가 시를 쓴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시인들은 자기들이 시를 쓰기 전에 시가 먼저 자기를 찾아 왔다고 한다. 만약에 과학자들이 과학이 먼저 자기를 찾아 왔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중력에 사로잡혔고, 인간은 언어의 의미에 사로잡혔다. 시인들은 우주의 중력 같은 언어의 끌림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지구가 먼저 우리를 끌어가듯 시인들은 시적 언어의 의미가 자기들을 먼저 끌어들였다고 한다.
시인에게는 시가 창작돼 나오는 모델이 있는데, 이를 에델만 모델이라고 한다. 에델만 모델에 의하면 시인들은 익은 것 보다는 날 것에 먼저 주목을 한다. 이 말은 시인들은 언어로 가기 전에, 다시 말해서 의식으로 가기 전에, 시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의식이 작동하기 전에 시를 쓰야 한다는 말이다.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인 자신이 오랜 동안 고독과 싸우면서 침묵 속에 지내야 한다고 한다. 에델만 모델에 의하면 시어는 자아-시상하부-해마-전두엽-두정엽-측두엽-브로카·베르니카 영역의 순서로 전개돼 나타난다.
브로카·베르니카가 일상언어 영역이다. 문태준 시인의 말은 이 언어 영역 이전 시상하부(무의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시를 지은 것 같지 않다고 한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즉, 언어가 단절되는 곳은 브로카·베르니카 ‘이전’과 ‘이후’ 두 곳에서 모두 가능하다. ‘이후’를 두고 선사禪師들의 언어도단이라 하고, ‘이전’을 두고 언어 장애적 언어도단이라 한다. 그러면 박미서의 시어들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언어는 언어인데 일상적 언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감상자가 박 시인의 시를 일상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이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언어는 감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구를 당기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인간을 당기는 것과 같이 시가 이 시인을 잡아 당겨 시가 탄생한다. 그래서 시인은 침묵 속에서 자기 시에 자기 자신마저 빨려드는 것일까. 박 시인의 이번 시는 큰 중력에 끌려 쓰인 것 같다.
이런 중력 같은 것의 주소가 시어들의 고향이다. 문태준 시인은 시집만 읽는다고 한다. 공자도 ‘시삼백이면 思毋邪’라고 했다. 사특한 생각을 다 없애는 것은 오직 시경뿐이란 뜻이다. 수학과 과학마저도 시 한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박미서 시는 간단하고 단순한 언어로 된 불과 6연 밖에 안 되지만, 그 안에서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 내려 해도 시가 함의하는 것의 절반도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음양오행을, 주역을, 그리고 가장 단순하게 천자문을 통해 시를 읽어내고 지금 진행 중인 우리 사회적인 문제를 진단해 보기로 한다.
음양오행 전에 시가 있었다!
박미서 시인의 시 ‘은빛 우산’을 감상하는 순간, TV에서 포항 지진이 지열발전소 때문이란 뉴스가 긴급속보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시의 2연 ‘땅 울리는 비가 되어’가 아나운서의 말과 서로 반향을 하는 것 같이 들린다. 감상자 뇌의 시상하부로부터 들려오는 반응 같았다. 이렇게 박 시인에게도 시가 먼저 찾아왔을 것으로 본다. ‘25시’의 저자 게오르그는 잠수함에는 토끼를 반드시 싣고 다니는 데, 수압 등에 의한 잠수함의 이상 징조를 사람보다 토끼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시인이야 말로 그 시대의 징조를 가장 먼저, 가장 민감하게 예감하고 반응하는 토끼와 같다고 했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동일한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고 한다. ‘음양’이란 물과 불, 밤과 낮, 여자와 남자와 같은 모든 대칭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오행’이란 목·화·토·금·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행을 서양에서 다섯 요소들 five elements이라고 번역해 버려 많은 오해를 야기하고 심지어는 미신과 비과학적인 것으로까지 취급받게 했버렸다. 현대 과학은 5원소가 아닌 100가지 이상의 원소가 있기 때문이다. 번역상의 오해일뿐 오행론의 참된 의미는 그것이 아니다. 음양오행이 얼마나 첨단이론인가를 보자.
우주나 인간사를 대칭 구조로 파악하면 대칭에는 ‘거울대칭’과 ‘회전대칭’ 두 개 뿐이다. 삼각형에는 세 개의 꼭지점들이 있는데 꼭지점과 꼭지점끼리의 대칭을 거울 대칭이라 하고 모두 3개이다. 삼각형 자체를 120도 만큼씩 회전하면 그것도 3개로서 삼각형 안에는 모두 6개의 대칭뿐이다. 삼각형 안에는 더 이상의 대칭은 없다. 이러한 이론은 수학의 군론을 통해 밝혀졌다. 오각형 안에는 60개 이상의 대칭은 없다. 더 이상 음양오행에 대하여 여기서 논급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음양오행론은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수천년 전에 알았던 탁월한 이론이다. 차라리 주역과 음양오행론은 최첨단 과학의 이론으로 보아야 그 뛰어남이 입증된다. 서양수학이 방이라면 역易은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음양오행론으로 박미서의 시를 감상하기 위한 변명이다.
음양오행 안에는 가장 중요한 음양 대칭(반영대칭)과 상생상극에 의한 회전대칭이란 법칙이 내재돼 있다. 상생상극이란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은 상생相生이고,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이 그것이다. 마치 회전문 같이 상생상극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은빛 우산’의 6개의 연들을 음양 대칭과 상생상극에 의한 대칭 구조로 파악하고 나아가 그 구조가 파괴될 때에 어떤 결과가 따를 것인가를 포항 지진에 대입하는 것으로 감상문을 대신하려 한다.
음양오행과 지열발전
지열발전이란 일상생활에서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간단한 원리에 근거해 있다. ‘마중물’은 땅 밑의 물을 자아올리기 위해 지상의 물을 수도관을 통해 부어넣은 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경우는 찬물을 부어 찬물을 길러 올리는 것이지만, 지열발전은 찬물을 부어 더운 물을 길러 올리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마중물은 불과 수m 정도이지만 지열발전의 경우는 무려 4km까지 구멍을 뚫어야 한다. 펄펄 끓는 물이 지하에 흐르고 있어서 인간들은 그 물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물로 발전도 할 수 있고, 직접 용수로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미 성공한 사례가 있다.
이집트인들은 하늘은 여신 누트의 몸이고, 땅은 남신 게브의 몸이라고 한다. 이런 신들의 몸을 공구를 박아 구멍을 내고 거기서 신의 피와 같은 더운 물을 뽑아낸다고 할 때에 그 신들이 그냥 있겠는가? 시어와 주문의 언어 사이에 경계란 있는 것인가? 신화와 과학 사이에 담이 있다고 하는 어리석음이 참화를 불러 오고 있지 않는가? 박미서 시의 6연들은 음양오행의 철길 위로 달리는 열차와도 같이 우리의 미래로 안내하고 있다.
음양오행에서 수는 청, 목은 녹, 화는 적, 토는 황, 금은 백, 이다. 아래 도표는 색깔로 본 지열발전의 구조이다. 물, 나무, 불, 땅, 바위이 색깔별로 다 보인다. 위 <그림 1>의 색들과 대비해 보아도 좋다.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도 좋다. 뜨거운 물을 적, 찬 물을 청이라고 양과 음의 대칭으로 보자.
음양오행의 색 그대로 청색은 주입된 찬 물이고 적색은 땅 속의 더운 물이다. 같은 물이지만 차고 더운 차이 때문에 이를 음과 양으로 나눈다. <그림 2>에서 1은 지하에 자연 그대로 있는 더운 물이다. 2는 주입된 물과 지하의 더운 물이 만나는 곳이다. 음과 양이 만나는 곳이다. 주입된 찬 물은 마중물로서 더운 물과 결합돼 같이 더워진다. 이렇게 다시 더워진 물이 두 갈레로 나뉘어 하나는 직접 용수로, 다른 하나는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일으킨다. 참 찬란한 구미 돋우게 하는 유혹이다. 이 유혹에 끌려 무려 1000개의 공구를 가이아 몸에다 박는다.
지진의 진앙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 지열발전소를 세우면서 지하 깊숙이 박은 시추공이 활성단층을 건드린 것이다. 지하 깊숙이 시추공을 1000개씩 박다보면 그 가운데 한 두 개가 단층을 활성화할 수 있다. 단층들끼리는 자기 조절에 의해 충격을 받아야 하는데, 인공 시추공이 단층을 흔들어 버리면 상생상극의 오행의 균형이 깨지고 만다.
‘천자문’ 에서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데, 이를 ‘金生麗水’라 한다. 오행론의 ‘금생수’에 ‘여麗’를 하나 더 넣은 것뿐이다. 빗물은 하늘의 구름이 비가 돼 내린 것이고, 그렇게 내린 빗물은 땅 속의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지하수가 되고, 지하수는 다시 땅위로 나오면 용출수가 된다. 그 물이 나무와 뭇 생명의 근원이 된다. 이 순서를 오행론은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과학은 이 질서를 파괴해 놓고 오히려 오행론을 비과학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박미서 시인은 시를 통해 비과학을 과학으로, 과학을 비과학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은빛 우산’과 음양오행론
1연
그 푸른 빗소리
공명의 빗물, 한 순간의
빛 매김이라 여기고
2연
붉은 빗소리
가득 차 오를
땅 울렁이는 비되어
‘푸른 빗소리’와 ‘붉은 빗소리’는 음양대칭을 의미한다. 오행은 반드시 각 행마다 음양대칭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인체 장부에서 수水의 음은 ‘신장’이고, 양은 ‘방광’이다. 인체에서 목의 음은 ‘간’이고 양은 ‘담’이다. 오행 순환의 기본조건은 음양 대칭이다. 그 이유는 배터리 안에서 음양 대칭 구조만 형성되면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래도 음양을 미신이라고 하겠다는 것인가? 다음 순서는 상생상극이다. 그래서 박미서 시인이 빗물(수)을 ‘푸름’(음)과 ‘붉음’(양)으로 첫 연과 두 번째 연에서 대비한 이유는 음양대칭이 오행 순환의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연은 배터리의 직렬 구조와도 같다.
음양대칭의 순간에 전기가 방전되듯이 ‘땅 울림’이 생기게 되고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 우박으로 변하고 땅에서는 지진화산이 발생한다. 시가 얼마나 잘 이러한 자연의 상생상극을 잘 묘사하고 있는가를 보자. ‘공명의 빗물, 한 순간의 빛 매김하고’ 빗물(수)가 빛(화)과 공명한다. ‘수극화’이지만 이것 역시 공명이다.
공명이란 ‘相生’과 ‘相克’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터리의 직열은 음·양과 양·음이지만, 병열은 음·음 양·양이다. 그래서 생과 극이 모두가 공명이다. 공명하여 상생상극이 ‘가득 차오를’ 때에 땅(토)이 울렁울렁 한다. ’화생토‘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내면에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각의 큰 변동을 감지케 한다. 시인의 몸 역시 목(간)-화(심장)-토(위)가 공명하고 있다. 사람의 몸도 땅의 지진과 화산 그리고 해일과 같이 자연스런 요동친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바위의 결(금)을 잘 못 다칠 때에 인공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는 포항지진이 있기 전에 사람들에게 읽혀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을 잠수함 안의 토끼와 같다고 한다.
3연
비가의 불꽃
은빛 물웅덩이
조화롭게 환해져 오네
‘비가悲歌의 불꽃,’ 그런데 슬픈 노래(비가)의 불꽃으로 간다는 것은 내면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상극하면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수극화’의 조화를 시인은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극화의 공명이 은빛 물웅덩이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물이 불 속에서 타고 있는 강렬함을 느끼게 한다. 물이 불에 타자면 ‘水生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 없는 ‘비가의 불꽃’.
4연
사그라들지 않도록
엄지별에 접혀
그늘 속삭이는 구름의 산
시제 ‘은빛 우산’에서 우산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시에서 우산은 하늘을 덮고 있는 구름이다. 구름이 빽빽하게 모여 금방 비로 변하기 직전의 상태를 주역 9번 소축괘는 ‘밀운密雲’이라고 한다. 이러한 밀운을 ‘엄지별에 접혀’라고 하는 것 같다. 밀운은 상태 변화의 임계점과 같은 것이다. 구름이지만 이미 비인, 그러나 아직 비가 아닌 임계점이 바로 밀운이다.
밀운은 소축괘小畜卦안의 괘사로서 밀운불우密雲不雨로 “먹구름이 자욱한데도 비가 아직 내리지 않는다”란 의미이다. “엄지별에 접혀, 그늘 속삭이는 구름의 산”이 우산이다. 이러한 밀운불우의 상태를 마그리트의 작품과 연관시켜 보자.
목말라 타들어 가는 붉은 대지, 그러나 우산에서 빗방울은 보이지 않고 우산 위의 물은 컵 속에 모여 있지만 우산과 반대 방향으로 서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려 하나 컵은 그것을 막고 있다. 대지는 우산 위의 물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산 위의 물컵은 금방 넘어져 우산 위로 물이 흘러내리려는 듯, 곧 소나기가 쏟아질 듯한 ‘밀운불우’. 소축괘를 보라. 아래에는 하늘(☰)이 있고, 위에 바람(☴)이 불고 있다. 빗바람이 부니 비가 곧 올 것 같지 않는가? 소축괘를 ‘통찰의 순간 moment of indight’라고 한다. 시인의 내면에 어떤 직관적 통찰이 관통하는 순간일 것이다. 혁명catastrophe 전야의 경강증catalepsis 같은 상태가 소축괘이다. 땅에서 지진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들리는 소리 같은 것 말이다.
천자문 다섯 번째 ‘운등치우 雲騰致雨’라 했다. ‘구름이 올라 비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구름이 모여들어 비를 만들지 못하는 이변, 기상 온난화와 그 반대인 한랭화가 반복되고 있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이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싶다. ‘휴일’ 그러나 전운이 감도는 휴일.
밀운이 산에 드리워 그림자가 되니, 그것을 앙·부仰俯, 즉 앙관仰觀과 부찰俯擦, 쳐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해야 천문이 바로 읽힌다는 뜻이다. 서양에서 망원경을 아무리 쳐다보아도 앙부관찰을 알 리 없다. 앙부란 우산 뒤집기를 반복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산에서 은빛 물빛이 곧 쏟아져 내릴 것이다. 이렇게 내려진 빗물만이 자연스런 물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물을 땅 속에서 길어올리려 한다. 시인은 앙부관찰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엄지별에 접혀’.
구름 산, 우산은 빗소리 되어 은빛 물방울을 쏟아 내린다. 이를 소축괘 두 번째 효는 ‘내면적 존재의 관리 management of inner being’라고 한다. 시인이 자기의 내면세계를 관리하는 모습은 천문의 앙부관찰과 같다. 즉, 서 있는 우산이 뒤집힐 때에 물은 쏟아져 내리고 우산은 다시 뒤집힐 때에 물은 다시 구름이 돼 하늘로 되돌아간다. 천둥 번개의 매개로 다시 땅으로 내린다. 이것이 음양오행의 질서이다.
5연
물비린 두 눈이 출렁
발끝에 내리네
휘영청 잔향
토는 5행 가운데 있는 일개의 행에 불과 하지만 다른 것들과는 달리 모든 행들을 다 다스리고 그 안에 包含한다. 포함되면서 포함한다. 그래서 ‘土生金’에서는 5행 전체가 출렁출렁할 정도의 동요가 생긴다. 즉, 토생금일 때에는 지층 밑바닥까지 진동이 생기고 지각이 휘영청하며 잔향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지진과 화산으로 변한다. 그래서 지진과 화산도 자연의 한 현상이다. 자연지진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런데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때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곳과 때에 발생한다. 그 때에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저 지층 밑바닥에서 구만리장공까지 파가 진동하여 휘영청 잔향을 불러일으킨다. 내면의 챠크라가 상하로 요동친다.
다른 연들과는 달리 5연이 갖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인 자신의 몸 전체가 땅(토)의 울림을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인의 몸 자체에 닿지 않던 비린 냄새가 눈을 출렁이게 한다. 후각이 청각을 자극한다. 그래서 시인의 몸에서 안이비설신이 모두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인다.
여자의 몸은 대지 땅과 같아서 땅이 병들고 아플 때 그것을 피부로 느낀다. 영어로 sympathy(동정)가 아니고, empathy(공감)을 한다. 이것이 남자과 다른 점이다. 여자의 생리주기가 달의 그것과 같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땅의 울렁거림을 여자는 자기 몸의 울림으로 느낀다. 땅의 지진을 몸의 흔들림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땅의 울림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자각한 시인은 한 순간 추스르고 그것을 승화시켜 눈물을 비 떨어지는 향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 순간은 후각이 ‘물비린내’를 느끼는 순간, 이 ‘냄새’를 두 눈으로 ‘본다’고 한다. 어느 하나의 감각 기관에 인간이 휘둘리지 않는 길을 그 감각들을 상대화해 오관을 ‘여럿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 말 그대로 ‘들어 본다’ ‘느껴 본다’ ‘냄새 맡아 본다’고 한다. ‘물비린내’가 시인의 몸에서 감돌아 발끝까지 차 휘영청 잔향으로 온 몸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시인 자신이 몸으로 체감하는 과정은 곧 땅이 겪어야 할 과정이다. 오감과 오색과 오행이 상생상극 하듯 하여야 한다. 땅과 여자 몸을 두고 주역은 “지극하도다! 땅의 원대함이여! 만물이 이에 힘입어 생해 나오도다!”(주역 ‘곤괘’ 중에서)고 했다. 누가 무엇이 땅에 상처를 내고 땅이 썩어가게 하는가?
6연
은빛 우산,
재생의 은방울꽃을 들어
열친 호흡
한 번 더 들이켜 내쉬고.
산에 깃들여져 있던 밀운이 비로 변하고 마그리트 우산 위에 물컵은 아래로 쏟아져 내려 은방울꽃처럼 흘러내린다. 이를 ‘재생의 은방울꽃’이라고 한다. 앙부하고 관찰한 것을 두고 ‘재생’이라고 한다. 이 때에 대지는 열친 긴 호흡을 할 수 있다. 들어쉬고 내쉴 때에 막힌 기가 확 뚫린다.
그러나 열친 호흡을 하려 할 때에 마실 공기가 없다. 미세 먼지 자욱한 하늘, 땅에는 천 개가 넘는 쇄 막대기가 박혀 지층을 건드리고 있다.
‘열차게’란 향가 찬기파랑가의 첫 구절이다. 달을 가리고 있는 구름을 힘차게 걷어치우고 기파랑의 얼굴을 보겠다는 시인의 노래 표현 그대로이다. 그러나 21세기 신라의 하늘과 땅은 신음하고 있다. 내쉰 숨을 들어 마시기만 하면 그것이 생명의 임종이다.
시는 주문으로 변한다.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천자문을 다시 읽는다. 금생려수 옥출곤강 金生麗水 玉出崑崗.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흐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오행의 순환 구조는 다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시인은 오행의 자연스런 순환을 ‘열친 호흡 한 번 들이켜’ 라고 하나 뉴스는 이 시인의 바람을 무위라고 선포하는 것 같다.
‘天地玄璜-宇宙洪荒-日月盈昃-辰宿列張-寒來暑往-雲騰致雨-金生麗水-玉出崑岡’ 천자문 읽는 소리가 집집마다 울려 나오기를 바라면서 박미서 시인의 시를 감상해 본다.
신화로 본 ‘은빛 우산’
고대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하늘은 여신 누트가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몸을 우산 모양으로 쭉 뻗어 있고, 땅은 그의 남편 게브가 누트와 교감하고 있다. 주역 열두 번 째 괘地天泰卦를 연상케 한다. 여자가 상위에 있고 남자가 하위에 있어야 천하가 태평하다는 괘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농경 사회에서 최대 사회적 과제였다.
남신 게브가 누트를 어루만지듯이 교감하는 여하에 따라서 여신은 비를 내리기도 화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화산과 지진은 모두 여신의 감정 표현이다. 이 여신은 시에서 우산으로 상징 된다. 히브리 신화에서는 여신의 몸이라 하지 않고 궁창穹蒼이라고 했다. 이것 역시 우산의 상징에 더 가깝다.
박미서의 시 ‘은빛 우산’에서 융이 말하는 여성과 남성 두 원리를 먼저 찾는다. 빗물, 땅은 여성 원리이고, 빛은 남성 원리이다. 그럴 때에 우산은 두 원리 모두이다. 접으면 남성, 펴면 여성 원리가 된다. 폈을 때에 우산대는 남성 상징이고 우산살과 덮개는 여성 상징이다. 그래서 이집트 신화는 누트의 몸은 활짝 펴진 우산살과 같고 게브의 몸은 누트와 합일하는 그 상징과 같다.
누트를 구름으로 상징할 때에 ‘운우지정’으로 남신과 여신의 관계가 마치 구름과 비의 관계로 변할 때에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이 이집트 신화나 소축괘의 내용이다. 누트의 몸에 박힌 점들은 하늘의 별들이고 시에서는 이를 ‘은빛 물방울’이라고 보았다.
누트와 게브가 호흡呼吸 즉, 들숨과 날숨을 조화롭게 할 때에 바위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구름은 올라가 비가 되어 비는 지하수가 되고 다시 용출수가 된다. 여기서도 천자문을 읽는다.
박미서의 시를 이렇게 신화와 함께 읽을 때에 오히려 그 전체 모습을 조망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차라리 신화를 통해 ‘열친 호흡’을 한 번 해본다.
<창이 / 미국 남가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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