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으로 본 박미서 시인의 ‘다른 목소리’ 감상문

창이 승인 2019.03.12 12:30 | 최종 수정 2019.03.23 15:24 의견 0

‘한’으로 본 박미서 시인의 ‘다른 목소리’ 감상문

다른 목소리 / 박미서

보랏빛 달가운 밤이 있어       1연
기억의 나무 변용 속에서
새 길을 받아 입은 옷들이
바람을 실어다 주었다.

오래전 겹꽃잎의                 2연
괄호 하나 열면
달빛 이룬 속삭임으로,

붉은 흙 밀고 오는 참꽃       3연
그물눈의 불씨들
봄마당의 너그러운 소리,

언덕의 산다화처럼             4연
싹눈의 탄생을
기리는 송가 들린다.

하얀 별꽃 이토록 부풀어    5연
초록 허리 짙푸르러져
오는 발돋움,

하늘 깊은 꽃을 따다가      6연
문득, 산호초의 희고 붉은
향연 속을 돌아다본다.

아득하게 짓궂은 소리      7연
기꺼이 헤아리듯 보이듯

소통하는 향기 있어 8연
가만가만히 배어든다.

반달이 열고 닫는 연둣빛에  9연
봄비의 머리카락 휘어질 때,

바람의 나이테 속에서 밝고 또렷한 무늬들,   10연
괄호의 날개를
치며 솟아오른다.

 

머리말

3월을 맞아 박미서의 ‘다른 목소리’가 웹진 인저리타임 창에 올랐다. 100년 전 역사적 의의와 생명이 미동하는 계절의 의의를 함께 생각하면서 감상문을 쓴다. 2·8 무오독립선언문은 ‘한’으로 시작하여 ‘한’으로 끝난다. ‘한’의 사전적 의미 속에는 ‘하나’와 ‘여럿’ 즉, 전체와 부분을 함께 생각하는 전일적 우리 민족 고유한 사유방식과 정서가 함께 담겨 있다. 이에 박 시인의 시는 한의 이러한 전일적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 시의 역사적 의의와 시의 논리적 구조를 함께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시의 구조는 2연과 10연에 있는 ‘괄호’란 말이 시제의 ‘다른 목소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괄호의 의미를 철학자들, 특히 라깡은 이를 상징계와 연관하여 자주 언급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갖는 수학의 집합론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수를 모아 괄호 안에 넣을 때에(이를 ‘괄호 치기’라 한다), 전재의 ‘같음’과 ‘다름’의 문제와 심지어는 지식의 기반을 흔들 정도인 역설의 문제가 모두 괄호 치기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적 감성이 사실은 수학적 구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음악이 수학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듯이. 더 쉽게 말해서 뱀을 보고 놀라지만 왜 그런지를 설명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시인 자신의 순간적인 시상 밑의 훨씬 아래에는 수학과 논리의 과정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한과 수학적 구조를 함께 감상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박 시인의 시로 <그림 3>을 만든 다음, 향가 찬기파랑가와 이육사의 ‘광야’를 이를 통해 감상하기로 한다.

包涵과 包含

모두 10연으로 된 박미서 시인의 ‘다른 목소리’는 연과 연을 연결하여도 같은 연 안에서 언어들을 연결하여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연과 연이 층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단어와 단어 사이가 쉽게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두뇌는 위계질서hierarchy에 익숙해 글의 순서가 위계적이 아니면 혼란스러워 한다. 위계적이란 부분이 층위를 만들어 전체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체 속에 아래 위의 질서가 잡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주요 과학혁명 가운데 하나인 홀로그래피holography 이론은 이러한 위계적 혹은 층위적層位的 사고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어느 층위에도 전체가 다 포함돼, 어느 부분도 전체를 다 반영한다는 전사영적全射影的 의미가 들어 있다.

위계적으로 전체가 부분을 포함包涵하는 것과 부분이 전체를 포함包含한다는 것은 한자로 쉽게 구별한다. 包涵이 물병 속에 물을 담는 물병은 전체이고 물은 부분으로 전체와 부분이 구별되는 것이라면, 包含은 설탕물에서 물이 설탕 속에, 설탕 속에 물이 상호 담긴 것으로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 말 ‘한’은 바로 여럿과 하나가 서로 包含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함의한다.

이제부터 만약에 박 시인의 시를 이러한 한의 시각, 혹은 홀로그래피의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면 위계적으로 이해 안 되던 시상이 아름답게 한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 이 시를 감상하는 데 있어 包涵과 包含은 메타언어로 사용될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말에 대한 다른 의미를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包涵이 아닌 包含의 눈으로 시를 읽으면 잘 짜인 광경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낱말들과 문장들이 아래에 소개하는 하나의 그림표 속에 요약되고 직조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괄호 치기에 관하여

‘괄호括弧 ( ), 그것은 사물을 어떤 소속으로 만들고 싶을 때에, 그리고 이것을 저것과 구별하고 싶을 때에 사용되는 기호이다. 괄호 안과 괄호 밖, 그리고 괄호를 어떻게 치느냐 따라 수학에서는 의미가 달라진다.

박 시인은 ‘다른 목소리’에서 이러한 ‘괄호’란 말을 두 번째 연과 마지막 연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다. ( ){ }와 같이. 시인은 괄호를 은유적으로 ‘겹꽃잎’과 ‘반달’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1> 달의 괄호들. 그림=김문기 화백

달은 초승달-반달-보름달-삭망월로 변할 때마다 괄호가 ...( )( )( )...로 변하다. 초승달에서 보름달의 변하는 모양과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변하는 모양은 서로 ‘역원逆元’이다. 변하는 모양이 반대라는 것이다. 온달을 반으로 나누었을 때에 한 쪽이 커지면 다른 쪽이 작아지는 것을 역원이라고 한다. 음과 양이 정확하게 음양 증감소멸을 잘 나타낸다. 수학적으로 이는 x와 –x의 관계가 아니고 (x)와 (1-x)의 관계이다.

이와 같은 달의 괄호 치기의 모양이 역원인 관계에서 한 가지 주요한 이변이 생긴다. 그것은 달마다 초과 시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주기에 대해 달의 공전 주기를 ‘삭망주기’라고 하는 데, 그것이 29.5일이다. 정수가 아니기 때문에 정수 30일을 만들기 위해 0.5일을 보완해야 한다. 그래서 큰달 30일과 작은 달 29일을 둔다. 이렇게 달의 공전주기와 지구의 공전 주기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윤달이 생긴다.

이는 시간에 있어서 ‘다름’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름’이 생기는 이유는 괄호를 역원으로 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달이 한 달 안에 괄호를 반대로 쳐 제자리에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윤달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x 곱하기 (1-x)는 반드시 시작과 끝이 같아지게 한다.

그래서 박 시인이 시적 상상력에서 괄호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초과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괄호 치기와 함께 초래되는 초과분의 문제 말이다.

언어에서 괄호를 친다는 것은 이름을 명명한다는 것과 같다.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이름이란 괄호 안에 사물들을 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과’란 이름이 명명되는 순간 모든 사과들이 이 사과라는 괄호 안에 다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하나의 이름 안에 사물들을 다 담아도 이름은 사물들을 다 나타낼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괄호가, 즉 이름이 다 담아 나타낼 수 없는 차이를 라깡은 ‘대상 a’라고 한다. a는 마치 윤달이나 윤일 같이 잉여물로서 인간 내면세계 속에서도 가장 골 아프게 하는 존재이다. 시란 이 잉여물 찌꺼기 처리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신질환의 원인도 이 찌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정신병적 구조를 가진다고 한다. 여기서 라깡은 정신병 환자와 ‘정신병적 구조’를 구별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정신병적 구조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찌꺼기인 것을 알고 그것을 표현하려는 차이 뿐이다.

이런 잉여물을 쉽게 이해하자면 말을 해 놓고 한 말이 의미전달을 다 못했을 때에 마음속에 남는 찌꺼기 같은 것이다.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말을 잘하면 잘 할수록 찌꺼기는 더 커진다.

노자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고 할 때에 도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 사이에는 대상 a 같은 것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을 두고 사르트르는 ‘무용無用한 고통’이라고 했다. 말라르메는 시인의 시는 문장이 아니고 ‘낱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낱말도 발화의 순간 잉여를 만든다. 이렇게 시어를 축소해 나가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역설적인 언어가 시적 언어가 된다. 모든 낱말에는 무언의 요소를 지니게 되며 수학에서는 이를 공집합∅ 이라고 한다.

박 시인의 시는 문장으로 읽을 수 없다. 낱말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이 시인이 독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기여이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아예 제자들에게 시를 읽지 못하게 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혼동의 도가니로 이성과 지성을 함몰시킬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미서 시인은 시에서 괄호와 함께 생기는 잉여물 찌꺼기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여기에 감상자는 문제를 해의하기 위해 문제 자체를 가지고 온다. 그것이 집합론이다.

플라톤의 시에 대한 견해는 현대 분석철학이나 언어 철학에 의하여 더욱 심화된다. 합리적이지 않는 형이상학과 종교적인 언어 그리고 그 가운데 시적 언어와 같은 애매한 것들을 모두 철학과 과학에서 추방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기틀) 이론은 과학의 언어 역시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고 한다.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던 틀마저 ‘틀리고’ 그러면 ‘틈’이 생겨, 다른 틀로 ‘트인다’는 것이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이론이다. 그렇다면 과학도 수학도 모두 인간이 이해하는 패러다임에 불과하고 시적 언어에 불과하게 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역시 시적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과 수학이 시와 같아지게 된다.

시인의 괄호( )와 집합론의 괄호( )

‘포스트모던’이란 이렇게 동트게 되었다. 박 시인의 ‘다른 목소리’는 ‘괄호’와 ‘다름’의 두 말에 의해 아래와 같이 독해될 수 있다. 이 두 말은 위에서 설정한 메타언어 包涵과 包含을 구사하면 애매한 시어들 속에 숨겨진 합리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구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시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고 시의 배경으로 들어가면 과학의 언어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시어 자체는 애매하고 비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 배경 구조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시인의 ‘다른 목소리’의 괄호 ( )를 현대수학 집합론의 그것으로 바꾸면 시의 모든 언어들이 수학의 기호들 속에서 유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음악의 음계가 수학의 비례 개념으로 바뀌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음악을 수학의 비례로 나타내자 잉여물 같은 피타고라스 콤마 처리 문제로 서양, 아니 동양 음악까지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가? 박 시인의 ‘다른 목소리’는 이 잉여물 처리라는 관점에서 읽으면 시 감상의 극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른 목소리’에서 ‘다름’이란 괄호를 치는 행위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름이란 요소는 귀찮은 제거의 대상인가? 피타고라스 콤마처럼. 찌꺼기 제거를 사르트르는 ‘무용의 고통’이라 했고, 말라르메는 ‘낱말’로 축소시키려 했다. 물론 음악에서는 무용의 콤마를 바흐에 의해 ‘평균율’로 해소하려 했다.

무용의 고통 때문에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드르 시인들은 언어의 결핍 자체를 즐긴다.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할 때 언어의 결핍을 즐기는 것이다. 무속인들이 무병을 앓듯이 시인들은 언어 결핍증이란 병을 앓는다.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병의 증상을 제거하지 말고 그 증상과 하나가 되라고 한다. 이것이 라깡의 권유이다. 그러나 여기 박 시인이 제시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감상자는 이 방법을 권하는 바이다.

수학에서 괄호를 친다는 것은 집합集合을 의미한다. 박 시인은 중괄호 속에 {참꽃, 산다화, 별꽃}을 묶는다. 이를 겹꽃잎={참꽃, 산다화, 별꽃}이란 집합의 요소들이라고 한다.

참꽃(참)
산다화(산)
별꽃(별)

이라고 하자.

<그림 2> 세 개의 꽃(가)을 반병(나)에 담기

세 개의 요소들을 이와 같이 괄호로 집합을 만들게 되면 어떤 결과가 따르게 되는가? { }를 빈 그릇이라고 할 때에 세 개의 꽃을 빈 병에 담는 방법은 모두 8가지가 가능하다. 그릇에 ‘담김’과 ‘안담김’이란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빈 그릇{ }속에 넣는 경우는

(1) 먼저 아래와 같이 6가지 방법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한 개씩 담는 방법 다음에 두 개씩 담는 방법이다. 한 개씩 ‘담’으면 두 개가 ‘안담’이 되고, 두 개씩 담으면 한 개가 안담이 된다. 이는 부분이 전체 속에 담김이기 때문에 包涵이라 한다.

(2) <그림 2>의 집합론의 수를 셈하는 방법은 유클리드 이후 획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물건을 셈할 때 먼저 빈 그릇을 옆에 두고 옮겨 담을 때 ‘담김’과 ‘안담김’이란 2를 밑으로 하여 물건의 개수 n을 지수로 하는 2n의 방법으로서 이는 갑골문에서 정인들(점치는 사람들)이 점괘를 찾을 때에 사용하던 방법으로 역易의 기원이 된다. 시에서는 n=3이기 때문에 2³=8이다.

(3) 한 개의 괘에는 3개의 효가 있고 이를 밑에서부터 초효, 중효, 상효라 한다. 이를 세 개의 꽃에 연관을 시키면 아래와 같다.

− 별꽃(상효)
− 산다화(중효)
− 참꽃(초효)

이 세 개의 꽃이 상중하의 위치에 따라 ‘담겨’(들어 있을 경우)는 −(양)으로, ‘안담겨’(안 들어 있을 경우)는 --(음)으로 표시하면 8개의 꽃들은 8괘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참꽃} ☳(진)
{산다화} ☵(감)
{별꽃} ☶(간)
{참꽃,산다화} ☱(태)
{산다화,별꽃} ☲(리)
{별꽃,참꽃} ☴(손)
(괄호 안은 괘의 명칭)

그렇다면 ‘다 담김’과 전혀 하나도 ‘안담김’도 생각해야 되고 그러면 아래 두 집합도 당연히 집합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包含이라고 한다.

{산호초} ☷(곤) 공집합{∅}
{참꽃,산다화,별꽃} ☰(건) {하늘 깊은 꽃}

이들 8개를 부분집합 혹은 멱집합冪集合 power set이라고 한다. 그래서 3개의 ‘요소elements’들에서 8개의 ‘부분집합part’ 이 생긴다.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요소와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서만 시제인 ‘다른 목소리’의 의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전체자체{a,b,c}와 공집합{∅}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를 찾는 것은 앞으로 말할 존재와 사건을 구별하는 주요한 과제이다. 시에서 이 둘이 분명하게 나타 난 곳은 6연이다. ‘하늘 깊은 꽃’과 ‘산호초’가 바로 전체자체와 공집합이다. 이 둘은 같은 연안에서 대칭을 이룬다. ‘하늘 깊은 곳의 꽃’은 3개의 꽃들과 모든 꽃들을 다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꽃이다. 그래서 ‘하늘 깊은 곳의 꽃’이란 집합의 이름 에 담기는 요소들은

{참꽃,산다화,별꽃} ≡ {하늘 깊은 꽃}

와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6연 안에 있는 바다 밑의 ‘산호초’는 공집합으로 상징이 된다.

{산호초} ≡ 공집합 ∅

공집합에서 전체집합이 나오고 전체집합에서 다른 부분집합이 나온다. 그리고 공집합과 전체집합이 대칭을 만들 때에 다른 부분집합들도 대칭구조를 갖게 된다. 분명히 이 두 집합은 다른 여섯 개와는 다르다. 후자가 包涵이라며 전자는 包含이기 때문이다. 하늘 깊은 꽃들은 고유명사로서의 이름 붙어 있는 바, 라깡의 상징계에 해당한다. 그러면 包含과 包涵의 구별이 얼마나 큰가를 보기로 한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의 대표작 ‘존재와 사건 Being and Event’에서 요소와 부분을 구분하는 것으로 철학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요소와 부분을 구분해야 될 이유는 부분은 요소를 ‘초과excess’ 하기 때문이다. 즉, 3개의 요소들에서 8개의 부분들이 나왔다. 이를 초과라 한다. 4개의 요소들이라면 16개의 부분이 나올 것이다. 이 초과의 문제가 잉여의 문제인 것이다. 초과할 때에 요소에 없는 부분들이 나타나고(공집합 같이) 심지어는 전제 자체가 자기 속에 부분으로 包含된다. 바디우는 이를 두고 ‘사건event’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包涵은 ‘존재’의 논리이고, 包含은 ‘사건’의 논리이다.

‘존재’와 ‘사건’의 차이는 包涵과 包含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전체가 부분을 그 안에 담는 包涵이지만, 사건은 전체 속의 부분, 부분 속의 전체인, 즉 ‘한’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위 8개의 부분들에서 包涵과 包含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사건화해 버렸다.

그러면 박 시인은 자기의 시에서 존재와 사건을 어떻게 구별해 말하고 있는가?

박 시인은 시에서 존재와 사건은 확연이 구별된다. 존재는 시에서 ‘꽃들’의 시상들로 나타낸다. 3연-5연 까지가 존재로서의 꽃을 말한다. 그리고 사건은 1연의 ‘저 바람을 길어다 준다’ 와 10연의 ‘바람의 나이테’에서 ‘바람’으로 확연히 존재(꽃들)와는 구별되는 사건을 말한다. 꽃과는 달리 바람은 부분과 전체 간의 구별이 불가능한 包含으로서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다.

즉, 공집합과 자기 자신은 전체 자체가 자기 속에 부분으로 들어와 包含된 것이다. 이와 같이 사건은 ‘같음’에서 ‘다름’을 만들어 낸다. 즉, 위 8개의 부분들 속에 있는 부분들은 모두 다르다. 특히 공집합 같은 이질적인 것이 부분으로 들어온다.

1연의 ‘오래전 겹꽃잎의 괄호’가 존재에 해당한다면, 9연의 ‘바람의 나이테 속에서 밝고 또렷한 무늬들, 괄호의 날개를 치며 솟아오른다’ 이제 8개의 부분들로 하나의 연계망을 만들면 아래와 같다.

<그림 3> 8괘와 8꽃들 간의 멱집합 구조

<그림 3>을 감상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그림 3>은 잉여 찌꺼기를 처리하는 시인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3개 요소들에서 8개의 부분들이 생겨 잉여물이 들어올 때 이를 제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제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라깡 이전의 정신병 치료 방법이었다.

정신분열증이란 8개의 각 부분들이 전체집합(하늘 꽃들) 속에 통일을 만들지 못할 때에 생기는 증상이고, 과대망상증이란 반대로 전체집합이 다른 부분들(별,산,참)로 분화되지 못한 증상으로 자기가 ‘신’이다 ‘대통령’이라고 자처하는 증상이다. 가장 심각한 증상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공집합이다. 우울증이란 공집합에 부분을 채우려 하나 채워지지 않는 증상이다.

<그림 3>에서 잉여에 해당하는 공집합과 전체집합이란 ‘다른 목소리’도 서로 대칭구조를 만들게 되고 공집합인 산호초가 없이는 참꽃도, 산다화도, 별꽃도 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창조의 시원은 공집합과 하늘 꽃의 대칭 구조에서 가능해 진다. 그래서 존재가 사건화하는 것이 창조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그림 3>을 이상적으로 그려내낸다.

무에 해당하는 공집합 {∅}에서 어떻게 {참꽃}, {산다화}, {별꽃}들이 피어나는 가이다. 이는 무에서 유가 어떻게 생겨나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 무가 먼저냐 유가 먼저이냐의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유야무야有耶無耶’란 말 그대로 양자 사이에는 선후가 없다. 집합론은 이를(0)0=1으로 대답한다. 다시 말해서 (산호초)0=(0)0과 같다. 공집합 (0) 자체도 그 안에 개수로는 ‘0’이란 한 개의 개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모두 공이란[萬物皆空] 것은 110=1, 20=1, 30=1인 데서 여실하다. 물리학에서도 우주의 시발이 공이 제 자신을 包含하는 즉, 진공眞空에 있다고 한다. 이는 집합론의 공식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진공이 ‘산호초’로 상징된다.

즉, 0에 괄호 치기를 하여 {0}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바로 {1}과 같아진다. 다시 말해서 박 시인이 시에서 ‘괄호’란 말을 쓴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괄호가 없었더라면 산천에서 우리는 꽃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10연의 ‘바람의 나이테’란 공집합(산호초)에서 전체 집합(하늘 꽃)까지 만드는 괄호의 괄호들의 층위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층위層位’란 하이랄키가 아니고 호랄키horarchy이다. 각 층이 모두 부분이면서 전체인 ‘parthole’이다. 그래서 시의 어느 부분에서 보아도 전체가 다 보인다. 이를 두고 시의 사건화라 하는 것이다.

다시 모아 감상한다

(1) 6연에서 시인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문득’이라고 하면서

하늘 깊은 꽃을 따다가
문득, 산호초의 희고 붉은
향연 속을 돌아본다

고 한다. <그림 2>를 응시하자. 공집합이란 빈 항아리에 하늘 꽃 집합들이 담기는 순간을 ‘문득’이라고 한다.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에 흑암이란 공백 속에 ‘있으라’고 하는 순간이다. 공백에 새로운 것이 담기는 순간을 ‘문득’이라고 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없는 유와 무가 상생하는 순간이다. 신화에서는 일관되게 바다 심연은 무의 공간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산호초’는 공백의 상징이다.

이제 ‘하늘나라 꽃들’에게 이름을 명명하여 {참꽃,산다화,별꽃}이라 할 때에 상징계가 나타난다. ‘다른 목소리’의 정체가 분명해 졌다. 적어도 공집합에서 발생한 다른 목소리는 8개이다.

(2) 이들 8개의 다른 목소리들은 바람을 일구면서 서로 대칭 구조를 만든다. 그것이 <그림 3>이다. ‘하늘 꽃’과 ‘산다화’가 상하에서 대칭구조를 만든다. 공집합 산호초에서 낱개 씩 꽃피우기 시작한다. 마치 바다에서 모든 생명이 나오듯이. 피우는 순서를 보면, 참꽃은 ‘붉은 흙 밀고 오는 참꽃’ ‘싹눈의 산다화’ ‘초록 허리 짙푸른 별꽃’ 는 봄에 싹터 꽃펴 초록 잎이 펴는 순서와 같다.(3연-5연)

그런데 이들 존재는 사건화한다. 다시 말해서 전체와 공집합 자체도 8개의 부분으로 包含된다. 包涵에서는 창조가 불가능하다. 존재가 사건화해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될 때에, 다시 말해서 ‘한’에서만 창조가 가능하다.

(3) 꽃들이 바람이 돼 나이테를 만들 때에 우주에는 파동이 형성된다. 파동은 위계질서를 전사영구조로, 하이랄키hierarchy에서 호랄키horarchy로 변모시킨다. 호랄키란 하이랄키와 홀로그래피의 합성어이다. 이를 마지막 연에서

바람의 날개 속에서 밝고 또렷한 무늬들,
괄호의 날개를
치며 솟아오른다.

고 한다.

(4) <그림 3>은 시인이 그리는 이상이다. 삼일운동의 독립선언문 속에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과 싸우자는 것이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자기들을 갑으로 우리를 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위계질서 없는 ‘한’의 세계를 시인을 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아래 무오 독립선언문 서언 부분을 다시 읽는다.

박 시인의 시는 이와 같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병든 정신 구조를 치유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림 3>과 시를 그리고 무오독립선언문을 함께 그 구조를 대차대조 한다는 것은 즐거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용의 고통’을 치루면서 쓴 시를 쓴 시인에 감사한다. 그리고 시를 통해 <그림 3>을 얻은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부분집합의 결여로서 본 시어들

박 시인의 ‘다른 소리들’은 공집합과 전체집합, 그리고 6개의 부분집합들로 짜여진 (그림 3)과 같은 구도를 가진다. 이와 같은 구도로 다른 시들을 보는 것은 이 시를 감상하는 흥을 더하게 할 것이다.

신라 향가 가운데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를 박의 시와 대조·비교해 본다. ‘찬기파랑가’란 말 그대로 ‘기파랑’이란 화랑을 찬탄한다는 의미이다. 경덕왕의 귀에까지 이 노래가 들렸고 왕이 충담사란 스님을 불러 이 노래를 확인하고 지어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찬기파랑가의 내용은

열치며/나타난 달이 흰구름 따라 떠난 언저리/새파란 시냇물에 기랑의 모습 보이네/일오내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 끝자락 쫓고 싶어라/아! 잣나무 가지같이 높아 눈마저 덮지 못할 고깔이여/

박 시인의 시를 통해 쉽게 우리는 공집합과 전체집합이 이 시에서 무엇인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구름을 열치고 달이 나타나니 달이 일오내 조약돌 속에 박혀 버린다. ‘열치고’가 바로 괄호 치기이다. 동사가 시의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경덕왕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며, 화랑의 결기가 괄호 열기로 표현된다. 이는 박시인 시에서 괄호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열차게 괄호가 쳐진 다음 하늘의 달과 내에 비친 달의 대비가 바로 전체와 공집합의 대비인 것이다. 그러면 그 괄호 안에 들어 갈 부분 집합은 조약돌과 잣나무이다. 조약돌은 ‘산호초’에 비견될 수 있는 달의 다름 모습으로 물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공집합 ∅이 조약돌이 박힌 흔적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재미를 돋운다.

조약돌과 잣나무는 기랑의 인간됨을 역력히 상징하기에 손색이 없다. 조약돌은 기랑의 맑고 단아하면서 청순한 모습을 그리고 잣나무는 고결한 절제 같은 것을 상징한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이후의 왕이었고 화랑은 통일 이후 점차 그 명성과 지위가 약화하던 시기이다. 그래서 충담이 회고한 찬기파랑은 회고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기파랑’이란 화랑에 관해서는 일연이 충담을 통해 이렇게 전해지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향가에서 전체와 공집합이 괄호 쳐졌고, 그 안에 부분 집합들이 包含돼 있다는 점이다. 부분 집합의 수가 많을수록 시인이 시를 쓸 사회상이 풍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시대에 쓰인 시작들은 대부분이 공집합뿐이거나 아니면 시대에 저항하는 전체집합뿐이다. 후자가 특히 사실주의 문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공집합을 ‘광야’로 비유한 이육사는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 라고 하늘에 괄호가 하나 열렸으나 그 광야는 바다에서 막히고 만다.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광야의 괄호는 닫히지 못한 채 { ,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결국 이육사는 괄호 안에 부분(초인)을 채우지 못하고 기다리다 죽고 만다. 초인이 찬기파랑가에서는 잣나무이다. 이렇게 괄호를 닫지 못할 때에 시가 정한情恨으로 끝나고 만다. 소월의 시에서 같은 달을 노래해도 ‘저 달이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몰랐어요’와 같이 말이다. 시대의 비운이 정한으로 여실하다. 찬기파랑가는 구름을 열치고 나와 냇물에 비취고 그 달의 모습이 기파랑이고 다시 잣나무 같은 기상과 기품으로 변한다는 데 말이다.

만약에 이육사와 김소월이 해방조국 공간에 시를 썼더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답이 <그림 3>에 있지 않을까? <그림 3>은 ‘한’의 사전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여기서 결여가 생길 때에 다시 말해서 어느 한 부분이 빠질 때에 한은 ‘한恨’으로 변해 버리고 그래서 종종 ‘한恨’을 ‘여한餘恨’이라 하는 이유도 ‘한’의 모자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육사의 ‘광야’는 이러한 여한을 남기고 있으며 아래 무오독립선언문 속에는 한의 결여를 채우려는 여한이 역력히 깔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미서의 시는 실로 우리 속에 결여된 여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형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박미서 시는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한의 사전적 의미 속에 있는 ‘크다’ ‘가득참’이 시에 여실히 나타난다. 즉, 2³=8과 같이. 그러나 나라 잃은 여한 속에 쓰인 시들과 아래 무오독립선언 속에는 얼마나 많이 한이 여한餘恨을 남기고 있는가?

무오독립선언문과 한과 餘恨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韓)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산(高山) 려수(麗水)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유럽과 아시아에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韓)이라.

<창이/미주 오렌지카운티 거주>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