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다른 시들에서와 같이 박미서의 ‘느낌’에서도 연과 연이 대칭 구조 즉, 쌍대칭duality 구조를 이룬다. ‘쌍대칭’이란 연과 연이 서로 대각선 구조에서 대칭을 만드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60년대 소위 ‘랑그랑즈 프로그램’이 쌍대칭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였다. 가장 작은 미시 세계로부터 가장 큰 거시 세계까지 온 우주가 쌍대칭 구조라는 것이 현대 과학이 도달한 결론이다. 시인들은 이러한 쌍대칭의 구조를 무의식에서 건져 올려 다반사로 자기들의 시에 적용한다. 본 감상문은 '느낌'의 연들을 쌍대칭 구조로 파악한 다음 이를 시간의 상대성 원리에 적용해 보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려 한다.
쌍대칭 구조와 ‘느낌’
느낌
밝은 이마 위 광맥을 잇는 물결
끝 모를 노래, 새로운 파도
순연히 짚어 가는 고요 속에
온순한 두 눈처럼
별이었을 낮곁의 냇물
비비추꽃 바라보는 산
짧은 밤에 잉태된 갓밝이
두견새 앉은 울음 무늬들
어느 벼랑에서나 물보라 피니
산줄기 깊어 지리
(표1)의 쌍대칭 구조에 따라 시의 연들을 다시 조정해 보면 아래와 같다. 서로 상통하지 않던 흐름이 다시 재조정되면서 더욱 선명하게 흐름이 만들어지는 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연
밝은 이마 위 광맥을 잇는 물결
끝 모를 노래, 새로운 파도
5연
어느 벼랑에서나 물보라 피니
산줄기 깊어지리
2연
순연히 짚어 가는 고요 속에
온순한 두 눈처럼
3연
별이었을 낮곁의 냇물
비비추꽃 바라보는 산
4연
짧은 밤에 잉태된 갓밝이
두견새 앉은 울음 무늬들
1-5연과 3-4연이 쌍대칭을 만들 때에 2연은 쌍과 쌍을 매개하는 연이 된다.
‘느낌’ 속에 흐르는 두 개의 시간
쌍대칭 1과 5연 안에는 두 개의 다른 시간의 흐름이 있는 것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먼저 5연,
어느 벼랑에서나 물보라 피니
산줄기 깊어지리
5연에서 물보라 치는 바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산이 끝나면서 큰 벼랑이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물보라가 억만년 동안 물보라 피어나니 바위가 깎기고 깍여 산줄기가 골이 되도록 깊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는 46억 년 전 지구가 생겨난 이래 바다와 산의 기 억만년 동안이 경과하고 지속되는 시간을 시상으로 감상하기에 족하다. 즉, 과학에서 ‘침식’ 혹은 ‘풍화’라는 말을 시로서 읽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억, 경, 조, 그리고 그 이상의 시간을 말 할 때에 천사가 1년에 한 번 씩 내려와 바위 위에서 춤을 추고 갈 때에 그 바위가 다 닳는 시간을 ‘1겁’이라고 한다. 겁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물보라가 산줄기의 벼랑을 골로 만든는 시간을 5연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시간은 5연과 쌍대칭 관계에 있는 1연의
밝은 이마 위 광맥을 잇는 물결
끝 모를 노래, 새로운 파도
이다. 산줄기가 파여 골이 되듯이 사람의 이마 위의 물결, 그것은 연륜과 함께 파이는 주름살 같은 것. 5연의 ‘물보라’를 1연에서는 ‘파도’라 하고, ‘벼랑’은 ‘이마’라 하고, ‘산줄기’는 ‘광맥’이라 한다. 그래서 5연에서는 산과 바다 사이에 흐르는 시간이 1연에서는 인간의 몸에서 흐르는 시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시간과 쌍둥이 역설
이 두 시간은 길고 짧은 장단의 관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두 존재가 파악한 같은 시간이다. 그 이유를 현대 과학은 ‘쌍둥이 역설’을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두 쌍둥이가 하나는 지구에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한다. 두 쌍둥이가 나중에 만났을 때에 하나는 젊은 그대로인데 다른 하나는 백발이 되어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도출된 결과다.
이렇게 다른 두 개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을 2연에서 ‘두 눈’이라 한다.
2연
순연히 짚어 가는 고요 속에
온순한 두 눈처럼
우리는 지구 위의 시간과 우주 공간 의 시간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산다. ‘순연히 짚어 가는 고요 속에서.’ 이 두 시간은 상대적인 시간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이와 같은 쌍둥이 역설과 연관이 된다.
그러면 왜 이런 시간을 경험하는 서로 다른 두 눈이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이해와 방법에 있어서 아인슈타인과 화이트헤드는 서로 다르다. 이 감상문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이해가 시에 나타난 시간 이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려 한다.
‘낮곁’과 ‘갓밝’의 두 상대적인 시간의 일치
두 개의 다른 시간의 흐름을 박미서 시인은 3-4연의 쌍대칭에서 ‘낮곁’과 ‘갓밝’이라고 대응시킨다. 그리고 후주의 설명에서 ‘낮결’이란 “한 낮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의 시간을 둘로 나누었을 때에 그 전반의 시간”이라 할 때에 이에 대해서 여기서만 사용되는 신조어로서 후반 시간을 ‘낮옆’이라 부르기로 한다. ‘갓밝’이란 “새벽 동이 틀 무렵의 희무끄레한 상태, 지금 막 밝아진 때”라고 한다. 신라 고승 ‘원효元曉’를 순수한 우리 말로 ‘갓밝’이라 새삼 생각해보게 한다.
두 쌍둥이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출발했는데 하나는 ‘갓밝’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낮곁’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 ‘느낌’을 감상하는 대미가 된다. 박미서 시인은 시 ‘느낌’을 페이스북에 발표하기(5월 10일)전에 같은 페이스북에서 프리드만의 글을 올렸다. 프리드만에 의하면,
“빛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광명이라고 하는 젊은 아씨가 있었네, 상대적 방법으로 그는 어느 날 낮(낮곁)에 출발하여 그 전날 밤(갓밝)에 왔다네”(Alan J. Fiedman)
낮결에 출발했는데 당연히 과거에 있어야 할 아씨가 전날 밤에 와 있었다는 것이다. 미래가 과거 속에 있었다는 데자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시간의 동시성 현상이 생기는 것인가?
이제 두 쌍둥이 갑과 을을 ‘낮곁이’와 ‘갓밝이’라고 할 때에 그들의 시계를 같게 일치시켜 놓고 하나는 우주비행사가 되어 별나라고 떠났고, 다른 하나는 과학자가 되어 지상에 남는다.
이상의 시 ‘운동’
북쪽으로 향하고 남쪽으로 걷는 바람 속에 멈춰선 부인
영원한 처녀
지구는 그녀와 서로 맞닿을 듯이 자전한다
에서 이상은 대양은 북쪽을 향해 남쪽으로 흐를 수 있다. 남으로 계속 가도 북에 도달한다. 그것은 시간이 멈춰선 행위와 마찬가지듯이 멈춰선 여인은 영원히 처녀라는 것이다. 남과 북 사이에 시간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상징한 것이다.
이상이 시를 쓰던 1931년 스페인의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소재로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ce of memory’을 그렸다. 이상은 당시 달리의 그림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상은 달리의 이 작품에 미쳐버렸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만약에 이렇게 시계 자체가 녹아내린다면 그 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시계마다 다 다를 것이다. 실제로 서울 남산 탑의 시간은 해면의 시간보다 100조 분의 7 정도 빠르다. 이상은 “시계가 나보다 젊게 되었다”고 하면서 시계를 내동댕이쳐 버렸다고 한다(김학은저, 이상의 시와 괴델의 수, 보고사, 104-5쪽).
시계가 달리의 작품과 같이 있는 곳의 열을 받아 녹아내려 한 곳에서는 ‘갓밝’이고 다른 한 곳에서는 ‘낮곁’이라고 노래한 박미서 시인은 이상과 같이 달리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속으로의 시간
박미서 시인은 시에서 시간을 지속duration으로서의 시간과 점point으로서의 시간으로 나눈다.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파도’(1연)와 ‘산줄기’(5연으로 대칭을 만들고, 점으로서의 시간은 ‘물결’(1연)과 ‘물보라’(5연)으로 대칭을 만든다.
점들로서 시간은 지속적인 시공간 안에 들어 있다. 상대성원리를 이해할 때에 아인슈타인은 점으로서의 시공간을 이해하려 했고, 화이트헤드는 지속과 점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이들의 연속을 시에서는 ‘끝모를 노래, 새로운 파도’라고 한다. 점으로서 지속된다는 말이다. 순간들은 경계를 만들면서 새로운 지속으로서의 파도타기(산줄기를 달리는)를 한다. 지속(파도)들의 경계들을 만들면서(물결을 만들면서) 각 순간들은 각각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시공간 체계는 지속들(파도와 산줄기)의 집합이고, 각 시공간은 다른 시공간들과 평행한다. 즉, 시공간은 다양한 구간들의 집합이다.
우주 비행사는 과학자와 시계를 동시에 맞추어 놓고 먼 별로 날아간다. 우주 공간의 주변을 다 돌아보고 나서, 과학자-갓밝이 있는 지구로 되돌아 와 보니 낮곁의 시간은 2년이 지났는데, 지구의 남아 있던 갓밝의 시간은 200년이 지난 것을 확인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두 쌍둥이는 어느 한 점의 순간(물결과 물보라)에서는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물결이 파도 없이 이해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아인슈타인은 파도 없는 물결을 따로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데 대하여 화이트헤드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박미서 시인은
밝은 이마 위 광맥을 있는 물결
끝모를 노래, 새로운 파도(1연)
이라고 화이트헤드의 편을 든다.
박미서 시인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여러 다른 시어들로 이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점으로서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시인은 연들을 쌍대칭 구조로 만들어가기까지.
그러나 거개의 시인들은 자기들의 시에서 쌍대칭 구조 만들기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시어들을 일관성 있게 연결 시켜버린다. 혼돈스러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미서의 시는 오히려 시의 연들을 뒤바꾸어 놓음으로-다시 말해 쌍대칭을 만듦으로-지속적인 시간을 들어내고 있다. 1연과 5연은 분명이 이어지는 연이지만 가장 위와 가장 아래로 갈라놓는다. 이렇게 연들을 쌍대칭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유 자체가 바로 갓밝(4연)이와 낮곁(3연)의 쌍대칭적 시간이해와 연관시키기 위해서이다.
두 쌍둥이 간에 시간 차이가 나는 이유를 두고서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중력 때문에 하나는 휘어진 공간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곧은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아인슈타인은 공간이 휘어진 이유는 중력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순수 기하학적, 다시 말해서 위상공간의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즉, 서로 같은 공간에 있으나 다른 ‘느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박미서 시인의 시제가 ‘느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성, 연쇄성, 뒤집힌 연쇄성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래 세 가지 법칙들 때문이라고 한다.
‘동시성 AB simultaneous’
‘연쇄성 A→B sequential’
‘뒤집힌 연쇄성 B→A inverted sequential’
이 세 가지 법칙들을 통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와 박미서 시의 느낌을 이해하기로 한다.
3연에서 ‘별이었을 낮곁의 냇물’이라고 할 때에 밤과 낮이란 비연속성, 다시 말해서 밤과 낮을 점으로 이해했을 때에는 비연속적인 것 같지만 밤의 강 ‘은하수’는 낮에는 그대로 ‘냇물’이다. 시인은 밤과 낮의 단절을 은하수와 냇물의 연속성으로 ‘연속적 비연속’ 혹은 ‘비연속적 연속’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밤과 낮에 상관없이 은하수 냇물을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밤과 낮이란 시간적 비연속을 공간적 연속으로 접목 시키고 있다. 실로 절묘한 표현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산에 핀 비비추 꽃은 거기 있다, 그러나 ‘바라보기’에 따라서 산으로도 보이고 꽃으로도 보인다. 어느 것이 커 보이는 가는 바라보기의 차이일 뿐이다. 산이 커 보이기도 하고 비비추 꽃이 커 보이고도 한다. 다시 말해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 비비추와 산은 상대적이다.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런 ‘바라보기’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4연에서도 시공간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는 마찬가지 이다. 느낌의 순간은 길지 않다. 느낌은 짧아야지 그 진가가 들어 난다. 뱀을 보았을 때에 왜 놀라는 가? 그것은 언젠가 인간이 겪었던 파충류에 대한 느낌이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뱀을 보고 직감적으로 놀라는 것은 오래 시간 동안 인간들이 겪었던 느낌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이나 감성 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느낌’이다.
그래서 ‘짧은 밤에 잉태된 갓밝이’라는 것을 느낌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 동시에 그것은 인류가 수 만년 경험했던 문명사적 의의마저 갖는다. 대부분의 각자覺者들 특히 원효마저도 갓밝의 순간을 포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갓밝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은 ‘울음 무늬’로 얼룩 질 것이다.
이렇게 박미서의 시 ‘느낌’ 안에는 상대성 원리라는 과학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결국 지속 속의 점의 순간들을 느낌의 순간들로 포착하고 있다. 짧은 밤에 잉태된 갓밝은 다시 길고 깊은 고요 속으로 접어들면서 모든 대칭하는 상대적 존재들을 하나로 바라보는 두 눈의 순연함으로 돌아간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란 화두가 결국 상대성 이론의 그것이란 말이다.
순연히 짚어 가는 고요 속에
온순한 두 눈처럼 (2연)
<창이 / 북미 오렌지카운티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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